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64화
해인동 골목 버스 정거장에서 하차한 효주.
아침부터 달갑지 않은 휴대전화 벨소리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정한 한방병원 박연아 팀장의 전화는 그야말로 대중이 없었다.
-그러니까 거기 가서 하는 게 뭐야?
다짜고짜 하는 일이 뭐냐고 묻는 연아의 목소리가 효주의 심장을 쿵 하고 내려놓게 했다.
그야말로 전화를 건 이유 따위도 명백하지 않았다.
“저야, 물리치료사로 명의 한의원에 입사 했으니까…….”
-진짜 그 이유로 명의 한의원으로 이직했다고 생각해? 다시 돌아올 생각은 안 하는 거야?
또 시작된 협박. 이제는 정한 한방병원으로 돌아갈 이유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효주였다.
돌아가도 이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 뻔했다.
아침부터 또 무슨 이유로 효주에게 전화를 걸어 히스테리를 부리는지 알 수 없는 연아의 목소리 때문에 명의 한의원을 눈앞에 두고도 출근을 하지 못하는 효주였다.
“팀장님, 제가 이제 들어가 봐야 준비를 할 수 있거든요.”
-지금 일이 문제야? 이재마에게 특별한 움직임 있으면 다 보고해.
“제가 원장님 일거수일투족 감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제가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요.”
-정한 한방병원으로 돌아올 생각 없어? 앞날은 생각 안 해?
“아뇨. 제가 명의 한의원을 그만둬도 정한 한방병원으로 돌아갈 일은 없을 것 같네요. 박연아 팀장님.”
더 이상 박연아의 전화를 받아줄 수 없다고 생각한 효주는 제 할 말을 하고 툭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은 것이, 전화뿐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돌아갈 곳을 제 손으로 끊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끊고 나니 동기들과 꽤 즐겁게 일을 했던 정한 한방병원에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물밀듯 밀려왔지만, 후회는 할 수 없었다.
“이제 어쩔 도리가 없다. 명의 한의원에서 최선을 다해야지.”
효주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기 위해 주먹을 불끈 쥐고는 혼잣말을 했다.
제 선택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이 선생님, 무슨 일 있으세요?”
“네? 아, 사장님 안녕하세요.”
명의 한의원을 등지고 전화를 하던 효주는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고스란히 듣고 있던 윤 사장은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떤 큰일을 결정한 듯한 효주의 심각한 얼굴을 바라봤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힘내세요. 아침부터 안 좋은 소식은 금방 잊는 게 제일입니다.”
평소와 달리 미간을 잔뜩 찌푸렸던 효주의 얼굴이 조금 전 받았던 전화가 좋지 못한 소식을 전달했다 추측하는 그였다.
윤 사장은 크고 탐스러운 복숭아를 세 개 담아 효주에게 건넸다.
자신이 판매하는 복숭아지만, 이 복숭아로 효주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렸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아니에요. 사장님, 이거 돈 낼게요. 얼마에요? 저 이런 거 받으면 원장님한테 혼날지도 몰라요.”
효주는 윤 사장이 건넨 검은 봉지를 얼떨결에 받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무리 한의원을 마주 보고 있어 매일 얼굴을 보는 윤 사장이지만, 복숭아를 판매하는 그에게 공짜로 받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원장인 이재마를 핑계를 대어보았지만, 윤 사장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일은 없을 거란 뜻이었다.
“아이고. 선생님, 이건 지난번에 물리치료를 진짜 시원~하게 해주셔서 제 성의예요. 받아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 손이 부끄러워요.”
“그건 제 일인데요…….”
효주는 제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성의 표현이라며 한사코 복숭아를 받아가라는 윤 사장의 말에 난감했다.
“제 일이어도 힘든 건 힘든 거죠. 환자가 한둘 있는 것도 아니고 바쁘고 힘드실 텐데 여기저기 불편한데 물어봐 주시면서 치료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건 드시고 힘내셔서 다른 환자들도 잘 봐달라는 뇌물이니까. 꼭 받으셔야 합니다!”
