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자를 읽는 한의사-47화 (47/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47화

“엄니, 멀어도 여기까지 오기를 잘했지?”

태천이 어머니의 눈을 마주치고 차근차근 이야기를 하자 간난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천은 어머니가 말을 다 하지 않아도 지금 얼마나 안심을 하고 있는지, 얼마나 기쁜지 알 수 있었다.

더불어 표현은 안 했지만 아들인 자신에게도,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읽은 것 같은 한의사 재마에게도 고마워하고 있었다.

“원장님한테 고맙다는 말 하고 싶다고?”

간난은 자신의 뜻을 알아차린 아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있다가 내가 전해줄게. 걱정을 하덜 말어. 엄니는 치료만 잘 받으면 돼.”

“멀리서 오셨는데 대기도 길었죠. 고생하셨어요. 진료는 잘 받으셨어요?”

“그럼요. 잘 받았어요.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지난번에 오셨을 때 멀리서 오셔서 의아했는데, 어머니 모시고 오시려고 그랬나 봐요.”

정 실장은 진료실 밖으로 노모를 부축해서 나오는 태천의 반대편에 서서 간난은 부축했다.

고령의 노모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아들인 태천이 걱정을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모예. 거리도 멀고, 엄니 연세도 있는데 무턱대고 올 수도 없고. 너튜브보다가 딱 이분이다. 이분이면 우리 엄니가 말을 못 해도 싹 들여다보겠구나. 싶어서 미리 왔었습니다. 근데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더 좋네요. 명의십니다. 명의.”

태천은 자신이 너튜브를 보면서 우연히 발견한 ‘환자를 읽는 한의사’인 재마를 먼 길을 찾아온 것이 하나도 고생스럽지 않은 얼굴이었다.

엄지를 치켜들며 대기하는 환자들이 들릴 정도로 재마를 칭찬했다.

“다행이에요. 처치실로 모실게요.”

“엄니, 이쪽 처치실이 구들장이 있어요. 엄니도 구들장은 오래간만에 볼 겁니더. 선생님, 오늘도 뜨끈하죠?”

“네. 불 들여놨으니, 따뜻할 거예요.”

처치실 1도 미리 체험해 본 아들 태천은 노모를 모시고 처치실 1로 들어갔다.

오늘도 바닥이 따뜻한지 물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보기 드문 구들장을 사용하는 처치실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진 간난은 처치실 문에 들어서자마자 따뜻하다는 듯 주저앉아 손바닥으로 방바닥이 따뜻해 좋다는 표현을 했다.

“내가 엄니가 이런 거 좋아할 줄 알았지. 잘 됐어요. 원장님이 엄니 상태도 싹 봐주셨으니 치료 받고 약도 지어가고. 이제 엄니는 아픈 거 걱정 안 해도 돼.”

퇴행성 관절염보다 류마티스 관절염이 문제라는 뜻밖의 결과를 받은 태천이었지만, 이제 걱정은 내려놓기로 했다.

이제는 명의 한의원 원장인 재마를 믿고, 그의 처방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꼭 맞기를 바랄 뿐이었다.

간난은 아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재차 끄덕였다.

정 실장이 노모를 모시는 효자인 태천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다시 대기실로 나왔을 때, 낯선 환자가 들어와 있었다.

“실례합니다.”

“네. 처음 오셨죠? 저희가 지금 대기 환자가 많아서 대기시간이 긴데…….”

지영이 명의 한의원 안으로 들어와 직원을 찾았다.

문화재 관리부서에 있는 지영은 명의 한의원 안으로 들어오자 눈이 휘둥그레져 어디에다 눈을 둘지 몰랐다.

고택에서 진료를 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명의 한의원 안쪽은 200년 가까이 되었다는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깔끔하게 관리가 되고 있었다.

“아, 전 진료 보러 온 건 아니고요. 시청에서 나왔습니다.”

“시청에서요?”

지영은 자신의 명함을 꺼내 정 실장에게 건넸다.

구청이나 보건소에서 종종 관할 구역의 한의원들을 관리하기 위해 찾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시청 직원이 온 적은 없었다.

