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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읽는 한의사-56화 (56/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56화

1층 면담실에 도착한 재마는 심호흡 크게 했다.

이런 분위기를 언제 느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재마였다.

아마 수능을 본 이후 성적표가 나오고 진로 상담실로 들어가기 직전 그 기분이었다.

이미 모든 결과는 나온 상황이었다. 그의 실력으로 받은 결과를 가지고 이왕이면 더 좋은 학교로 진학할 수 있도록 어필하고 싶은 마음으로 진로 상담실 앞에서 심호흡을 했었다.

오늘은 그때와는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지금 처한 상황을 더 정확히 보호자들에게 설명을 해야 했다.

보통 보호자 면담은 요양원의 전담의사가 진행하고는 하는데, 오늘은 특별히 서울에서 왔다는 한의사를 보러 먼 길을 찾아온 보호자들이었다.

어쩌면 재마에게 환자의 상태를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인데, 보호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이 원장님. 이쪽입니다.”

먼저 온 보호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진 주임이 재마가 면담실로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나서 재마의 자리를 안내했다.

“이쪽은 서울에서 오신 이재마 원장님입니다. 요즘 너튜브에서 아주 유명하신 분인데…….”

“저도 알고 있어요. 동료가 추천해서 영상을 몇 개 봤는데, 종종 동료분들과 오신다는 요양원이 저희 어머니가 계시는 요양원인 줄은 몰랐네요.”

“제 영상을 봐주셨다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유명하신 분을 이렇게 마주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보호자는 잠시 반가움을 느껴 좋지 않은 소식을 전달받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그 생각에 금방 얼굴이 어두워졌다.

“제가 오늘 지순정 어르신을 진료하고, 걱정이 되어 급하게 보호자분들을 모신 이유는……”

재마 또한 자신의 역할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진 주임님께도 전해 들었지만, 지순정 어르신께서 건강검진을 받으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저랑 제 안사람이 한 달 전에 홍천에 내려와서, 시내에 있는 군립병원 가서 건강검진을 진행했습니다. 요양원에 계시기는 하지만, 건강검진 기간은 놓치지 않고 시간을 빼서라도 해드리고 있었습니다.”

혹여 집에서 먼 시골 요양원에 모셔 놓고 노모를 관심조차 주지 않는 불효자로 보일까 걱정한 것인지, 지철산은 건강검진 날짜와 건강검진을 한 병원을 똑똑히 언급했다.

“물론 저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의심하고 있는 담도 쪽 질환은 단순하게 건강검진으로는 찾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보통 환자의 증상에 따라 추가 검진을 하고는 하는데, 지순정 어르신께서는 복지사분들과도 의사소통이 힘드신 상태라 증상이 나타나고 있어도 쉽게 발견하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건강검진으로도 확인하기 힘든 병을 원장님께서 알아채셨다는 말씀입니까?”

철산과 그 옆에 앉아 있는 철산의 배우자는 아무리 유명하다 해도 상주하고 있는 의사도 아니고, 서울에서 내려와 잠깐 진료를 보기만 한 한의사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헷갈리는 모습이었다.

“물론 제 말을 100프로 확신하시지 못하실 거라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원장님은 원장님의 말씀을 얼마나 확신하시나요?”

헷갈리는 얼굴을 하고 있던 철산과 달리, 그의 손을 차분히 맞잡은 철산의 배우자가 재마에게 물었다.

“저는 제 말을 100프로 확신합니다.”

정확히는 자신의 능력을 100프로 확신하는 재마였지만, 모든 것을 다 말해줄 수는 없었다.

다만 자신이 이미 한의학 수련을 해가며 쌓아 놓은 의료지식으로 그 들을 조금이라도 확신할 수 있도록 설득해야 했다.

“지순정 어르신의 의료기록을 확인했습니다. 당뇨를 오래도록 앓아오셨더라고요. 당뇨를 앓으면서 흡연과 음주 기간이 길었던 분들은 특히나 담도암을 의심해야 합니다.

