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45화
똑똑.
9시에 진료를 시작해, 점심시간을 코앞에 둔 시간까지 화장실은커녕 진료실과 처치실 사이만 오갈 수밖에 없었던 재마는 기지개를 쭉 켰다.
“원장님, 윤석원 환자입니다.”
“네. 들어오라고 하세요.”
차트를 확인하니 신규 환자는 아니었지만, 꽤 오래전에 왔던 환자라는 걸 파악한 재마는 기지개를 켜고 옷매무새를 확인했다.
“아유, 원장님 이제는 환자가 엄청 많네요?”
낯선 이름이었지만, 진료실 문을 통해 들어오는 얼굴은 낯익은 반가운 얼굴이었다.
명의 한의원 바로 앞 점포에서 과일 가게를 하는 윤 사장이었다.
“윤 사장님 오셨습니까.”
진료실로 들어오는 윤 사장의 얼굴을 보자 재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겼다.
예전에는 지금보다 적은 환자 수 명의 한의원과 마주 보고 있는 윤 사장의 과일 가게 앞을 지나다닐 여유가 있었지만, 요즘은 정신이 없는 재마였다.
“하하, 환자 수가 좀 많아지기는 했죠. 대기 오래 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요. 뭐. 대기 환자도 늘고, 너튜브인가 채널 시작하시면서 다른 동네에서도 환자들이 찾아온다면서요?”
“부끄럽습니다. 혹시 영업에 방해가 되거나 하시지는 않나요?”
재마는 갑자기 늘어버린 환자 수에 바빠 동네 주민들이 어떻게 느끼는지 확인할 새가 없었다.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홍보 효과가 좋은 것인지 처음에는 한두 명 늘어 날 것이라 생각했던 신규 환자 수가 급격히 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괜찮습니다. 개발 예정지라고 해서 손님도 줄고 했었지만 요새 다시 활기를 띠는 기분이랄까요. 그래도 가까운데 실력 좋으신 원장님이 계시니까 마음 놓고 있습니다.”
“오늘은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습니까?”
윤 사장이 들어 오기 전 빠르게 확인한 그의 과거의 차트로 봐서는 어깨 결림 정도의 문제로 한의원을 몇 번 찾아온 것 같았다.
재마는 자신이 확인하지 않아도, 윤 사장의 생활로 봐서는 관절을 과도하게 사용해 통증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50대 후반인 윤 사장은 나이대에 비해 운동도 하고 몸에 안 좋은 것은 하지 않으며 건강관리를 잘하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나이는 속이지 못 하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피로가 누적되고 명절 전후 무리를 하면 신호가 오던 몸이 이제는 쉽게 회복되지 않는 것 같았다.
20년 넘게 과일 가게를 해오며 매일 몸을 사용하니 이제 슬슬 한두 군데 고장이 나는 느낌이었다.
“이제 나이는 못 속이는 것 같아요. 관절 여기저기가 쑤시네요.”
“아…….”
윤 사장은 관절 여기저기가 쑤신다며 어깨와 무릎을 가리켰다.
무거운 과일을 가게 안팎으로 나르고, 앉았다 일어나며 무릎과 허리를 과도한 사용이 관절에 무리를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이 이야기가 나오자 재마는 얕은 탄식을 내뱉을 뿐이었다.
재마는 윤 사장의 왼쪽 손목을 짚고 진맥을 짚는 동시에 그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동공을 인식합니다.]
이제는 익숙한 그의 재능으로 환자의 상태를 살폈다.
-이름 : 윤석원
나이 : 57세
관절과 뼈 주변 조직의 기능적 퇴화, 변형.
2형 당뇨.
윤 사장이 말했던 것처럼, 나이는 속이지 못한다는 말에 맞게 그의 관절 이곳저곳에 검붉은 섬광이 나타나고 있었다.
특히 무릎과 허리, 손목은 그의 관절을 찌르는 듯한 섬광이 나타났다.
재마가 예상했던 것처럼 평소 그가 많이 사용하는 부위 같았다.
“몸을 많이 사용하시나 봐요.”