윤 사장은 돈을 내겠다는 효주에게 한사코 거절하며 복숭아를 건넸다.
“그럼 선생님들과 잘 나눠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네. 그 마음이면 됩니다.”
윤 사장은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효주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다른 과일들을 내오기 위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박연아와 통화를 하며 인생의 최악을 느꼈지만, 윤 사장을 통해 일의 보람을 느낀 효주였다.
나쁜 마음은 잊고 감사한 마음만 가지고 명의 한의원으로 들어서야겠다는 마음을 다졌다.
* * *
툭 하고 끊긴 전화. 휴대 전화를 어이가 없다는 듯 연아는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지가 어디서 감히. 어차피 정한 한방병원으로 기어들어 오려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 거면서.”
제 할 말만 하고 전화기를 툭 하고 끊은 효주의 행동에 기가 찬 연아는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그냥 전화를 끊게 둔 것이 화가 나는지, 분을 참지 못하고 휴대 전화를 던져 버린 연아는 잠시 후 홍보팀 직원이 들어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괜히 책상 위에 있는 펜 꽂이와 종이에 화풀이할 뿐이었다.
“으으으으으!!”
분을 못 이겨 성질을 내며 책상을 두드리고 있을 때, 바닥에 내던져진 휴대전화를 주워 연아의 책상에 조심스레 내려놓는 김 대리였다.
“팀장님?”
“뭐야?”
“아…… 저기…… 팀장님께서…….”
히스테리를 부리는 연아의 모습을 그대로 본 김 대리는 자신이 이곳에 왜 들어왔는지도 잊었는지 말을 더듬을 뿐이었다.
“내가 뭐. 똑바로 말해.”
“저기…… 그…… ‘환자를 읽는 한의사’ 채널 댓글을 잘 보고 반응 보라고 하셔서 제가 어제 확인을 좀 해봤는데요.”
“근데.”
“종종 악플이 달리기는 한 것 같습니다. 드물지만.”
“악플이야. 우리 영상에도 달리잖아. 시답잖은 거로 꼬투리 잡아서 어떻게든 여론몰이 하려는.”
“네. 그렇긴 하죠. 근데 그중에 특이한 댓글이 몇 가지 있는데…….”
김 대리는 자신이 캡쳐한 댓글을 연아에게 보였다.
어제 밤새 눈이 빠지도록 수없이 달린 댓글들 중 눈에 띄는 댓글들만 연아가 보기 쉽게 편집을 한 김 대리였다.
-이렇게 불쌍한 노인네들 몇 번 비추고 슬슬 본색을 드러내겠지. 후원금이다 뭐다 하며 계좌 열고. 나만 불편해?
-이 할머니들 보호자들에게 허락은 받고 올리는 거임?
-이 할머니들 출연료는 얼마나 받았으려나.
모두 돈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편집된 악플들을 모아보니, 아무래도 민감한 돈 문제를 건드리면 제아무리 이재마라도 쉽게 넘어가지 못할 것 같았다.
댓글을 본 연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웠다.
김 대리가 왜 이 캡쳐본을 준비했는지 더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잘 알겠다는 듯.
“간만에 일 좀 했네. 김 대리?”
“가…… 감사합니다.”
칭찬을 받은 적이 거의 없는 김 대리는 얼떨결에 감사하다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김 대리. 이 할머니 보호자 연락처 알아 와봐.”
“네? 저희 쪽에서요?”
“그럼 우리가 해야지. 악플 여론이 나쁘니 이 정도는 잡고 가세요, 하고 이재마한테 전화라도 해줄까? 접촉할 수 있는 방법 뭐든 동원해서 접촉해 보라고. 자식은 몇인지. 또 그동안 요양원비는 누가 냈는지 등등.”
“아, 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알았어?”
“네.”
항상 자신은 사무실에 있거나 백화점을 들락거리기만 하면서 아래 직원에게 빨리 빨리만 외치는 연아는 오늘도 손짓하며 빨리 서두르라는 지시를 했다.