명함을 읽은 정 실장은 잠시 흠칫했던 마음을 내려두었다.

“문화재 관리를 위해서 왔는데, 혹시 원장님을 뵐 수 있을까요?”

“아, 지금 진료시간이고 환자들이 많아서 당장은 힘드실 것 같기는 한데…….”

정 실장은 지영이 보다시피 대기실을 가득 채우다 못해 담장 밖까지 대기 환자가 있는 상황에 난감한 얼굴을 했다.

아무리 시청에서 직원이 나왔다고 해도 오랜 시간을 기다려 온 환자들에게 더 이상의 기다림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아…… 대기 환자가 많군요.”

“원장님께는 제가 잘 전해드리겠습니다.”

정 실장은 재마를 만나러 직접 찾아온 지영에게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재마에게 전달하면, 재마가 직접 지영에게 연락을 할 것이라는 뜻이었다.

“부탁드릴게요. 그럼 제가 한의원 건물 사진 좀 몇 장 찍을 수 있을까요? 서울에 이렇게 잘 남아 있는 고택이 몇 채 없어서요.”

지영은 명의 한의원 원장을 만나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문화재로 지정될 만한 고택을 그냥 지나쳐 갈 수는 없었다.

사진으로라도 남겨 가는 것이 아쉬움을 달래는 방법 같았다.

“네. 그렇게 하세요. 혹시 물어보실 게 있으면 무엇이든 물어보시고요.”

정 실장은 아쉬워하는 얼굴의 지영에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다는 듯, 빙긋 웃었다.

서울에서 할머니 댁에 온 듯 정감가는 느낌을 받은 지영은 카메라를 켜서 이곳저곳 찍기 시작했다.

나름 한의원으로 이용하기 편하도록 공사가 되어 있는 곳들도 있지만 외관은 거의 200년 전 건축양식이 남아 있었다.

특히 처치실 1, 2 그리고 탕재실로 사용하고 있는 방까지 누마루가 있어 지금은 한의원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본래 건물을 지을 때 가옥으로 지었다면 한적하게 그곳에 앉아 앞마당을 내려다볼 수 있었을 것이다.

지영이 문화재 관리부서에 있으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2022년 현실에서 고택이나 문화재를 찾아오면 잠시나마 과거로 돌아가는 기분이 드는 상상을 하고는 했다.

특히나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고택에 와서 누마루에 앉아 마당을 바라보니 평소 일을 할 때와는 또 다른 상상에 빠졌다.

가옥으로 지었지만, 점점 주민들을 위한 한의원으로 그 활용이 변경된 명의 한의원.

오랜 시간 이 자리에 있으면서 과거부터 이 고택을 지나쳤을 환자들을 생각하니, 이곳은 한마디로 역사나 다름없었다.

아직 명의 한의원의 원장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를 설득해서 문화재 지정을 이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 *

“윤 비서. 지난주에 내가 모니터링하라는 건 어떻게 됐어?”

박상도는 외부 일정을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오며 인사를 건네는 윤 비서에게 물었다.

“아…….”

윤 비서는 살짝 난감한 얼굴을 했다.

“아직이야?”

“아닙니다. 지금 보고드릴까요?”

“들어와.”

윤 비서는 자신이 준비해 둔 서류를 들고 박상도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재킷을 벗어 놓은 박상도는 빡빡한 일정이 피곤한지 소파 상석에 앉았다.

자신은 조금 쉬고, 윤 비서에게 보고를 듣겠다는 뜻이었다.

윤 비서는 준비한 서류의 내용을 요약해 보고를 시작했다.

“일단 해인동에 있는 명의 한의원이라는 곳은 5대째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 그럼 지금 대표 원장은.”

“대표 원장이랄 것도 없이 작은 한의원이라 한 명뿐인 것 같습니다.”

윤 비서는 솔직히 박상도가 왜 명의 한의원에 대한 모니터링과 조사를 맡겼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조사를 해볼수록 그냥 한 자리에서 오랫동안 진료를 해왔다는 것밖에는 특징이 없었다.

