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55화
영원 요양원 오후 봉사를 시작한 지, 40분.
한의사 대표로 온 최중기의 보조를 하고 있는 정우는 중기와 같은 진료실에서 환자들을 진료하고 있었다.
리무진에서 죽치고 쉬고 있던 중기 녀석은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미간에 주름이 잔뜩 지어져 있었다.
Vlog에 사용할 영상을 찍기 위해 왔다면서 저렇게 포커페이스가 안 돼서 어쩌나 하고 정우가 절로 혀끝이 내차질 정도였다.
“최 선생님. 조금 표정 좀 풀어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너무 그림이 안 나와서.”
“그러니까…… 내가 경상도는 너무 멀다고 했잖아요. 도대체 누가 경상도 촌구석에 있는 요양원을 고른 거야. 경기권에도 요양원 많구만.”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하는 촬영 기사가 중기의 어두운 표정을 조금 풀어줬으면 하는 한마디를 하자마자 중기는 기다렸다는 듯, 들고 있던 침을 내려놨다.
베드에 누워 중기가 침을 놓기를 기다리고 있는 어르신은 갑작스러운 중기의 행동에 어리둥절하셨다.
“선생님요. 다 끝난 겝니까.”
“잠깐 기다리세요. 후, 요양원 여기까지 오자고 정한 사람 누굽니까? 대체.”
“아악. 아, 너무 아파요. 선생님. 너무…….”
“원래 통증이 심한 곳이 침이 들어가면 더 아픈 거예요. 참으세요.”
중기의 참으라는 말에 입을 틀어막으며 참고 계시는 어르신의 모습에 촬영 기사가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최 선생님. 어르신이 너무 고통스러워하셔서 이 장면은 못 쓰겠습니다. 좀 쉬시고 다시 하실까요?”
아무리 편집을 한다 해도 어르신의 고통스러운 표정과 비명, 거기에다 치료를 하고 있는 최중기의 표정이 좋지 않아 제대로 된 그림이 나올려야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쉬기는 뭘 쉬고 합니까. 그냥 이 장면 그대로 쓰세요.”
“그래도 그림이 영…….”
“그러니까. 치매 노인네들 있는 요양원에서 봉사하는 장면이 가당키나 하냐고요. 이 어르신들 상태가 이런데 침을 잠자코 맞고 있겠어요? 다 아프다고 엄살이지.”
어르신을 베드에 눕혀놓고 나오는 말이라고 그대로 필터 없이 쏟아붓는 중기의 말에 듣고 있는 촬영 기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선생님, 그래도 어르신들 앞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
“뭐, 다 알아듣지도 못하고 기억도 못 할 텐데.”
중기는 어르신이 아프다고 하는 상태에서도 침을 모두 놓았는지, 침술 기구들을 정리했다.
“어르신들 치료받는 모습은 다른 한의사들이 진료하는 모습이랑 짜깁기해서 편집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풀샷 정도 찍을 때만 잘 나오면 되지. 다 편집 가능한 거니까 유도리 있게, 잘. 알겠죠.”
정리를 마친 중기는 촬영 기사의 어깨를 탁탁 치더니 먼저 진료실을 빠져나갔다.
자기는 할 만큼 했으니 편집을 잘 해내라는 뜻이었다.
정한 한방병원 대표 한의사로 온 중기가 진료실에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요양원 관계자가 다가왔다.
진료 전에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얼굴도 비치지 않던 그라 복도에서 마주친 것이 반가운지 반색을 했다.
“최 선생님. 반갑습니다. 영원 요양원 강정선 입니다. 선생님 모처럼 오셨는데, 저희 어르신들이…….”
“괜찮습니다.”
강정선의 이야기를 다 듣지도 않고, 일단 말을 자르고 보는 중기의 목소리에 반색을 했던 정선의 얼굴이 굳었다.
“네?”
“저희는 진료만 오전 오후로 나눠서 보면 충분하니까요. 너무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정선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듣지도 않은 중기는 그저 진료하는 모습만 촬영하면 제 할 일은 다 했다는 듯, 호의도 필요 없다며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신경 쓴 것 하나 없습니다. 어르신들이 좋아하셔서 매주 주말에 하는 행사인데 거기에 자리만 채워주시면…….”
