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58화
“영상 확인해 봤어?”
홍보팀장실에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을 테이크 아웃을 한 채 들어온 중기는 연아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사천까지 내려가 원치 않은 의료봉사를 하고 온 지도 1주일.
편집자가 편집하자마자, 기존에 찍어놓았던 영상들을 모두 제치고 ‘환자를 읽는 한의사’ 채널을 의식해 빠르게 업로드했다.
“내가 좋아하는 커피네? 고마워. 잘 나왔더라. 역시 시골 촌구석에 있는 요양원 찾아가길 잘했지. 거기 있는 사람들 다 서울에서 온 의료진이라고 엄청 좋아하던데? 그런 반응도 좋고.”
연아는 자신이 좋아하는 브랜드 커피를 일부러 나가서 사온 약혼자의 노고에 감사하다는 인사도 빼먹지 않았다.
중기는 지금까지 만나온 남자들 중에 이런 센스는 빠지지 않았다.
“내가 잘 나서는 아니고?”
중기는 편집된 영상을 보며 그저 그런 칭찬을 하는 연아의 목소리에 서운한지 자신은 어떻게 보였는가를 재차 확인했다.
“당연히 우리 예비신랑도 잘났지. 수고했어.”
“말로만?”
수고했다는 한마디를 듣기 위해 멀리서 커피까지 사왔으니,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칭찬은 어렵지 않았다.
중기는 이번에는 말로 하는 칭찬이 아니라 다른 것을 바라기라도 하는 듯, 연아의 몸에 자신의 몸을 더욱 밀착했다.
“뭐 바라는 거 있어?”
“뭐 크게 바라는 건 아니고. 나 지금 교통사고 환자들 있는 층에 있잖아. 언제쯤 다른 과로 옮길 수 있을 것 같아?”
역시 중기는 고작 영상을 사천까지 가서 찍은 것에 대한 칭찬 하나를 듣기 위해 연아를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연아가 시키는 대로 아무 대꾸 없이 사천까지 다녀온 것도 이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밑 작업이었을 수도 있었다.
중기는 센스가 있는 대신 기브 앤 테이크가 확실했다.
뭐, 어쩌면 이편이 더 깔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연아는 잠시 했다.
“글쎄. 알잖아. 내가 홍보팀이나 관여하지, 의료진 인사관리까지 관여할 수 있나.”
“그래도 입김이라는 게 있잖아. 아버님이나 작은 아버님한테 말이라도 한번…….”
“아빠한테는 말하기 쉬워도 작은 아빠한테는 글쎄. 말해도 별로 안 먹힐 것 같은데.”
“환자들도 내가 누구인지 벌써 다 안다고. 소문이 좀 빠른 줄 알아? 거기에다 입원해 있는 환자 중에 5-60대 여자 환자가 많은 거 알지? 그분들은 병원에 입원해서 할 일 없으니까 의사 이야기, 간호사 이야기하는 게 일이라고.”
중기는 정확한 대답을 해주지 않는 연아에게 이때가 기회다 싶어 이야기를 늘어놨다.
“그렇긴 하지.”
“너도 내가 침방에서 처박혀 침이나 놓고 있는 것보다는 다른 과로 옮겨서 진료도 보고 환자들도 만나는 게 좋잖아.”
“그건 내가 말해볼게. 근데 확실하지는 않아. 오빠 말대로 아직 제일 초반 진료 보는 과에 있는 오빠를 너튜브 영상에 출연시키는 것만으로도 쉬운 일 아니었어. 알지?”
연아는 지금 중기의 위치까지 만들어 놓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는 이야기 또한 빼놓지 않았다.
“알지, 알지.”
“그러니까 사천에 다음 달에도 아무 말 하지 말고 잠자코 다녀와. 응? 오빠가 불만 가지면 다른 사람한테 너튜브 촬영 넘기는 수밖에 없어. 한의사들 사이에서 너튜브 채널 운영하는 데 왜 자기들은 기회 안 주냐고 하는 사람들 많단 말이야.”
정한 한방병원 채널이라면 이미 전국 최대의 한방병원인 만큼 팔로우 수가 어마어마했다.
