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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읽는 한의사-73화 (73/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73화

국장 주제 회의를 들어갔던 성은은 재마에게 큰소리치고 회의에 들어갔지만, 정작 그녀에게 발언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럴 거면 회의에 참석 시키지나 말 것이지.’

아마 국장도 성은이 함께하는 회의를 진행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것이었다.

성은은 폭탄 중에서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다. 기자로서는 괜찮은 자질이었지만 작은 협회 신문사라도 팀원들과 한 팀이 되어 꾸려가는 국장에게는 부담 그 자체였다.

왜 이번 칼럼을 이재마 원장이 맡아야 하는지 어필하기 위해 말 한마디 하려고 눈치를 보던 성은은 일부러 자신에게 발언의 기회도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입고 있던 재킷을 훌훌 벗어 소매까지 걷어붙였다.

시한폭탄을 들고 있는 마음이니 속에서부터 열이 뻗치는 것은 당연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성은이 달려들 것을 예상한 국장은 기자들의 인사에도 대충 인사를 받고는 발걸음을 서둘러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그렇다고 놓칠 성은이 아니었다.

“국장님!”

성은이 국장의 발을 붙잡기 위해 소리를 빽 하고 질렀다.

언젠가는 부딪혀야 하는 상황. 국장은 한숨을 푹 쉬고는 뒤를 돌아 성은을 바라봤다.

“위에서도 결정했으니 그런 줄 알고 있어.”

이미 결정이 되었으니 더 이상 말을 붙이지 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설 성은이 아니었다.

“국장님, 국장님이 먼저 이재마 원장님한테 칼럼 제안해 보라고 하셨잖아요. 안 한다고 해도 어떻게 해서든 설득해 보라고. 순항하고 있는 젊은 한의사 빨 좀 받아 다시 한번 전성기 맞아 보자고 하실 때는 어쩌고.”

성은은 국장이 자신에게 이야기했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전달했다.

성은의 목소리는 복도를 쩌렁쩌렁 울려 회의가 끝나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는 기자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야, 그거는 위에서는 모를 때 일이지. 그리고 김 기자도 대충 눈치챈 것 아니야?”

국장은 성은의 목소리를 낮추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낮춰 말을 했다.

이 정도면 성은이 눈치채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 국장은 이미 다 알고 있지 않냐는 듯 물었다.

그 물음에 성은은 더 국장을 물고 늘어졌다.

국장의 눈치에 아랑곳할 그녀가 아니었다.

“눈치채서 더 억울한 거예요. 왜 그분 한마디면 벌벌 기는 거예요? 협회에서.”

이미 누군가의 압력이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다른 기자들이 지나다니는 복도에서 언급을 하기에는 부담스러운지, 큰소리를 내던 성은도 그분이라고 칭할 수밖에 없었다.

“왜기는 우리 협회에 그만한 영향력 있는 사람 있어? 아직까지는 이재마 원장이 너튜브에서 조금 반짝 스타는 될지는 몰라도 진짜 영향력은 없잖아.”

“국장님, 저는 이재마 원장님이 너튜브 스타라서 추천한 게 아니에요. 아시잖아요. 그분이 개인 한의원 이외에도 어떤 일 하시는지.”

“그러니까 이재마 원장도 그렇게 차근차근 쌓다 보면 언제인가 협회에서 영향력 있는 한의사가 되겠지. 그때 가서 이야기하자고.”

국장은 더 이상 자신은 해줄 만한 이야기가 없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성은을 피해 움직였다.

“국장님!”

“다음 타자 결정되면 연락처 줄 테니까 미팅이나 다녀오라고. 싫으면 칼럼 내려놓든가, 그 자리 탐내는 사람은 많아. 알지?”

가볍게 이야기하는 듯했지만, 성은에게 칼럼 담당업무를 내려놓으라는 최후의 압박을 한 국장은 이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칼럼 업무를 내려놓는다고 한의 신문에서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지금 이 상태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럼 재마의 칼럼은 영영 한의 신문에 실리지 않을 것이었다.

성은은 할 만큼 했다는 듯 떠난 국장을 바라보며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 * *

소문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금세 잊힌다고 누군가 말했던가.