굳었던 정선은 억지로 입가에 미소를 띠며 다시 한번 제안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 괜찮습니다. 저희가 그렇게 한가하게 자리 채우고 앉아서 나이 많은 노친…… 아니, 어르신들 노랫가락에 장단이나 맞춰 드릴 여유도 없고요.”
“최 선생님, 그래도 말을 그렇게 하시면…….”
“하실 말씀 다 끝나셨으면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30분 쉰 후에 다시 촬영 들어가야 해서요.”
마치 영원요양원에 진료 봉사를 온 것이 아니라 그저 촬영을 위해 내려오기라도 한 것처럼 최중기의 포커스는 촬영에 맞춰져 있는 듯했다.
황당한 그의 행동에 어이가 없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정선과 마주친 촬영 기사는 자신과 함께 나온 정우의 옆구리를 쿡 하고 찔렀다.
“이 선생님. 이 선생님이라도 어르신들 행사에 자리라도 메꾸시죠.”
“네? 제가요?”
그저 중기의 보조 역할만 할 생각이었던 정우는 중기도 거절한 자리를 채우라는 촬영기사의 말에 난색을 표했다.
“선생님이라도 가셔야 강 선생님이 좀 덜 민망하시죠. 그리고 우리도 영상에 쓸 그림이 한참 모자라요. 편집해서 짜깁기로 한다 해도 12분 채우려면 더 필요해요. 그래도 요양원 봉사의 꽃은 노래 교실 아니겠습니까. 그 장면이라도 써야죠.”
촬영 기사는 마침 잘됐다는 듯, 눈을 찡긋거리며 제 뜻대로 하라고 부추겼다.
“그래도 최 선생님이 거절한 자리를…….”
“무슨 일 있으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강 선생님한테는 가서 제가 저희라도 간다고 말씀드릴 테니, 이따 뵙겠습니다!”
촬영 기사는 손을 흔들며 이따 보자는 말만 남기고 강정선을 따라잡기 위해 복도를 뛰어갔다.
* * *
홍천 꿈속 요양원.
늦은 오후에 시작된 오후 타임 진료가 해가 산으로 넘어간 지 한참 후에야 마무리됐다.
“으아, 드디어 끝났다.”
강산은 마지막 어르신의 침까지 정리하자 이제 봉사의 끝이 보이는지 기지개를 쫙 켰다.
하루 동안 찍은 영상은 6시간이 넘어갔다.
그는 진료 봉사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수완과 정수, 거기에다 재마까지 영상에 모두 담기 위해 쉴 틈 없이 영상을 찍느라 진료 봉사를 하고 있는 한의사들 못지않게 바빴다.
“수고했다.”
“나보다 우리 한의사 선생님들이 수고하셨죠.”
강산은 자신은 별로 한 일이 없다는 듯, 수고했다는 재마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사실 강산은 촬영만 그의 일이 끝이 아니었다. 6시간이나 되는 영상을 짧게는 12분 영상 하나로, 길게는 영상 두 개로 편집을 해야 했다.
“저 녀석은 언제까지 카메라 잡고 있는 건데? 야, 너 일부러 면허 시험 준비 안 하는 거지? 합격하면 진료 보라고 할까 봐.”
진료 가운을 벗는 수완은 재마에게 너스레를 떠는 강산의 모습이 맘에 들지 않는지 투덜거렸다.
“티 났냐?”
“어, 티 아주 많이 나.”
“그래도 내가 채널에서 하는 일이 많다.”
“많기는 촬영하고 편집하고, 그게 다 아니야?”
“한의사 전문 채널에, 한의학 전공한 편집자 구하기가 쉬운 줄 알아? 내가 6년간 공부한 걸 다른 데 쓰지 않고 너희 진료하는 모습을 보고 편집하는 데 잘 쓰고 있다, 이거야.”
“얼씨구.”
말을 잘하는 강산의 말은 당해내지 못하겠다는 듯, 수완은 고개를 절로 흔들었다.
세 사람이 진료를 마치고 티격태격하는 사이, 사무실에서 내려온 진 주임이 노크를 했다.
“이 원장님, 진료 마치셨다는 이야기에 내려왔습니다.”
“네. 진 주임님.”