검진을 통해 알아채기도 어렵기도 유명한 암이지만, 몇 가지 환자의 생활 환경과 나타나고 있는 증상으로 알아챌 수 있는 암이기도 하죠.”

재마는 이야기를 함께 듣고 있는 진 주임에게 눈짓을 했다.

재마의 뜻을 알아챈 진 주임은 고개를 끄덕이고 준비된 영상을 보호자에게 보이기 위해 노트북을 준비했다.

“이 영상은 아까 제가 진료를 본 이후, 어르신들 간식시간에 찍은 영상입니다. 제가 의심하고 있는 병이 맞는다면 그 증상이 나타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영상을 틀자, 간식 시간이 되어 아이처럼 기뻐하는 지순정 어르신의 모습이 보였다.

지철산은 자신의 노모가 이제는 영락없는 간식시간을 기다리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재마는 편집되지 않은 영상을 보호자에게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이 맞는 것일까 잠시 걱정스러웠지만, 이 심각한 상황을 전달하기에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당뇨 환자가 드실 수 있는 잣죽이 준비되었고, 드시는 동안에는 충분히 드셨습니다.”

아기 새처럼 꿀떡꿀떡 받아먹는 지순정 어르신의 모습까지 면담실에 있는 네 사람이 모두 함께 바라봤다.

그리고 어르신의 몫을 다 비운 후, 더 달라고 떼를 쓰는 모습까지 치매라는 병을 앓기 전에는 본 적이 없었던 모습을 본 어르신의 며느리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그때, 아이 같던 어르신이 갑자기 먹은 것을 모두 토해내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그 모습은 차마 볼 수 없는지 철산과 그의 배우자는 두 손을 꼭 쥔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감고도 귀에 들리는 꽤 오랫동안 어르신이 괴로워하는 소리는 생생히 그들의 귀에 박혔다.

더 이상 영상을 보이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재마와 진 주임은 영상을 멈췄다.

“보시기 힘드신 것 잘 압니다.”

“저런 증상이 오늘 한 번 있는 겁니까? 아니면……”

“사실 이 부분이 요양원 입장에서 민감한 사항이기는 합니다.”

영상이 멈추자, 잠자코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던지 철산의 목소리가 커졌다.

믿고 노모를 모셨던 요양원에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어머니의 상태를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는 배신감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아시겠지만 지순정 어르신께서 저희 요양원에 오셨을 때는 이미 의사소통과 거동이 불편하신 상태이셨습니다. 댁에서 치매 치료를 위해 시설도 다니시고 며느님께서 병수발을 오랫동안 드시면서는 영상 같은 모습을 보신 적이 없으셨을 수도 있지만 활동량이 적은 3층 어르신들 같은 경우는 드신 음식을 모두 게우시는 경우도 종종 있을 수 있는 일이고요.”

혼란스러움과 배신감에 휩싸인 지철산을 진정시키기 위해 진 주임은 진땀을 흘렸다.

“저희도 협진을 하고 있는 홍천 시내의 병원이 있지만, 의사소통이 힘든 어르신들은 특히나 입원 전 지병이 아니라면 찾아내기 쉽지 않습니다. 보통 정기적인 건강검진으로 건강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죠. 오늘처럼 의심증상으로 병을 발견하는 경우는 특히 드문 경우입니다.”

의사 소통이 전혀 되고 있지 않다고 언급을 하는 진 주임의 말에 지철산과 그의 배우자는 아무 말도 덧붙일 수 없었다.

서울에서 홍천까지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꼭 노모의 얼굴을 보려고 노력을 하는 철산이었다. 하지만 노모와 대화를 나눈 적은 기억에 없을 정도였다.

식사는 잘하시는지, 오늘은 무엇을 드셨는지,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미 없는 질문만 하고 갈 뿐이었다.

