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63화
평창동 저택가.
이렇게 높은 담장 너머에 발을 디딘 적이 없던 중기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개를 들어도 끝이 보이지 않던 담장 너머에는 한옥 저택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큰 규모의 저택이 있었다.
그 규모에 압도된 자신과 달리 이런 저택가의 일원이라는 듯 약혼녀인 연아는 앞장서서 걸어갔다.
한옥의 내부는 외관과 달리 현대적인 인테리어였다.
더구나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클래식이 TV에서 보던 여느 재벌가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중기는 침을 꼴깍 삼킬 뿐이었다.
“어서 와. 식사 준비되어 있으니까 안쪽으로 오지.”
정한 한방병원 대표인 박상도가 직접 나와 중기와 연아를 반겼다.
중기는 그제야 자신이 정한 한방병원의 예비사위로서 제대로 대접을 받는다는 기분이 들었다.
눈이 휘둥그레져 어디에다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몰라 하는 자신과 달리 연아는 보란 듯이 콧대를 높이고 있었다.
“작은아버지,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감사는 무슨. 언제 한번 밥 한번 해야지 했는데 이제야 시간이 되었구나.”
정찬 테이블에 다다르자 상석에 상도가 앉았고, 그 옆에 있던 상도의 외동딸 연주는 중기에게 인사를 건넸다.
“형부. 반가워요.”
“아…… 안녕하세요.”
차분한 인상의 연주는 연아와 닮은 것 같으면서도 다른 이미지였다.
“연아 언니도 오래간만이야. 요즘 바쁘다며?”
“그래. 너도 어른 되어 봐. 사회생활이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아직 중학생밖에 되지 않은 연주에게 사회생활이 힘들다며 입술을 쭉 내민 연아는 자신의 자리에 털썩 앉았다.
홍보팀장 자리에 앉고 싶다고 해서 자리를 마련해 준 상도는 연아가 어떻게 일 처리를 하고 있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보고를 받고 있었다.
정한 한방병원 내에서 아무도 건드릴 사람이 없다는 듯, 직원들을 부리고 또 부리는 연아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았지만 상도는 잠자코 있었다.
음식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꺼내며 화기애애한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연주는 자신의 나이에 맞게 자신의 관심사를 섞어가며 이야기를 했고, 상도는 하나뿐인 딸에게 꽤 이야기를 잘 맞춰주는 아빠의 모습이었다.
박상도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보는 중기는 조금 놀랍다는 생각을 했다.
딸 앞에서는 한없이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을 한 상도였다.
“요즘 너튜브에서 유명한 한의사 있던 데, 아빠도 알아요?”
“한의사?”
연아는 고급스러운 음식이 차려져 있는 정찬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사촌 여동생의 말에 입에 집어넣었던 고기를 입 밖으로 뱉을 뻔했다.
더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 이야기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필이면 자신과 자신의 약혼자인 최중기 앞에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무슨 저의라도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보았지만, 이재마의 이야기를 꺼낸 사촌 동생은 중학생밖에 되지 않았다.
“환자를 눈만 보고도 병을 안대요.”
마치 대단한 능력이라도 있다는 걸 믿는 듯한 그저 중학생다운 이야기에 정한 한방병원 대표인 박상도는 피식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 이야기를 믿는 자신의 딸이 귀엽기라도 한 듯.
“처제. 환자 눈만 보고도 병을 다 안다고 이야기하는 의사는 돌팔이일 가능성이 100프로, 아니, 1,000프로일걸? 아직 처제 어려서 순진하구나.”
굳이 상도와 그의 딸인 연주의 말에 끼어들 필요가 없는 중기가 끼어들었다.
그의 한 마디에 진짜냐는 듯, 연주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봤다.
“진짜예요? 아빠?”
조금 전까지 딸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이야기를 듣던 상도는 자신 앞에 놓여 있는 스테이크를 칼질하며 무표정하게 들으라는 듯 이야기를 했다.
