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67화
-오지 마라. 오지 마. 해줄 말 없으니까…….
정우는 재마를 의식하지 않는 척 옆자리에 앉은 동기와 술잔을 기울였지만, 한발자국 한발자국 다가오는 재마를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
“정우, 오래간만이다.”
“어, 그래. 재마. 오래간만이네. 이야. 미안하다야.”
“미안?”
정우는 재마를 보자마자 미안하다는 사과를 먼저 했다.
“지난번에 네가 동기들이랑 봉사 가자고 했을 때는 멀리 있다는 핑계로 못 가놓고…….”
정우는 재마와 강산이 꿈속 요양원 봉사를 제안했는데 거절했던 것을 아직까지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 때문에 나를 피했다고?’
재마는 자신이 정우를 향해 걸어올 때부터 재마를 피해 다른 동기와 술잔을 기울이며 의식하던 정우가 고작 예전 일로 마음을 쓰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뭘 그런 걸 맘속에 담아두고 있냐? 바쁘면 바빠서 못 가는 거지. 신경 쓸 필요 없어.”
“뭐야. 재마가 정우한테 같이 봉사하자고 했던 거야? 나한테는 연락도 없고.”
정우 옆에 있는 동기가 자신에게는 봉사 제안을 하지 않았던 것을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요즘 주가를 올리고 있는 ‘환자를 읽는 한의사’ 채널에 동기 찬스로 얼굴이라도 들이밀 수만 있다면 기회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정우 이 녀석이 사람 볼 줄을 모르네. 재마 동아줄을 잡았어야지. 최중기 썩은 동아줄을 잡았냐.”
동기 한 명이 혀끝을 끌끌 내차며 자리에 없는 최중기를 썩은 동아줄로 표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정한 한방병원에서 요양원 봉사 너튜브를 찍은 것이 동기들 사이에서는 재마를 의식한 것이라며 뒷말이 돌았다.
“앞으로 좋은 봉사 있으면 너희끼리 하지 말고 단톡방에 좀 올려라. 너희 소식도 좀 듣게. 우리도 황금 동아줄 잡고 너튜브 데뷔 좀 해보자. 하하.”
“그래. 그럴게.”
재마는 아쉬움을 토로하며 기회를 달라며 아부를 하는 동기와 잔을 부딪쳤다.
그사이에도 재마의 눈치를 보고 있는 정우.
아무래도 봉사 제안을 거절했던 것 하나로 이 자리를 불편해하는 것 같지 않았다.
“요즘은 부산에서 어때?”
“부산? 어. 뭐. 그냥. 뭐 그렇지 대형 한방병원 분원이…… 그래도 지역에서는 가장 큰 병원이니 환자는 항상 많고…….”
-이 녀석 아직 모르나 본데?
정우는 자신의 술잔을 채워주는 재마의 잔을 받아들며 자신은 별일 없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재마의 물음에 대답하면서도 그의 속마음은 불안함을 숨기고 있었다.
-하긴 알아도 문제지.
“부산에서 버틸 만은 한 거야?”
“어?”
“너 서울 토박이라고 부산에서 지내는 거 힘들어했잖아. 그렇다고 어렵게 들어간 정한 한방병원 그만둘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
재마는 자신의 속마음이 훤히 보이는 줄 모르고 있는 정우에게 좀 더 자세히 물었다.
어떻게 해서든 서울로 올라오고 싶어 했던 정우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 어…….”
“야, 박정우. 너 병원 그만뒀다며.”
그때, 강산과 함께 동기들 사이에서 분위기를 띄우던 정수가 나타났다.
학과 시절에는 둘이 그렇게 붙어 다녔다. 정우가 부산으로 발령받아 내려간 이후로도 주말마다 만나는 것 같던, 정우와 정수도 오래간만에 만난 모양이었다.
“요새 연락도 통 없고 부산에서 안 올라오더니 갑자기 병원은 왜 그만둬? 그리고 올라왔으면 형님한테 연락을 해야지. 너 변했다?”
조금 전까지 재마에게 별다른 근황이 없다고 말을 하던 정우는 당황해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재마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대답을 선뜻 하지 못했다.