“허허. 그렇죠, 뭐. 제가 과일 장사만 25년은 족히 했어요. 요즘은 그래도 덜 하는데, 더 젊을 때는 1톤 트럭 하나 몰고 청과물 시장에 새벽마다 과일 사러 가서 한 짐 가득 싣고, 내리고.”
윤 사장은 오래전 몸이 부서질 듯 힘들었지만 젊은 시절을 그리는 듯 아련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점포를 내기 전에는 1톤 트럭에 과일을 싣고 이 동네 저 동네 다니며 더 바쁘고, 다 팔리지 않으면 고민거리가 많았지만 지금보다 몸은 훨씬 튼튼했었다.
다 팔리지 않으면 해가 지더라도 자리를 옮겨 그날의 몫은 다 팔아야 손해를 보지 않았다.
그렇게 고생을 5년 정도 한 후에 해인동에 번듯한 점포를 얻고 자리를 잡은 윤 사장이었다.
이제는 이곳저곳 떠돌아다니지도, 새벽같이 청과물 시장에 가더라도 구매한 과일을 직접 트럭에 싣는 일도 드물었다.
나이를 먹으며 자신의 몸 관리를 하지 않으면 장사를 오래 하지 못하기에 그 정도는 사람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젊은 날의 몸 같지 않은, 상할 대로 상해 버린 무릎과 어깨를 생각하니 서글플 뿐이었다.
“그때는 새벽같이 일어나서 몸이 풀리기도 전에 무거운 과일들 올리고 내렸는데 이제는 그 정도로 하지 않아도 삭신이 쑤셔서…….”
“아무래도 젊을 때 관절을 무리하게 사용하신 것이 지금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자신도 한의원을 찾기 전부터 예상하고 있었지만 재마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제 쓸 만큼 썼지 뭐. 그렇죠?”
윤 사장은 재마에게 자신의 상태를 되물으며 한낱 희망이라도 걸듯이 물었다.
“그럼요. 관절염이라는 것이 퇴행성이라 많이 사용하셔서 나타나는 병이기도 하지만 식단 관리와 운동을 하시면 충분히 극복 가능하십니다. 물론 한방으로 치료를 받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만 제가 최선을 다해 도와드릴 거고요.”
관절염이 4기 정도 진행되고 뼈의 변화가 나타났다면 한의학적인 방법으로는 치료가 한계가 있었다.
수술을 통해 치료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윤 사장은 아직까지 수술적인 치료는 필요해 보이지 않았다.
보존적인 치료를 위해 대퇴사두근 등 무릎 주변 강화와 통증, 염증 치료를 하는 것이 재마가 한의사로서 그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침이랑 부항으로 치료하시면서 자하거 약침 방법을 쓰신다면 연골을 재생시키기는 힘들지만 더 이상 퇴행성 변화를 진행되는 것은 막을 것입니다. 그리고 운동도 꾸준히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오래, 건강히 과일 가게 운영하실 수 있습니다.”
반평생 가까이 한 가지 길만 파 온 윤 사장에는 과일이 전부일 것이고, 그에게 자부심일 것이라는 걸 재마는 잘 알고 있었다.
과일 가게를 운영하며 몸이 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그 과일 가게를 운영하기 위해서라도 윤 사장은 오늘부터 새로운 습관을 들여야 했다.
“감사합니다.”
재마의 설명에 잘 알겠다는 듯 윤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의원을 들어오기 전, 이미 사용할 대로 사용해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어 수술밖에 답이 없다고 하면 어쩌나 하고 내심 걱정했던 그였다.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청과물 시장과 해인동 시장 골목을 오가던 그에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수술 후, 재활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 두려운 것이었다.
“다만…….”
재마는 자신이 조금 전 읽은 윤 사장의 상태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진료실로 들어와 당뇨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 보니, 자신이 당뇨병 초기 단계라는 것을 아직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제2형 당뇨은 서서히 진행되는 편이지만, 염증들이 피를 타고 다니며 관절 부위를 공격하기도 하고, 식습관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서서히 진행된다는 보장도 할 수 없었다.
