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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읽는 한의사-75화 (75/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75화

“아…… 아니, 그렇긴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그리고 날?”

갑작스러운 입사 제안에 정우는 얼떨떨했다.

만약 정한 한방병원 부산점에서 계속 진료를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면 옳다구나 동기인 재마의 제안을 받아들였겠지만, 정한 한방병원의 부당한 행동을 동조한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 퇴사한 정우의 상황에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여기에서 진료를 봐도 되는 걸까.’

자신이 왜 정한 한방병원에서 퇴직을 했는지 정확한 이유를 묻지도 않고 입사를 제안하는 재마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정우가 다시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내가 퇴직하고 어떤 한의원에도 못 들어가고 있으니 걱정돼서 그래?”

혹여 자신을 동정하는 마음에 동기인 재마가 입사 제안을 하는 것일까 정우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개인적인 일도 아니고, 한의원 하나를 운영해 나가는 내가 개인적인 감정으로 한의사를 뽑을 거라고 생각해?”

정우의 물음에 지금까지 미소를 짓고 있었던 재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우리 한의원에서 한의사가 더 필요하고, 명의 한의원에 어울릴 만한 한의사를 뽑는 거야.”

“그렇지만…… 나는…….”

정우는 입에서 자신은 양심을 버렸던 한의사라는 말을 미처 꺼내지 못했다.

“네가 정한 한방병원에서 왜 퇴사를 했는지, 정확히 무슨 일을 했는지 묻지 않을게. 하지만 네 맘속에 있는 한의사로서의 소신은 잊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재마는 다시 한번 정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우는 이제는 다짐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재마의 손을 잡았다.

어렵사리 자신의 손을 잡고 함께하기로 마음을 먹은 정우를 재마는 와락 안았다.

* * *

서울 종로 모처에 있는 높고 긴 담장 안쪽 깊숙이 자리 잡은 한옥.

담장 안쪽으로 차들이 줄지어 들어가고, 차에서 내린 사내 둘이 서로의 얼굴을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다가섰다.

“아이고. 대표님, 이렇게 찾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박상도를 본 문화재청장은 먼저 나서서 그를 반겼다.

“시간을 내주셔서 제가 더 감사하죠. 진작 이런 자리를 만들었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가 진작에 소식을 알고 있었다면 이렇게 기다리고만 있었겠습니까.”

상도는 문화재청장을 보자 목례를 가볍게 하며 예를 갖췄다.

상도의 깍듯함에 청장은 손사래를 치며 상도의 손을 잡았다.

두 사내는 서로의 손을 잡고 허허 웃음을 터뜨렸다.

“자세한 이야기는 안으로 들어가서 하시죠. 보는 눈도 있는데.”

“네. 그럽시다.”

반가움은 반가움이었고, 더 긴 이야기는 안쪽으로 들어서서 은밀히 하자는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한정식 식당의 직원이 나와 안내를 하자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이렇게 청장님을 모시기까지 제가 고민이 아주 많았습니다.”

“이해합니다. 근데 사실 이런 일이 종종 있습니다. 저희야 현업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판단을 하는 일을 하니까요.”

문화재청장은 이미 초대를 받기 전 간단하게 들은 박상도의 사연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일이 이렇게 꼬여 있어서야…….”

상도는 문화재청장에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다소 민망하다는 듯, 껄껄 웃으며 침을 삼켰다.

“조선 말기에는 혼란스러워 노비들이 집문서 땅문서 들고 튀는 일이 파다했습니다. 글자도 모르니 돈 되는 것 같은 건 모두 들고 나선 게지요. 대표님 집안은 민생을 위해 힘쓰시느라 집안 사정 챙기실 여유가 있으셨겠습니까. 못된 건 노비 놈들이죠.”

청장은 말하지 않아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편하군요. 하지만 아직까지 회수 과정이 쉽지 않아서요. 도통 놔줄 생각을 안 하네요.”

“원래 못 가진 것들이 양심도 못 가졌죠. 자신의 조상이 훔쳐 온 거면 아이고 하고 본 주인에게 돌려줘야 하는데, 고개를 숙이기는커녕 되레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죠.”

청장의 말에 상도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나오는 음식을 바라보았다.

“음식이 나왔으니 음식부터 드시죠. 많이 드세요. 오늘은 잘 부탁드린다는 뜻으로 제가 대접하는 겁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오늘 좋은 곳에서 좋은 분이랑 함께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대표님.”

“제가 영광입니다. 청장님.”

상도는 청장 앞쪽으로 좋은 음식들을 옮겨놓았다.

* * *

“오늘부터 저희와 함께하실 이정우 선생님이십니다.”

명의 한의원 진료 시작 전, 전 직원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재마는 정우를 소개했다.

재마 옆에는 새로운 명의 한의원의 가운을 입은 정우가 서 있었다.

갑작스럽게 채용된 한의사였지만, 명의 한의원의 직원들은 진심으로 박수를 치며 그를 반겼다.

신규 환자가 예전처럼 물밀듯 밀려오지는 않았지만, 점점 야간 진료를 원하는 환자들도 생겨났다.

그뿐 아니라 오전에는 혼자 진료를 보는 재마가 벅찰 정도로 환자가 찾아오는 바람에 점심시간을 지키지 못할 때도 파다했다.

“많이 부족하겠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이정우입니다.”

정우는 직원들의 박수를 받으며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아마 처음에는 새로 오신 선생님에게 환자들이 쉽게 다가가지 못할 테니 주변 선생님들께서 많이 도와주셔야 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처음 명의 한의원에 왔었을 때를 생각하며 재마가 이야기를 하자, 정 실장은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 앞으로도 우리 명의 한의원 식구들 모두 잘 지내봅시다. 오늘도 힘내봅시다.”