“뭐, 그렇게 됐다. 너네도 알잖냐. 내가 부산으로 내려가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래도 그렇지. 너희 아버지가 정한 들어갔다고, 몇 년만 버티고 나오랬다며 한의원 차려주신다고. 벌써 마음이 바뀌신 거야? 차려주신대?”
부산에 내려가기 싫다는 정우를 어떻게 해서든 용의 꼬리라도 되라는 뜻으로 부산을 떠민 것은 그의 아버지였다.
용의 꼬리라도 되어 경력만 쌓으면 청담동에 번듯한 한의원을 차려줄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산다고 했던 정우의 아버지.
정수는 정우의 어깨를 휘감으며 혹시 좋은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물었다.
“아냐. 그런 건 아니고.”
“그게 아니면.”
정수는 이유도 없이 한방병원을 박차고 나왔을 리 없다는 듯 정우에게 재차 물었다.
“정수야. 정우가 불편한가 보다. 그만 물어. 이야기할 만했으면 벌써 너한테 말했겠지.”
재마는 대답을 선뜻 못하는 정우의 마음을 읽고, 정수를 말렸다.
“우리 사이에 불편은 무슨. 짜식.”
정수는 속마음을 말하지 않는 정우의 행동에 마음이 상했는지, 투덜거렸다.
“이야기할 때 되면 하겠지.”
재마는 투덜거리는 정수에게도 맥주 한 잔을 따랐다.
“그나저나 재마야. 네 덕에 나도 요즘 몸값 좀 오르고 있다.”
“몸값?”
“이번에 요양원 다녀온 영상을 많이 보기는 많이 보나 봐. 보통 사람들이 명의 한의원 원장인 너만 알아보다가 이제 나도 솔솔 알아보는 눈치야. 환자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았는지. 우리 병원에서 나 찾는 환자들이 더러 늘었어.”
“정말?”
한의사가 3명이 있는 한의원에서 진료를 보고 있는 정수는 어깨에 뽕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다른 원장님들이 도대체 이재마 원장은 어떻게 알아서 봉사를 다니는 거냐면서 묻더라니까. 동기들끼리만 다니지 말고 봉사 모임을 만들어서 다니는 건 어떠냐고도 하고. 자기들도 참여하고 싶다나.”
어떻게든 너튜브 데뷔 아닌 데뷔를 하고 싶은 마음에 정수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좋네. 아예 모임을 만들자. 다른 동기들도 참여하고 싶으면 참여하게.”
“어허. 이 녀석들 우리 원장님한테 다리 하나씩 걸칠 셈이야?”
정수의 말을 들은 동기들이 너도나도 모임에 가입하겠다는 뜻을 내비치자, 강산이 놓칠세라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우리 원장님 바쁘시니까, 진료 봉사에 관심 있는 사람은 봉사 모임을 전적으로 맡고 있는 나한테 문의하도록.”
강산은 목소리를 높여, 문의는 재마에게 하지 말고 자신에게 하라며 큰소리쳤다.
“다리 걸치고 있는 놈은 저 녀석 아니야?”
“그러니까 면허 시험 다가오는데 쫄리지도 않나.”
“강산 너 면허 시험은 안 보고 편집자로 취업한 거냐?”
동기들은 강산을 바라보며 낄낄거리며 농담을 던졌다.
동기들의 이목이 강산에게 쏠린 틈을 타, 정우는 슬쩍 동기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정우를 눈여겨보고 있던 재마 또한 이를 놓치지 않고 그의 뒤를 따랐다.
펍이 있는 건물을 빠져나간 그는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가 안주머니에 있던 담배를 꺼내 물었다.
“요즘 무슨 일 있냐. 진짜. 안 피우던 담배를 피우고.”
다른 동기들이 면허 시험을 핑계로 담배를 필 때도, 담배를 입에도 대지 않던 정우가 홀로 빠져나와 담배를 피우자 재마는 그의 곁으로 가서 담배를 뺏었다.
“특히 우리들은 환자들이랑 가까이 있는 직업인데 담배에 빠지면 되냐.”
“재마야.”
“무슨 일인데? 너 무슨 일 있는 거 맞지?”
재마는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정우의 행동에 확실히 알아야겠다는 듯 채근했다.
한참을 뜸을 들이던 정우는 어렵사리 입을 떼어냈다.
“재마야. 나 못해 먹겠더라.”