아직 약을 쓸 정도의 단계가 아니라도 윤 사장에게 확실하게 알리는 것이 당연했다.
“가족력으로 당뇨병을 앓고 있는 분이 계신가요?”
“당뇨요?”
윤 사장은 관절 치료를 받기 위해 한의원을 찾았는데, 당뇨에 대해 물으니 헛웃음을 지었다.
딱히 예상을 못 했다는 얼굴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다 당뇨병을 앓다가 돌아가시기는 했는데…….”
“심각한 상태는 아니지만 제2형 당뇨 초기 단계라 조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부모님이 당뇨병으로 하도 고생하고 돌아가셔서 식습관에 꽤나 신경 쓰고 있습니다. 음주도 안 하고요.”
“보통 전 세대에 당뇨병을 겪은 분이 계시면, 당뇨병을 예방하기 위해 노력은 하시지만, 유전병이라는 것이 마음 같지는 않죠.”
제1형 당뇨처럼 급격하게 나타나는 증상은 없지만 서서히 진행되는 제2형 당뇨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건강을 해친 뒤에야 발견되기 십상이었다.
보통 유전적인 경향이 강해 가족력이 있다면 눈여겨보며 관찰하는 것이 예방하는 데 큰 효과가 있었다.
다는 알 수 없지만 매일 새벽같이 시장 골목에서 가장 일찍 문을 열고, 과일을 차려 놓는 윤 사장은 사는 것이 바빠 가족력이 있으면서도 당뇨병에 대한 걱정은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제가 당뇨라고요? 허.”
퇴행성 관절염은 오랫동안 일을 해오고 자신이 혹사시켰던 젊은 날을 생각하며 서글펐지만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지만, 말년에 당뇨로 고생을 하시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네. 가족력이 있으시니 꾸준히 관찰을 하시며 혈당 관리하시고 식습관을 조절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허.”
안색이 순식간에 나빠진 걸 알아차린 재마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그의 손을 다독였다.
당뇨를 앓는 가족이 있었다면 그 고통을 알기에 누구라도 지레 겁을 먹을 것이었다.
“이제 세상도 좋아져 약도 좋고, 말씀하신 것처럼 병원도 가까우시고 관리만 잘하시면 됩니다.”
“그럴까요? 원장님?”
“네. 제가 정 실장님 통해서 초기 당뇨를 예방할 수 있는 식습관이랑 운동법에 대해 알려드릴 테니까 그것만 잘 따라오시면 됩니다.”
“원장님만 믿겠습니다.”
윤 사장은 자신을 다독이는 재마의 손을 꽉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 사장이 침과 부항 치료를 받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을 빠져나갔다.
그의 통증 있는 무릎이, 그리고 과거 부모님을 괴롭혔던 해로운 병이 자신에게도 다가왔다는 것에 대한 공포심에 그의 발걸음은 진료실을 들어올 때보다도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재마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환자와의 신뢰도를 쌓아라.]
그때 재마의 눈앞으로 미션 메시지가 떠올랐다.
환자와의 신뢰도라는 것이 자신의 의사로서 능력을 쌓는 것보다도 어렵다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신뢰라는 것은 측정을 하기도 어렵고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도 없었다.
더구나 환자와 의사 사이의 신뢰?
홍보를 통해 환자를 모으는 것은 쉽더라도 모든 환자들에게 신뢰를 주는 한의사가 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 재마의 생각이었다.
재마는 생각지도 못한 재능을 갖게 되어 눈에 띄는 성장을 하고 있었지만, 당장 지척에 있는 주민인 윤 사장을 진료하며 그에게 얼마나 신뢰를 줬을지 알 수 없었다.
“후. 어렵구만. 신뢰를 쌓으라니.”
지금까지 받은 미션 중 가장 무겁고 어려운 미션이라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재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전 무거운 마음의 짐을 한 짐 어깨에 지고 처치실로 이동한 윤석원을 치료하기 위해 움직였다.
환자의 무거운 마음을 함께 짊어지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이라는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