딸 앞에서 한없이 자상하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글쎄. 어느 정도 경험이 생기면 환자가 진료실 문으로 들어오는 순간 환자의 병을 예측하기도 한단다. 그게 환자를 많이 경험한 한의사의 능력이지.”
“정말요? 그럼 아빠는 문만 열고 들어와도 어디가 아파서 찾아온 환자인 줄 알아요?”
“하하. 아빠는 우리 연주 표정만 봐도 무슨 기분인 줄 아는데,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헤헤. 맞아요. 아빠!”
중기의 말에 울상이었던 연주는 아빠인 상도를 바라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괜히 끼어들었던 중기는 입을 꾹 다물었고,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연아는 괜히 자신 앞에 놓여 있는 와인 잔을 들어 단번에 들이켰다.
‘눈치가 없어도 저렇게 없으니…….’
연아는 눈치가 없는 중기를 한 번 노려보고는 다시 포크를 집어 들려는 찰나였다.
“그 이재마인가? 그 녀석을 내가 언제 봤었나 했더니 우리 병원에서 최종면접까지 봤던 한의대생이더구나.”
상도가 연아가 들으라는 듯 이야기를 했다.
연주에게 대하던 목소리와 다른 차가운 목소리였다.
“어머, 그래요? 전 몰랐네요.”
연아는 상도가 무슨 의도로 이 이야기를 자신에게 꺼냈는지 뻔했지만 모른 채 시치미를 뗐다.
연아의 옆에서 중기는 말없이 포크와 나이프질만 할 뿐이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란 걸 확실히 알고 있는 중기였다.
“정말요? 아빠? 그럼 우리 병원에 올 수도 있었던 선생님이네? 근데 왜 우리 병원에 안 있어요? 우리 병원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사인도 받고.”
또 눈치 없이 연주가 입을 열었다.
“사람은 다 자신이 있을 자리가 있단다. 그 이재마라는 선생도 우리 병원에 있었다면 지금은 평범한 초임 한의사였을지도 모르지.”
“그럼 우리 병원에 오지 않아서 그렇게 됐다는 거예요?”
정한 한방병원이 대한민국 최고인 줄 아는 연주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글쎄, 사람을 잘 만났을 수도 있고, 때를 잘 타고났을 수도 있고. 연주야, 사람에게는 기회라는 게 주어졌을 때 그 기회를 잘 이용해야 하는 거야. 어리석은 사람은 기회를 독으로도 만들기도 하니까.”
상도는 알 수 없는 말을 딸에게 했다.
연아와 중기는 마치 자신들에게 하는 말 같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 * *
“이게 다 오빠 때문이야. 알아?”
평창동 박상도의 마당을 빠져나와 집을 걸어 나오며 연아는 하이힐 굽이 부러질 정도로 발을 쿵쿵 굴렀다.
“이게 왜 나 때문이야. 눈치 없이 대표님 앞에서 이재마 이야기를 꺼낸 처제 문제지.”
“거기에 끼어들기는 왜 끼어들어? 그냥 잘난 모녀 이야기하게 두지.”
연아는 앞장서 가다가 뒤로 훽 돌아서 중기를 노려봤다.
“단번에 환자 병 파악도 못 하는 게 자랑이야? 지금 오빠는 그딴 능력 하나 없다고 자랑해?”
“뭐?”
중기는 어이가 없어서 대답도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갑자기 정한 한방병원 대표가 자신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자고 했다며 가지고 있는 가장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고 나타나라는 연아의 지시에 한껏 꾸미고 나타난 자신의 수고가 무색하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자신 앞에서 정한 한방병원 패밀리인 척은 있는 대로 다 해 놓고, 오늘 박상도와 그의 딸인 박연주 앞에서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보다도 못한 행태였던 연아였다.
자기에게 정한 한방병원의 자리와 앞으로의 미래를 두고 막말을 일삼던 박연아는 어디로 갔는지, 말 한마디 쉽게 꺼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밖으로 나와 둘이 되자 다시 본 모습을 꺼내는 모습을 보니 그녀의 인격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 중기였다.
