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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읽는 한의사-53화 (53/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53화

심상치 않은 재마의 표정을 읽은 강산은 찍고 있던 영상을 끄고는 그에게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온 그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이 원장. 한 달 전 건강검진 결과가 괜찮다고 하는데 왜 그래? 뭐 짚이는 부분이라도 있는 거야?”

“지순정 어르신은 오랫동안 2형 당뇨를 앓고 계셨어. 거기에다 과거에는 담배도 피우셨고, 음주도 하셨지. 물론 지금은 거동도 불편하신 상태고 요양원 안에 계시니까 모두 끊으셨겠지만…… 당뇨 환자가 흡연과 음주를 할 경우에 담낭과 담도암에 걸릴 확률이 크게 올라가.”

“그건 알고 있지만…….”

강산의 물음에 재마는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는 듯했다.

“일단 진 주임님도 건강검진 한 병원에 연락해 보신다고 했더니 기다려보자.”

“식사는 하셨다고 했고, 간식 시간이 있다고 했지?”

이미 재마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세 시 반에 드신다고 했어.”

“그럼 일단 다른 병실 어르신들부터 진료를 보고 올 시간은 되네.”

시간을 확인한 재마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다른 동기들은 다음 병실로 자리를 옮긴 후였다.

“그런데 만약에 지순정 어르신 병이 심각하다는 게 사실이라도 해도 찍어 놓은 영상을 편집해야 하는 거야, 사용해야 하는 거야?”

강산은 채널 관리자로 진지하게 재마에게 물었다.

물론 병원에서도 체크 하지 못한 큰 병을 진맥 한 번에 확인하는 영상을 편집 없이 그대로 너튜브에 올린다면 이건 대박 영상이 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건 지순정 어르신의 보호자나 요양원의 허락이 필요할 것이었다.

혹여 놓치고 지나간 부분이라고 하면 댓글의 반응이 심상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건 나중에 가서 결정할 일이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이따가 영상에 쓰든 편집하든 혹시 어르신이 간식 드신 후의 반응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잘 찍어놔.”

너튜브 영상으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환자의 상태를 다시 확인하는 데 증거 영상으로 남을 수 있으니 강산에게 놓치지 말고 영상을 찍어달라고 당부를 했다.

“알았어. 그건 걱정하지 말고.”

재마의 당부에 강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재마 저 녀석 많이 이상해지지 않았냐?”

“뭐가?”

오전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서 3층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의 병실을 돌아다니며 진료를 본 수완과 정우는 늦은 점심을 먹고 나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담배를 피우지는 않지만 건물 뒤 그늘진 곳 벤치에 앉아 있으면 이 시간이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아직 여름이 다 가지 않아 낮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였지만 그늘의 벤치에서는 그런 땀도 식을 수 있도록 해줬다.

“예전에도 우리랑 다른 선상에 있는 기분이었지만 이제는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진달까.”

“뭐? 진짜. 너도 참.”

수완의 말에 정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채널 이름도 묘하다니까 환자를 읽다…… 묘하잖아. 왜 그렇게 지은 거지?”

“강산이 말로는 그 동공으로 환자 상태를 읽는…….”

“홍채진단?”

“그래. 홍채진단을 뜻하는 것 같던데? 홍채진단 실습 때도 동기들 다 헤매는 동안에 재마는 A+ 나왔잖아.”

“재마가 만점 아닌 과목이 있었냐.”

“그렇긴 했지만.”

두 사람은 못 말린다는 듯 낄낄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이렇게 올 때마다 뭔가 배우고 가는 게 많은 것 같아.”

“나도. 그러니까 따라나서지. 처음에는 한 주만 오고 말까 했다.”

“나도 그랬잖아. 강산이가 부탁을 하니 거절은 못 하겠고. 대형병원 인턴이 쉬운 줄 아느냐고 핑계 대고 빠지려고 했는데 그래도 와서 느끼는 것도 있고.”

“나는 이 그늘의 매력에 빠져서 온다. 한 주의 피곤함이 싹 가시는 것 같아.”

수완은 기다란 벤치에 드러누워 두 눈을 감았다.

“참. 오늘 정수도 진료 봉사 간다고 했는데.”