페이닥터를 하고 있는 한의사 중에서 훗날 정한 한방병원을 나와서 개인한의원을 차릴 욕심을 가진 이들이 있다. 이왕이면 정한 한방병원 채널로 얼굴을 알리는 것도 훗날 좋은 홍보가 되리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중기는 거리가 멀더라도 사천까지 가는 것에 대한 불만을 가진 것을 티 내는 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그럼. 나한테도 좋은 기회지. 고마워. 자기.”
“내가 오빠 생각 많이 하는 거 알지?”
“그럼.”
둘은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 * *
“이야. 진짜 이것도 못 할 노릇이네.”
요양원 진료 봉사 브이로그를 세 편에 나눠 편집을 하느라 일주일 내내 정신이 없던 강산은 재마가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서 태블릿을 들고 다가왔다.
“왜. 무슨 일 있어?”
“너 아직 안 봤냐? 지금 너튜브 급상승 인기 동영상 페이지에 있는 건데.”
“뭔데?”
재마는 강산이 넘긴 태블릿을 들여다보았다.
제목은 ‘경남 사천, 요양원에 F4가 떴다?’
제목부터 어그로를 끄는 데는 확실한 영상이었다.
“요양원에 봉사 간 브이로그야?”
재마는 자신의 채널에서도 요양원 진료 봉사 브이로그를 꾸준히 올리고 있지만, 자신의 채널 영향으로 진료 봉사를 하는 너튜버들이 늘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좋으면 좋았지 아이디어 도용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것은 이미 예상한 바였고, 어쩌면 바라고 있던 바일지도 몰랐다.
“잘 봐봐. 누가 F4인지.”
“응?”
강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화면을 확대했다.
확대된 썸네일에는 정한 한방병원 최중기의 얼굴이 있었다.
“이거 중기야?”
“그래. 최중기.”
“정한 한방병원 채널인가 보네.”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는 재마를 보며 강산은 한숨을 푹 쉬며 영상을 플레이시켰다.
“아이고 답답한 원장님아. 이 채널 봐봐. 아주 대놓고 우리 영상 베꼈어.”
“에이. 그래도 베꼈다는 무슨. 너도 알고 말했잖아. 우리가 진료 봉사 다녀오는 거 보고 소외된 분들 봉사하는 게 유행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물론 그렇게 말은 했지.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베꼈으면 좋겠다고는 안 했지.”
강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태블릿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재마는 태블릿을 쥐고 한참을 영상을 돌려보았다.
부산에 있는 정우도 진료 봉사에 참여한 것 같았다.
지방에 있어서 진료 봉사에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던 정우였는 데 어디서든 하고 있으면 되었다는 마음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우리 채널도 함께 구독하는 독자들이 베낀 걸 좀 알아본다는 거?”
“그래?”
강산은 조금이라도 아쉬운 마음이 풀릴 것 같은지 댓글창을 열어 쭉 내렸다.
“어? 뭐야. 조금 전까지 있었는데.”
“뭐가 말이야?”
“우리 채널하고 주제가 비슷한 것 아니냐는 댓글 여러 개 있었는 데?”
강산은 이상하다는 듯 눈까지 비벼가며 다시 봤지만 그런 댓글은 있지도 않았다.
“와, 이 녀석들 보통 아닌데? 댓삭 바로 하네.”
“댓삭?”
“댓글 삭제 말이야. 참나. 정한 한방병원 직원이 많으니까 이런 일 하는 건 대수도 아니다 이거야?”
강산은 팔을 걷어붙이더니 무엇인가 적어 내려갈 기세로 태블릿을 쥐고 앉았다.
“뭐하게?”
“나라도 댓글 달게. 왜 우리 채널하고 같은 주제 영상을 올리고, 올라오는 댓글은 삭제하냐고.”
“강산.”
재마는 강산이 쥐고 있는 태블릿을 빼앗아 들었다.
“우리가 나설 필요 없어.”
“야이, 답답아.”
[후, 답답한 자식. 그러니까 박연아한테 당하지.]
재마의 머릿속으로 강산이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이 고스란히 들어왔다.
재마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대체 이 상황에 박연아가 또 왜 생각이 난 걸까.
“너 괜히, 나랑 박연아랑 엮지 말고. 상관없는 일이야.”
“뭐?”
강산은 재마의 상처를 건드릴까 봐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을 재마가 알아듣기라도 한 것 같아 화들짝 놀랐다.