재마의 마지막 말에 박수를 치며 모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근데 이 원장님, 처음에 환자들이 다가오지 못할 거란 이야기는 무슨 뜻입니까?”

정우는 동기였지만, 재마가 이제 자신의 몸담는 한의원의 대표 원장님인 만큼 깍듯한 존댓말을 했다.

“다 겪어 보시면 압니다. 이 선생님.”

재마는 정우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이며 곧 겪게 될 거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이상하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한의원 진료를 처음 하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다는 듯 정우는 재마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이정우 선생님?”

“아, 네.”

정우는 자신을 뒤에서 부른 효주를 바라봤지만, 아직까지 그녀의 이름이 익숙하지 않아 가운에 적혀 있는 이름을 바라봤다.

“이효주예요. 정한 한방병원에서 오셨죠? 저도 정한 한방병원에서 왔어요.”

효주는 정우의 시선을 느꼈는지, 먼저 손을 내밀며 자신을 소개했다.

“네? 아 그러셨군요. 잘 부탁드려요.”

“혹시 무슨 일 꾸미시려거든, 쉽게 생각하지 마세요.”

“네?”

효주는 먼저 인사를 건네며 미소를 지었지만, 정우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서며 그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읊조렸다.

효주의 알 수 없는 말에 정우는 또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이 선생님! 이제 진료 시간 다 되었습니다.”

정우가 먼저 진료실과 처치실로 들어간 두 사람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자, 정 실장이 진료시간이 다 되었다는 것을 알려줬다.

“네.”

정우는 얼떨떨한 마음으로 첫 진료를 위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한의원이 다 똑같지 뭐. 그리고 이효주 선생님은 또 무슨 소리지?”

방으로 들어와서도 한참을 고민한 정우는 자신의 진료실로 환자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간, 두 시간…….

진료실 밖에는 환자들이 대기하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정우의 진료실 문을 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처음에는 책상에 앉아 진료실로 들어올 첫 환자를 기다리며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있던 정우였지만, 점점 기다리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왜 내 진료실에는 아무도 안 오는 거야?”

정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의 좁은 공간을 이리, 저리 움직여 보다가 답답한 마음에 진료실 문을 빼꼼 열었다.

밖에는 대기실을 꽉 채울 정도로 환자들이 넘쳐났고, 처치실에도 환자들이 있어 처치실 직원들은 물론 정 실장도 정신이 없어 보였다.

고개를 빼꼼 내밀었던 정우는 자신이 바깥 상황을 보기 위해 나온 것을 누군가 눈치라도 챘을까 봐 어색하지 않도록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안녕하세요. 아이고 새로 오신 슨생님이신가 보네.”

“네. 안녕하세요.”

정우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대기를 하던 환자는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다가와 그를 반겼다.

“젊은 원장님이 오시더니, 다른 선생님도 젊은 선생님으루다가 고르셨고만?”

정우를 이리저리 따져보듯 환자는 그를 이리저리 바라봤다.

“네?”

“아녀 아녀. 젊을 때가 좋지. 그렇죠?”

“아, 네. 네.”

정우는 처음 받아보는 관심에 얼떨결에 그렇다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 손기술은 젊다고 좋은 것은 아닌디…….”

“네?”

“아녀 아녀. 그냥 혼잣말.”

정우를 붙잡고 한 말이었지만, 정우에게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듯 손사래를 친 환자는 다시 대기 의자로 돌아갔다.

“김중지 님, 진료실로 들어가실 게요.”

“예에. 예. 슨생님, 담에 봬유.”

조금 전까지 정우에게 말을 걸었던 환자는 다가와 인사를 하고는 재마의 진료실로 쏙 하고 들어갔다.

밖으로 나온 정우를 본 정 실장은 그제야 그에게 다가왔다.

“이 선생님, 안에서 기다리시기 조금 힘드시죠?”

“네. 보통 일이 아니네요.”

정 실장은 대형 한방병원에서 근무하다 동네한의원으로 옮긴 정우가 적응을 하는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한다는 듯, 웃으며 미소를 지었다.

“오전에는 기존에 원장님 찾아서 오시는 환자분들이 많아서 조금 힘들었지만, 오후에는 신규 환자들도 오시니까 그럴 경우에 이 선생님께서 진료하실 수 있도록 해볼게요.”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적응 기간이 조금 필요하실 거예요. 대형 한방병원하고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죠?”

“그렇긴 하네요.”

정우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정 실장이 콕 짚어 이야기하자, 정우는 그렇다는 듯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게 더 나을지 모르겠지만, 이 원장님이 처음 오셨을 때는 한의원이 텅 비어 있었어요. 정말 파리 날린다 할 정도로.”

정 실장은 정우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이 사실은 재마에게는 비밀이라는 듯.

“적응하시고 환자분들도 선생님에 대해 알아가면서 상황이 나아질 거예요. 저희 환자분들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죠.”

정 실장이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자 정우는 얼떨결에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정 실장의 말처럼 가득 찬 명의 한의원의 대기 환자 중, 자신을 아무도 찾지 않아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 텅 빈 한의원에서 환자를 기다리는 것보다 나은 것일까 정우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둘 중 어떤 상황이 나은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파서 한의원을 찾은 환자들을 보니 더욱 진료가 하고 싶어 몸이 근질대는 것 같았다.

석 달 가까이 두문불출하며 새로운 한의원, 환자도 찾지 않고 지냈던 시간을 어찌 보냈나 의아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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