너튜브와 트위터를 떠들썩하게 하고 뉴스까지 탔던 너튜버 한의사와 환자 가족과의 문제는 한 달도 되지 않아 잠잠해졌다.

한참 해인동이 시끄러울 정도로 환자보다 기자들이 더 명의 한의원을 찾았지만, 이제는 해인동을 찾아오는 기자도 없었다.

오히려 텅 빈 것 같은 해인동 골목이 휑하게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여전히 명의 한의원 단골 환자들은 재마의 마음을 걱정했다.

“아휴. 원장님 그동안 마음고생 많이 하셨쥬. 이거 잡숩고 힘 내세유. 이거 우리 고향에서 올라온 뱀술인데, 이게 그렇게 남자한테 좋댜. 우리 동생이 직접 담궜다고 하니께…….”

“어르신 괜찮습니다. 정말이에요. 마음만 받을게요.”

팔십의 나이에 양손으로 자신의 키 반만 한 술병을 떨어뜨릴까 봐 이고 지고 해인동 골목을 걸어온 말복의 성의를 생각하면 받을 만도 하지만, 재마는 한사코 거절했다.

난감한 상황을 진료실로 말복과 같이 들어온 정 실장에게 눈빛으로 전한 재마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얼른 거들어 달라는 뜻이었다.

“어르신, 이러면 진짜 안 돼요. 원장님이 여기 오시는 분들이 성의껏 가지고 오는 거 다 받아봐요. 아마 한의원 진료는 못 하고 뱀술, 지네술, 인삼주 전시장 될걸요?”

“잉?”

“원장님은 환자분들 성의는 마음으로만 받으시고, 진료에 집중하셔야죠. 그래야 우리 말복 어르신 백 살, 아니, 백오십 살까지 무릎도 고쳐드리고 허리도 고쳐드리고 안 힘들게 해드리죠. 안 그래요?”

“그랴? 백 오십까지?”

“그럼요.”

정 실장의 설득이 먹히는지, 말복은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뱀술을 바라봤다.

“그럼 이거는 우짠디야. 내가 동생한테 어렵게 받아왔는디.”

“이번 명절에 아들 며느리, 딸들 사위들 오면 생색내면서 여시면 되지.”

정 실장은 팔꿈치로 가볍게 말복의 옆구리를 쿡 하고 찔렀다.

“그러고 생색 좀 내?”

“네. 그러세요. 좀 말고 많이.”

정 실장은 이제 다 되었다는 듯, 재마를 바라보며 윙크를 했다.

재마는 말복에게 들리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르신 침도 다 맞고 물리치료도 다 끝내셨으니 이제 댁으로 가실까요?”

“아유. 그래도 아쉽네잉. 이거 진짜 원장님 드리려고 내가 챙겨온 건데.”

“저는 괜찮습니다. 어르신 마음만으로 정말 든든해졌어요.”

재마는 정 실장을 거들며 말복을 배웅하기 위해 함께 진료실을 나섰다.

말복이 마음이 바뀌기 전에 그녀를 귀가시켜야 했다.

쩝.

말복이 뒤를 돌아 재마에게 다시 한번 깊숙이 인사를 하는 동안 재마 귀에 들릴 정도로 아쉬운 입맛을 다시는 강산의 입소리가 들렸다.

“어르신 들어가세요. 모레 진료시간 늦지 않게 오시고요.”

“네네. 선생님들도 들어가셔유.”

말복은 뱀술을 이고 지고 해인동 골목을 다시 되돌아가며 재마와 정 실장에게 얼른 들어가라는 듯 뒤돌아 다시 인사를 했다.

“이 원장. 아쉽지 않아? 뱀술이 그렇게 몸에 좋다는데.”

“됐거든. 그리고 왜 네가 아쉬운 입맛을 다시냐.”

“아니, 뭐. 네가 선물 받으면 국물이라도 떨어질까 하는 괜한 김칫국을 마셔서 그런다. 왜.”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재마는 입맛 다시지 말라는 듯, 엄포를 놓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이 원장, 한의 신문에서 칼럼 데뷔는 못 했지만 그래도 우리 진료 봉사는 좀 확장해야 하지 않겠어?”