“정수? 정수가 무슨 진료 봉사?”

부산에 있는 한방병원에 발령받아 서울 오가는 것도 벅차서 강산이 함께하자던 진료 봉사에 참여를 하지 못하던 정수였다.

“최진기가 같이 가자고 연락이 왔대. 같이 다녀오면 하반기 공채에 힘 좀 써준다고.”

“뭐?”

누워 있던 수완이 벌떡 일어났다.

“정한 한방병원?”

“너 강산이한테는 말하지 말아라. 정한 한방병원 채널에서도 진료 봉사 다녀오는 브이로그 찍으려고 한대. 재마가 해서 성공하니 아이디어 바로 쓱싹한 거지 뭐.”

“야, 그건 좀 아니지 않냐?”

재마의 ‘환자를 읽는 한의사’ 채널이 인기를 얻자 채널의 아이디어를 도용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한방병원마다 결연을 맺은 요양원이나 소규모 병원과 연계를 맺어 진료 봉사를 진행하기도 하는 건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너튜브 영상을 곧장 제작한다는 건 심상치 않은 상황이었다.

“나야 모르지 뭐. 우리야 ‘환자를 읽는 한의사’ 채널에 살짝 발 얹고 있는 정도인데 대형 병원 예비 사위 상대로 바른 소리 할 수 있냐.”

“그렇긴 하지만…… 정우도 좀 그렇네.”

“야, 정우 상황 되어 봐라. 부산에서 서울 주말에 왔다 갔다 하려면 서울로 올라오는 게 얼마나 간절하겠냐. 간이라도 빼줄 기세일걸?”

수완은 자신들과 함께하자고 할 때는 장거리로 다니는 것은 무리라고 하고서 쏙 빠져 정한 한방병원 쪽으로 붙었다는 정우의 상황이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잠자코 지켜보자. 또 알아? 정한 한방병원에서 아무리 따라 해도 ‘환자를 읽는 한의사’ 채널 못 따라올지?”

정수는 뚜껑은 열어봐야 한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 * *

3층 어르신들이 간식을 드신다는 세 시 반.

3층 어르신들 진료를 마치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갖고 1층 임시 진료실에서 어르신들의 진료를 보고 있던 재마의 마음이 급했다.

“나 3층 좀 다녀올게.”

“또 다녀오려고?”

“응. 지순정 어르신 뵈러 가야 해.”

“그래. 뭐, 네가 그렇다는데.”

자리를 비우겠다고 양해를 구하는 재마의 말에 정수도 수완도 말릴 수 없었다.

“잘 부탁한다.”

두 동기에게 다른 어르신들 진료를 부탁한다는 듯,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재마는 강산에게 눈짓을 했다.

함께 3층으로 이동하자는 뜻이었다.

강산은 재마와 함께 3층 지순정 어르신이 계시는 병실로 들어갔다.

“아, 이 원장님 오셨네. 원장님 지순정 어르신은 아직 간식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재마가 간식 시간에 맞춰 다시 올라오겠다고 당부를 한 탓인지 다른 어르신들은 간식을 드시고 계셨지만 지순정 어르신만 드시지 못하고 계셨다.

지순정 어르신은 반쯤 올려진 침대에 몸을 기대고 앉으시고는 군침이 도는지 침만 흘리고 계셨다.

“어르신. 시장하신가 봐요. 와, 잣죽이네요.”

재마는 다른 어르신들이 드시고 계시는 모습을 보고 부럽다는 듯 군침만 흘리시는 지순정 어르신의 입가를 손수건으로 일단 닦아 드렸다.

토요일 오후 어르신들을 위한 간식은 잣죽이었다.

“평소에 당뇨가 있으신 분들을 위한 식단이 따로 있기는 하지만, 오늘은 잣죽이라 당뇨가 있으셔도 드실 수 있어서 준비했습니다.”

진정준은 평소에 당뇨가 있는 어르신들을 위한 식단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듯 설명을 덧붙였다.

“네. 당뇨에 잣죽이 좋죠. 어르신 제가 천천히 먹여 드릴게요. 드셔 보시겠어요?”

재마의 물음에 지순정 어르신은 고개를 거칠게 끄덕이셨다.