“그리고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는데, 뭐가 부족해서 이재마한테 맨날 지는 건데? 역시 타고난 머리가 달라서 그런가.”
연아는 과거의 자신의 남자친구였던 한의대 수석이었던 재마와 그렇지 못했던 중기를 비교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박연아.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오빠야말로 할 말이 있어? 내 말이 사실이 아니야? 요양원도 가서 판 다 깔아주고 왔는데, 왜 조회수가 안 나오는데?”
“그거야…….”
중기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보기에는 편집 기술이나 함께 한 한의사들의 실력이나 전혀 부족할 것이 없는 데 이번에도 ‘환자를 읽는 한의사’의 조회수를 따라가지 못했다.
“진짜. 제대로 하고 입을 열자. 응?”
연아는 중기 앞에서 앞으로 입조심이라도 하라는 듯 그를 노려보고 다시 앞장서서 상도의 집을 나섰다.
* * *
똑똑.
“들어와.”
노크 소리를 들은 상도는 문밖에 서 있을 자신의 비서에게 들어오라 지시했다.
“대표님이 알아보시라던 자료 준비해 왔습니다.”
윤 비서는 준비한 자료를 박상도 앞에 내려놨다.
지난번에 지시했던 것보다 더 자세한 내용이 들어 있는 자료였다.
박상도는 말없이 쭉 살펴 내려갔다.
“명의 한의원은 6개월 전까지만 해도 구철원이라는 한의사의 소유였습니다. 최근에는 소유자 변경까지도 모두 마친 상태인 것 같고요.”
“구철원? 내가 알고 있는 구철원이 맞아?”
박상도는 낯설지 않은 이름에 윤 비서를 향해 물었다.
“네. 맞습니다.”
“참 별난 일이군. 한평생을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는커녕 숨기는 데 급급했던 양반을 이어가는 한의사는 자신의 이름을 못 알려서 안달이군.”
“구철원 원장의 외손주인 모양입니다.”
윤 비서의 말에 자료를 넘기려던 박상도의 손이 멈춰 섰다.
“이재마 이 녀석. 연아랑 맞지?”
“네. 박연아 팀장이 이야기했던 사람 맞습니다.”
윤 비서도 최종 면접까지 올라왔던 이재마를 똑똑히 기억했다.
박상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사람 보는 눈이 이렇게 없어서야. 평생 함께할 배필을 잘 만나야 인생이 바뀌는 건데 그것도 몰라서야 원.”
누구를 향한 이야기인지 윤 비서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박연아를 놓쳐 정한 한방병원의 사위가 될 수 있었던 이재마를 향한 말인지, 능력을 갖춘 이재마를 놓친 박연아를 향한 말인지.
“수고했어. 자세한 내용은 내가 혼자 보도록 하지.”
“그리고 이건 이번 주 한의 신문입니다.”
자료를 정리한 이후 발간한 한의 신문을 윤 비서는 상도 앞에 내려놓았다.
이재마의 인터뷰가 담긴 페이지였다.
“한의 신문 쪽에서는 이재마 원장에게 대표님이 진행하시던 칼럼을 맡길까 하신다고 합니다.”
박상도가 정한 한방병원 대표가 되기 이전, 환자들을 직접 만나면서 그 이야기들을 칼럼으로 7년간 글을 써 내려갔었다.
그 이후 몇몇 한의사들이 상도의 뒤를 이어 칼럼을 썼지만, 박상도의 글만큼 인기를 끈 한의사는 없었다.
한의사 협회에서 발간하는 신문이지만 전국에 있는 한의사들에게 전달되는 만큼 현장에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끌어내는 인재를 찾고 있던 협회에서는 이재마를 제격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협회장이랑 이야기를 좀 해보긴 해야겠군.”
협회 일을 크게 관여는 하고 있지 않는 그였지만, 윤 비서가 건넨 인터뷰를 보며 안경을 고쳐 썼다.
“수고했어. 나가봐.”
“네. 대표님.”
할 일을 마친 윤 비서는 인사를 하고는 박상도의 서재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