어디 편찮으신 곳은, 불편한 곳은 없는지 지난주에도 와서 물었지만 그저 2주 만에 얼굴을 보는 아들의 얼굴이 좋다고 말만 하는 노모였을 뿐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러우시고, 이 상황이 억울하시기도 할 것이란 것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지순정 어르신의 치료는 저희 요양원 측에서도 최대한 적극적으로 방법을 찾겠습니다.”

진 주임은 더 빨리 상황을 알아채지 못한 상황에 대한 사과를 고개 숙여 전달했다.

원망스러웠던 마음이 쉽사리 가라앉지는 않았지만, 진 주임의 말처럼 현실을 빠르게 받아들여야 했다.

“월요일이 되면 다시 소화기 내과 전문이 있는 검진센터에서 재검진을 받아 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재마는 철산이 빠르게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소견서를 작성한 서류를 건넸다.

철산은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받아 들고 재마가 작성한 글자를 한 글자 한 글자 새겨 읽었다.

“담도암은 증상이 나타나면 말기로 알고 있는데……”

소견서를 읽은 철산은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꾹꾹 누르듯 소리 냈다.

“네…… 맞습니다.”

“그럼 그 고통도…….”

“네. 어르신이 의사소통이 쉽지 않으셔서 말씀은 못 하시지만 음식물을 소화해 내기에 힘드실 겁니다.”

철산은 흐르는 눈물을 억누르며 이를 질끈 깨물었다.

“검진 이후에는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참을 눈물을 흘리던 철산은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꿈속 요양원은 치매 노인들을 위한 요양원이었지, 말기 암 환자를 위한 요양원은 아니었다.

만약 담도암이 맞는다면 어쩌면 더 이상 꿈속 요양원에 계실 수 없을 수도 있었다.

“저희 요양원에서는…… 지금까지는 말기 암 환자분들을 모시고 있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약 처방 문제도 있고…….”

말기 암 환자를 받아들이기에는 전문적인 의료진이 부족한 상황이라 진 주임은 말끝을 흐렸다.

“전원을 해야 한다면 형제들과 의논을 해야 합니다. 검진은 이른 시일 내에 한다고 하더라도 전원까지는 시간을 주실 수 있으십니까?”

삼 형제 중 맏이인 철산은 노모를 요양원에 모시고도 한시도 마음이 편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이제는 건강이 성치도 않은 분을 먼 곳에 모시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형제들이 뛸 듯 반발을 하겠지만 당장 서울로 모실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삼 형제에게도 시간이 필요했다.

특히나 담도암 치료를 위해 전원을 해야 한다면 병원부터 시작해 앞으로 치료비용과 간병인 비용을 다시 형제들과 이야기해야 했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자, 심적 부담과 경제적인 부담이 한꺼번에 다가온 철산은 숨이 가빠지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저희 요양원에서는 최대한 맞춰드릴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처음인 진 주임이었지만, 요양원에서 일을 하며 보호자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게 된 그였다.

철산의 머릿속에 이제는 형제들과의 관계에 대한 걱정이 턱 밑까지 다가왔음을 잘 알았다.

“혹시 이 영상은……”

잠자코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철산의 안사람이 조심히 입을 열었다.

“아, 이 영상은 따로 공개될 일은 없을 겁니다.”

“꿈속 요양원 봉사 영상도 종종 올라오던데 필요하신 건 아닌가요?”

철산도 그제야 이 영상의 촬영 용도를 물었다.

“아닙니다. 저희는 보호자분들이 원하시지 않으면 편집하면 그만입니다.”

재마는 손사래를 치며 이 영상은 사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비쳤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잠시 이 사람하고 대화를 나눠도 될까요?”

먼저 영상에 대해 물었던 철산의 배우자가 철산의 손을 잡아끌었다.

“네. 그러시도록 하세요.”

“네. 괜찮습니다.”

재마와 진 주임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혼란스러운 상황의 두 사람은 두 손을 꼭 잡고, 면담실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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