애타도록 기다리셨던 모양이었다.

재마는 수저로 잣죽을 떠 지순정 어르신의 입에 조심스럽게 넣어드렸다.

입을 벌린 어르신은 순식간에 수저에 담긴 잣죽을 꿀떡 넘기고는 또다시 입을 벌리셨다.

어린 아기가 이유식을 할 때, 입에 맞는 음식을 받아먹듯 어르신도 입맛에 맞으시는지 드리는 숟가락마다 꿀떡꿀떡 넘기셨다.

“어르신, 천천히 드세요. 유동식이라도 씹어보시겠어요?”

담낭과 담도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급하게 드실 경우에 체기가 올라올 수 있으니 재마는 어르신에게 천천히 드시라 말씀을 드렸다.

하지만 아이로 변해 버린 어르신이 천천히 드시라는 권유는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또 줘. 또. 또.”

“어르신 이제 마지막 수저예요.”

“또! 또오!”

지순정 어르신은 오전에 진료를 보실 때만 해도 오래간만에 보는 낯선 재마에게 방긋방긋 미소를 지으셨지만, 잣죽을 다 먹었다는 재마의 한마디에 화를 내기 시작했다.

“또, 또! 나 또 줘어!!!”

“원장님, 일어서서 뒤로 오시겠어요?”

이런 상황이 낯설지 않은지 진정준은 재마를 막아섰다.

“어르신, 잣죽이 입맛에 맞으셨나 보네요. 근데 오늘 많이 드셨어요. 더 많이 드셨다가 배 아야, 하면 어떡합니까. 우리 저녁에 또 맛있는 거 먹어요. 네?”

어린아이로 변해 버린 지순정 어르신과 대화가 될 리가 없었지만 진정준은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했다.

“싫어. 싫다니까.”

“원장님, 식사하시는 것 보셨으니까 이제 되셨죠? 이제 나가 보실까요? 어르신은 좀 진정하셔야 할 것 같은데.”

“그래도 조금 더 지켜보는 것이…….”

“원장님이 병실에 계시는 것이 어르신이 진정하시는 데에는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요.”

복지사인 정준의 말을 무시할 수 없는 재마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지켜봐야 어르신이 소화를 잘 시키시는지 확인할 수 있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럼 병실에 나가서 밖에서 조금만 기다려 보겠습니다.”

“네? 그래도 저렇게 잘 드셨는데요.”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15분 정도만 지켜보면 됩니다.”

재마는 그냥 갈 수 없다는 듯 진정준에게 이야기했다.

“그럼, 그러시죠.”

정준은 재마를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더 줘, 잣죽. 더. 더어.”

잣죽을 더 달라고 외치던 지순정 어르신의 안색이 나빠진 것도 그때였다.

“욱. 욱. 우웩.”

잣죽을 더 찾던 지순정 어르신은 갑자기 무엇인가 차올라 오는지 욱욱 소리를 내며 구역질을 시작했다.

“어르신! 어르신!”

재마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준은 놀랐는지 병실로 뛰어 들어가 준비되어 있는 비닐봉지를 꺼내 지순정 어르신의 입가에 가져갔다.

“어, 어? 이게 무슨 일이야.”

함께 있던 강산도 놀란 나머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강산, 내가 아까 영상 찍어두라고 했지.”

“아, 알았어.”

재마는 강산에게 영상을 찍으라고 당부한 후 진정준 옆으로 다가가 지순정 어르신의 기도를 확보하기 위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평소에 어르신 식사 담당을 하는 직원이 어떤 분입니까? 그분부터 찾아오세요.”

“네?”

“어르신이 이런 상황이 오늘 하루만 있었을 리가 없어요. 직원분들 찾아오세요.”

다급하게 말을 하는 재마의 말에 진정준은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급하게 병실을 빠져나갔다.

“영상으로 잘 남기고 있어?”

“어. 잘 나오고 있어.”

“어르신. 조금만 참으세요. 진통제 놔드릴게요.”

토기가 끝나고도 통증이 가시지 않는지 제 가슴을 주먹으로 치는 지순정 어르신의 여린 손목을 재마가 쥐며 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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