속마음에 꽁꽁 숨기고 있던 이야기를 털어놓듯, 정우는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를 꺼냈다.
“중기 그 새끼랑 박연아 머릿속에는 오로지 너 깔아뭉갤 생각밖에 없어.”
“뭐?”
“아니, 봉사를 갔으면 진료 봉사를 해야지. 카메라 돌아갈 때만 하는 척만 하고. 그래. 그것도 그럴 수 있다 치자. 적어도 대학 동기자, 한방병원 의료진인 날 불러서는 너희 너튜브 돌아가는 상황 스파이짓을 해서라도 알아 오라는 둥. 꼬투리 잡을 것 뭐 없겠냐는 둥, 이상한 짓거리만 하고 있더라.”
재마는 더러운 꼴을 더 이상 못 보겠어서 한방병원을 그만뒀다는 정우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그렇다고 어렵게 들어간 직장을 그만둬?”
박연아와 최중기의 행동에 어이는 없었지만, 정우에게는 한의사가 된 이후 첫 직장을 그만뒀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거기에서는 내가 한의사도 아니었어. 그냥 그 새끼 밑에 있는 찌라시나 물고 올 쥐새끼 보듯 했지.”
정우는 정한 한방병원에서 갑작스럽게 요양원 봉사 기획을 할 때부터 자신을 불러들인 것까지 자신을 이용할 계획이었다 한탄했다.
“내가 최중기 그 녀석 진상 짓거리하는 걸 다 까발리고 퇴사하려다 참았다. 진짜.”
“잘 참았다. 거기서 네가 무슨 짓을 했든 좋은 꼴은 못 봤을 거다.”
재마는 정우의 어깨를 토닥였다.
“재마 너, 조심해라. 물론 너는 네 할 일 잘하고 있지만 없는 일도 지어낼 거야.”
“그래. 미리 말해줘서 고맙다.”
당장 진료를 보던 병원을 뛰쳐나온 정우를 위로했지만, 없는 짓도 지어낼 최중기와 박연아의 이야기를 들은 재마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 * *
“김 대리. 영상 편집은 다 됐어?”
박정상과 영상 형제를 만나고 돌아온 연아는 3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오늘 찍은 영상을 편집을 마쳤는지 채근했다.
“네. 편집은 했는데…….”
김 대리는 편집한 영상이 팀장의 마음에 들지 몰라 자신 없는 목소리로 usb를 건넸다.
“좋아. 한번 보고 이야기하자고.”
연아는 바로 받아 들고 자신의 모니터에 연결했다.
영상에는 모자이크와 음성변조까지 된 상태의 박정상과 영상 형제의 영상이 흘러나왔다.
“이거, 모자이크도 빼고 음성 변조도 좀 빼면 안 돼?”
“그건 아무래도 이분들이랑 상의가 되지 않은 거라…….”
“이렇게 나와서 말하면 그 할머니 아들인 거 사람들이 뻔히 아는데 얼굴 가리고 음성 변조를 하면 뭐해?”
“이분들도 얼굴이 알려지는 건 원하지는 않아서.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진짜, 까다롭네. 알았어.”
연아는 한 시간가량 했던 인터뷰 장면을 김대리가 적절하게 15분에 맞춰 편집한 영상을 쭉 보았다.
“김 대리. 근데 이것밖에 안 돼? 막 자극적으로 이 사람이 자기네 엄마 팔아서 돈은 돈대로 이재마 혼자 챙겨 먹고, 자신들한테는 한 푼도 안 준다고 목소리 높였던 거 있잖아. 욕도 막 하고.”
“그런 장면은 너무 자극적이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자극적이어야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갖지. 지금 이게 이재마 쪽 편들어주려고 만드는 영상이야?”
“그건 그렇지만.”
“최대한 자극적인 장면만 편집해서 다시 보고해. 이걸로는 안 돼. 이럴 거면 내가 굳이 시간 내서 거기까지 직접 갔겠어?”
연아는 김 대리가 편집을 한 영상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usb를 꺼내 김 대리 쪽으로 툭 하고 던졌다.
“누가 봐도 이재마가 혼자 다 해 처먹을 생각으로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접근한 것처럼 편집해. 알았지?”
“네?”
“악마의 편집. 몰라?”
연아는 답답하다는 듯, 김 대리를 아래위로 훑으며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