보호자의 정보를 어디서부터 알아내야 할지 막막한 김 대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이럴 거면 한방병원 홍보팀에 들어와 있겠냐고…… 나 참.”
그저 대형 한방병원 홍보팀에서 홍보를 위해 일을 할 줄 알았던 김 대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또 다른 일에 회의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 * *
“악플이 많이 달리는 건,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되었다는 뜻이니까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정신 건강에 좋아요.”
“그렇긴 하지만 그 악플로 여론몰이가 형성되는 게 문제예요.”
오래간만에 명의 한의원으로 강산과 재마에게 조언을 위해 방문한 유경은 조금 전 정 실장이 사다 준 시원한 아이스 커피를 쭉 들이켰다.
“솔직히 저도 악플 처음 받았을 때나, 지금이나 볼 때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심장이 두근거려요. 이건 극복하려야 극복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강산과 재마보다 한참 어린 나이인 유경은 자신도 상처를 많이 받고 있다는 말에 두 사람은 안타까운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그래도 외모 평가나 인신공격적인 댓글은 아니니까 이 악플이 왜 달렸나부터 생각해 보죠. 그러다 보면 오히려 채널의 방향성을 더 잘 잡을 수도 있어요. 악플이긴 하지만, 어찌 보면 구독자의 피드백이기도 하니까요.”
처음으로 쏟아지는 악플을 받고 어찌할 바를 몰랐던 강산과 재마는 유경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대부분의 악플은 이번 영상으로 경제적 이득으로 연결할 생각이 아니냐는 악플들인데…… 후원금 모집하실 생각이세요?”
“아뇨. 그런 마음은 처음부터 지금까지도, 추후에도 없을 겁니다.”
“음…….”
“다만 이 보호자의 뜻으로 제작된 영상으로 생긴 금전적인 부분은 분명히 생길 테니 이 부분은 어르신의 병원비 결제를 대신에 할까 합니다.”
“좋네요. 후원금은 처음처럼 계속 받을 생각은 없고, 원장님이 받으신 수익금을 기부한다.”
유경은 재마의 뜻에 찬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수익금을 전달한 내용을 투명하게 너튜브 채널에 공개하는 건 어떠세요?”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그냥 조용하게 병원에서 전달해 드리려고 했는데.”
“사실 병을 발견하는 과정을 공개했고, 그 과정으로 채널이 상승세를 탄 이상 조용히 전달해 드린다는 건 의혹만 키우죠.”
유경의 날카로운 지적에 재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부분은 다시 또 보호자분이랑 상의를 해봐야겠네요.”
채널을 운영하는 것은 재마였지만 모든 선택은 철산 부부에게 건네는 재마였다.
“원장님, 그나저나 대단하세요. 사실 이렇게 채널이 한 번에 떡상하면 욕심 날만도 한데…….”
유정은 이번 기회로 후원금을 받아 보호자에게 전달하면 잡음은 있을 수 있겠지만 어쩌면 더 큰 기대효과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후원금을 전달하는 역할만 하고, 영상 수익금은 재마가 챙겨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후원금은 모금하지 않고 제 몫을 떼어 준다는 재마의 결정이 대단해 보였다.
“채널을 만든 초심을 잊으면 안 되니까요.”
“초심이 뭐였는 데요?”
“내가 유명해지는 것보다, 한의학을 알리고 환자들이 병을 더 쉽게 발견하게 하자. 아픈 환자들이 병원을 찾아올 수 있게 만들자. 뭐 그런 취지였습니다. 돈 욕심이 아니었고요.”
“오, 그럼 그 초심은 이뤄지고 있나요?”
유경의 질문에 재마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아직은 비록 너튜브를 하는 신기한 한의사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찾아오는 환자분들이 많지만, 그렇게라도 한의원을 찾아서 자신의 몸 상태를 자세히 알고 좋지 않은 부분을 알고 가게 되면 반 이상 이룬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