진 주임의 목소리에 이제 쉬러 숙소로 돌아갈 생각이었던 재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쉬셔야 할 텐데, 죄송합니다. 아까 진료 보셨던 지순정 어르신의 보호자들이 늦은 시간이지만 요양원으로 오고 있다고 하셔서요.”
주말 늦은 시간이었지만, 서울에서 홍천까지 어르신의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내려오는 모양이었다.
“아, 그래요? 몇 시쯤 도착하십니까?”
재마는 듣던 중 잘됐다는 듯, 반기며 자신의 손목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여덟 시 반이나 된 시간이었다.
“거의 도착은 하셨을 텐데, 선생님이 직접 보호자분들께 어르신의 상태를 전달해 주실 수 있는지 여쭤보려고 내려왔습니다.”
“당연히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진료 봉사를 하겠다고 서울에서 홍천까지 내려온 것도 감사한 일이었다. 그런데 긴 진료 봉사를 마치고 쉴 틈도 없는 한의사에게 요양원 어르신의 보호자를 만나 면담을 해달라고 부탁을 한다는 것이 민망했던 진 주임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걸렸다.
“어휴. 피곤하실 텐데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진정준은 재마의 손을 덥석 잡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는요. 제가 여기 온 이유인데요. 보호자 분들 오시면 면담실로 내려가겠습니다.”
“네.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재마의 대답에 진정준은 먼저 내려가 보호자들을 만날 준비를 하겠다는 듯, 서둘러 아래로 내려갔다.
“이야, 우리 원장님 힘드시지도 않은가 봐.”
“저 녀석 우리 몰래 좋은 한약 해 먹는 거 아니냐? 아주 체력이 넘친다 넘쳐.”
“강산, 너 탕약실 갈 때마다 잘 보다가 저 녀석 혼자 뭐 먹나 잘 봐봐. 나도 따라 먹게.”
의욕이 넘치는 재마의 모습에 세 사람은 너도나도 한마디씩 덧붙였다.
재마는 어깨를 으쓱이며 제 짐을 정리할 뿐이었다.
“그나저나 지순정 어르신 보호자면 아까 네가 담도암 의심된다는 환자?”
재마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수완과 정수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재마 곁으로 다가와 한마디씩 거들었다.
“근데 재마야, 잘 생각해 봐. 우리 한의사야. 순환기 내과 의사 아니야. 그냥 진맥으로 추측하는 거잖아. 어르신들 연로하시고, 운동량도 부족해서 소화 안 되시는 거 당연해.”
“복지사들이 그냥 대수롭지 넘긴 것도 나는 이해가 가더라니까.”
“거기다가 건강 검진 한지, 얼마 안 된 분이라며 일 키우지 말고 그냥 네가 진료 봐보니 기력이 약하신 것 같다. 이 정도만 해. 어?”
수완과 정수는 적당히 어르신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뜻만 내비치라는 듯 재마를 설득했다.
“아냐. 나는 100프로 확신해. 아무리 연로하시고, 요양원에 계시더라도 보호자들이 지금 환자의 상태를 정확히 아셔야지.”
“재마야.”
뜻을 굽히지 않는 재마의 모습에 수완과 정수는 대단하다는 생각보다는 보호자들이 받아들이는 모습에 재마가 실망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저 녀석 고집은 아무도 못 꺾어.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해야지.”
“나는 모르겠다.”
강산이 재마를 설득해도 소용없다는 듯 말을 하자, 수완과 정수는 두 손을 들었다.
그때, 재마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보호자가 도착했는지, 진 주임의 전화였다.
“이재마. 내려가서 네가 전달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와라.”
“그래.”
강산이 재마의 뜻을 응원하겠다는 듯, 한마디 하자. 재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환자 영상은 진 주임한테 미리 보내놨으니까.”
“고맙다.”
재마는 자신의 어깨를 다독이는 강산의 손을 한 번 맞잡은 후, 진료실을 빠져나갔다.
혼자 보내도 되겠냐는 듯 정수와 수완이 바라보자, 강산은 어깨를 으쓱였다.
“진짜 저 녀석 아무도 못 말린다니까. 저 녀석 한번 믿어보자. 보호자에게 어떻게 전달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