가업을 이어온 특징을 비교해 본다면 정한 한방병원이 4대째 이어오고 있지만 사업수완이 좋아 그런 작은 한의원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었다.

“또.”

“다음은…… 진료 과목인데요. 아무래도 정한 한방병원은 척추 전문, 교통사고 전문 한방병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전문적인 치료를 받기 위해 찾아오는 환자들이 있는 반면, 명의 한방병원에는 자잘한 잔병을 고치기 위해 찾아오는 환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병에 자잘하고 큰 병이 어디 있나? 한방병원 비서실에 있는 비서가 할 말이야?”

눈을 감고 윤 비서의 말을 듣고 있던 박상도가 발끈했다.

“죄송합니다.”

“근데 왜 그 작은 한의원의 너튜브 조회 수가 급격히 늘고, 댓글 수는 정한 한방병원 댓글 수를 능가하고 있다고 보는가?”

사실이었다.

정한 한방병원은 조회 수나 구독자 수는 명의 한의원에 비해 눈에 띄게 많은 수였지만 댓글 수는 확연히 적었다.

“그…… 그건.”

윤 비서는 잠깐 뜸을 들였다.

“명의 한의원은 한의원에서 얻고자 하는 정보에 대한 댓글보다는 사적인 댓글이 많다고 봅니다.”

“사적인 댓글?”

“네. 병원이라는 전문성을 갖고 있는 채널에 바라는 의학적 전문지식에 대한 댓글이 아니고 과거의 추억, 향수. 그리고 고택에 대한 호기심에 대한 댓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음…….”

자신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이는 상도의 모습에 윤 비서는 말을 덧붙였다.

“지금처럼 정한 한방병원은 전문성을 갖춘 채널로 쭉 밀고 나간다면 환자들이나 구독자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병원 채널이니 신뢰감 또한 중요했다.

“알았어. 수고했네.”

정한 한방병원의 대표인 상도가 윤 비서의 보고가 만족스러운지 알 수는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윤 비서에게 수고했다 말을 전했다.

상도는 쉬던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자신의 책상 앞으로 향했고, 그대로 서 있는 윤 비서에게 물었다.

“더 할 말 있나?”

“아닙니다.”

윤 비서는 급히 인사를 하고 대표실을 빠져나왔다.

윤 비서는 자리로 돌아와 자신의 모니터에 떠 있는 사내 채팅창을 확인했다.

-윤 비서. 대표님 들어오셨다며. 명의 한의원 보고는 내가 말 한대로만 하면 돼.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사소한 Vlog 정도만 하는 채널이라고. 알았지?

지난번 미친년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때는 언제고, 약혼자인 최중기와 머리를 맞대고 무슨 일을 꾸민 건지 대표인 박상도에게 보고할 때, 정한 한방병원의 전문성을 꼭 강조하라고 당부했던 박연아였다.

박연아의 말을 굳이 보고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아까 받았던 박상도의 질문에서 윤 비서는 두 채널을 비교해 댓글 수가 저조한 정한 한방병원의 상황을 대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인데…… 작은아버지가 명의 한의원 이재마에 대해서 알아보라고 하면 꼭 나한테 먼저 알려줘. 알았지?

“이재마는 또 누군데. 하여간 이 집안사람들이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네. 그냥 저들끼리 얼굴 맞대고 말하면 안 되나.”

한의사가 되어 가업을 이어오며 한의원 그 이상의 전문 한방병원의 대표가 된 박상도와 박상도에게 밀린 그의 형. 그리고 호시탐탐 자리를 노리는 대표의 조카까지.

괜히 비서인 윤 비서만 중간에 끼어 괴로웠다.

자리에 털썩 앉은 윤 비서는 구독을 눌러 놓은 명의 한의원의 새 영상이 올라왔다는 알람을 확인했다.

지금까지 세 개의 영상이 올라온 ‘환자를 읽는 한의사’ 채널.

윤 비서는 자리에 앉자마자 알람이 울린 채널을 들어가 새로운 영상을 확인했다.

박상도가 보고를 하라고 해서 구독하기 시작한 채널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힐링이 되는 기분의 영상들을 보고 나니 새로운 영상도 기대가 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