“그렇지. 지난주에 꿈속 요양원은 잘 다녀왔지?”

정신없는 재마를 대신해서 격주로 꿈속 요양원을 대신해서 다녀오는 강산은 재마에게 진료 봉사를 다시 상기 시켰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번에도 강산이 이야기했던 봉사팀을 확장하자는 이야기는 일이 해결된 이후로 미뤘던 이야기였다.

“잊힌 것 같아도 요즘도 연락 오는 요양원이 있다고.”

좋은 소식은 아니었지만 전국적으로 송출되는 시사 프로그램에 명의 한의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간 이후로 생각지도 못했던 일거리가 강산에게 떨어졌다.

‘환자를 읽는 한의사’ 비지니스 메일 쪽으로 하루에도 수십 통의 진료 봉사를 와주십사 하는 간곡한 메일들이었다.

그 메일은 시골 요양원뿐 아니라,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조용하고 작은 마을의 마을 회관들도 있었다.

연락을 받은 곳 모두 당장 찾아가면 좋았겠지만, 기자들이 해인동을 찾아오고 ‘환자를 읽는 한의사’ 채널의 일도 정리가 되지 않았을 상황에는 봉사활동을 늘릴 수 없었다.

이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으니 연락이 왔던 곳 중에 추려서 봉사를 시작해야 하지 않겠냐는 강산의 제안이었다.

“음…… 그렇지. 하나같이 어렵게 연락 주신 메일일 텐데 못 본 체를 할 수는 없지.”

“그래. 그리고 우리 동기들 말고 선배들도 다음에 진료 봉사 자리 있으면 연락 달라고들 했으니까 한의사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고.”

“그래?”

재마는 자신이 진료 봉사를 시작해 다른 한의사들에게 진료 봉사를 제안하지 않아도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해 주는 것만으로도 좋은 발전을 시킨 것 같은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강산의 말대로 조만간 다음 봉사 장소를 결정해 봉사팀을 꾸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우후죽순 진료 봉사 장소를 여기저기 늘리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아. 지금이야 동기들이랑 선배들이 관심을 받고 있지만 그 관심도 언젠가는 뜸해질 수도 있고.”

“그렇긴 하겠네.”

재마의 이야기에 강산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격주는 아니더라도 지속적인 봉사가 진행돼야지, 일회성인 봉사를 나갈 수는 없으니까.”

어딘가는 일회성으로 끝나고, 어딘가는 정기적인 봉사를 나갈 수도 없었다.

이왕이면 선택된 봉사지는 다른 봉사지와 공평하게 혜택을 받아야 했다.

“이거 결정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강산은 이 또한 쉽지 않겠다는 듯 턱을 매만졌다.

“그건 우리 강 실장님이 준비 좀 해주시고…….”

“네에. 네에. 원장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준비해야 하는 거겠죠?”

강산은 좀처럼 강 실장이라 부르지 않는 재마가 실장이라는 직책까지 부여하니 고개를 조아렸다.

“그나저나 너 면허 시험은 다가오는데 준비는 정말 안 할 거야?”

“안 한다니까 그러네. 저는 ‘환자를 읽는 한의사’ 채널 일만 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요. 원장님.”

강산은 재마에게 잔소리를 더 듣기 전에 진료실을 빠져나갈 채비를 했다.

그렇지 않아도 1년 가까이 연락조차 하지 않았던 본가에서 슬슬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고는 했다.

일부러 전화를 피한 것은 아니었는데 강산도 ‘환자를 읽는 한의사’ 채널에서 맡고 있는 일이 정신 없다 보니 매번 전화를 받지 못했다.

분명 아버지는 아닐 것이고 아버지의 한의원에서 데스크와 처치실 업무까지 모두 보고 있는 어머니의 전화일 것이 분명했다.

부재중 한 통 찍혀 있고, 더 이상 연달아 전화하지 못하는 것도 업무에 치여 그러신 것일 테지.

강산은 생각지도 않던 생각을 재마 덕에 한 탓에 갑자기 덜컥 찹찹한 심경이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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