“너 뭐야. 내 속마음 읽어?”
“그럴 리가 있냐. 그럼 내가 한의원 하겠어? 점이라도 본다고 돗자리 깔았겠지.”
“너 수상해. 환자들도 그렇게 말한다고. 이재마 원장 한의사가 아니라 점쟁이 아니냐고.”
“정말?”
“아 소름 끼쳐. 야, 너 또 내 생각 읽어봐.”
[진짜 이 녀석 나 몰래 신내림이라도 받은 거 아니야? 이상해. 명의 한의원 건물도 조선 시대부터 이어 왔네, 어쩌네 하면서.]
강산은 자신의 속마음을 읽어보려며 재마의 어깨를 쥐고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마치 눈동자로 자신의 마음을 읽으라는 듯이.
강산의 마음은 고스란히 읽어 재마의 머릿속에 들어왔지만, 굳이 티 내고 싶지 않았다.
신내림과 한의사라니 강산 다운 반응이었다.
“됐다. 내가 무슨, 점쟁이도 아니고. 됐거든? 네 마음 따위 하나도 안 들려.”
“진짜지? 나 믿는다. 나 더 소름 끼치게 하지 마.”
“됐다고. 그러니까 너도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우리는 이 자리에서 우리 할 일만 잘하면 되는 거야.”
재마는 더 이상 강산이 이상한 소리를 하지 못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지개를 쭉 켜고는 오후에 올려놓은 탕약을 확인할 셈이었다.
사무실에서 나오려는 찰나, 문 앞에서 물리치료사인 효주와 부딪힐 뻔한 재마는 자신이 실수한 것 같아 한 발자국 물러섰다.
“이 선생님. 죄송합니다. 놀라셨죠?”
“아, 네? 아, 아니에요. 하하. 제가 지금 이곳을 지나간 탓이죠.”
“아닙니다. 이제 퇴근하세요?”
이미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긴 7시 반이라는 걸 확인한 재마는 늦게 퇴근을 하는 효주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최대한 퇴근 시간을 맞추고 싶지만 7시까지 진료를 한다고 해도 늦게 한의원을 찾은 환자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어 물리치료까지 받는 경우도 있었다.
이럴 경우 효주만 종종 늦게 퇴근을 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네. 조금 늦게까지 치료 받으신 환자분이 계셔서요. 환자분은 방금 귀가하셨고. 처치실 정리까지 마치고 나가는 중입니다.”
효주는 제 업무를 끝마친 것을 직장 대표이자, 한의사인 재마에게 보고하듯 설명했다.
“이렇게 늦은 날 처치실 정리는 제게 맡기셔도 됩니다. 퇴근 먼저 하세요.”
“아니에요. 그래도 제가 일하는 곳인데 그럴 수 있나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원장님 수고하셨습니다.”
직원들 대신 정리를 하겠다는 재마의 말에 손사래를 친 효주는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기라도 한 듯 인사를 꾸벅하고는 밖으로 빠져나갔다.
효주와 재마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강산은 사무실을 뒤늦게 나왔다.
“이효주 선생님?”
“응. 왜?”
“아니, 내가 편집하는 사무실에 관심이 많은 것 같더라고.”
“그래?”
강산은 자신도 사무실을 나서려고 할 때, 몇 번 효주와 부딪힐 뻔한 일이 있는지 재마에게 어깨를 으쓱였다.
“혹시…….”
“혹시 뭐?”
“나한테 관심 있나? 하긴 내가 좀 미지의 인물이기는 하지. 한의대를 나와서 뻔한 한의사의 길을 걷지 않고 한의학 채널의 운영자로 탈바꿈한…….”
강산은 아무래도 효주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다며 어깨에 뽕을 가득 채웠다.
“차라리 우리 채널에 관심이 많아서 그렇다고 해라. 네가 아니라.”
재마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콧방귀를 끼고는 탕약실로 들어갔다.
재마는 탕약실의 기계 앞에 쪼그려 앉았다.
오후에 넣어놓은 약들이 팩에 담겨 바구니에 담겨 있었다.
[휴, 하마터면 걸릴 뻔했네.]
혼자가 된 재마는 조금 전 효주의 생각을 읽은 것에 대해 의아한 마음이 생겼다.
‘도대체 뭘 걸릴 뻔했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