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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읽는 한의사-44화 (44/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44화

정한 한방 병원.

정한 한방병원 박상도 대표는 중국 일정을 마치고 두 달 만에 첫 출근을 했다.

설립자의 아들이자 대표원장을 맡고 있는 박상도는 이제 한의사의 모습보다 중국까지 대한민국의 한방기술을 전수하는 사업가의 모습이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들이 자신을 반겨주는 모습을 보니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중국 진출은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었지만, 고국을 떠나 타국에 몇 달씩 머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표님. 홍보팀에서 결재 요청이 들어와서요.”

“그래?”

윤 비서는 상도가 오래간만에 출근하는 시간에 맞춰 올려진 결재 서류를 설명했다.

상도는 책상 위의 결재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요즘 홍보팀에서 너튜브 영상에 기를 쓰고 덤비는구만.”

확인하지 않아도 뻔했다.

중국 일정 중에도 가장 많이 받는 메일이 홍보팀의 메일이었다.

“아무래도 너튜브 영향력을 무시 못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박 팀장이 의욕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의욕은 무슨 너튜브 핑계로 회삿돈이나 쓰는 거지. 이번에는 또 뭘 사겠다는 거야?”

형님의 딸인 박연아를 어쩔 수 없이 홍보팀에 앉힌 상도는 못마땅한 얼굴로 결재 서류를 펼쳤다.

시대에 발맞춰 너튜브 채널을 개설해야 한다며 회사에 기웃거리며 홍보팀의 자리를 노리길래 자리 하나 마련을 하겠다고 하니, 평사원과는 차별을 두고 팀장 자리를 떡하고 차지했다.

어렸을 때부터 제 밥그릇은 남들보다 더 챙기는 모양새였는데, 성인이 되어서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제 능력보다도 더 큰 그릇을 바라는 것이 눈에 보였지만, 조카이니 눈감고 넘겼다.

직함 하나 달아 주는 것쯤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카메라가 견적이 뭐 몇백이 나와? 거기에다 양복에 구두에.”

“…….”

결재 서류를 확인하는 박상도의 얼굴이 점점 구겨지자, 박연아의 편을 들어줄 수 없는 윤 비서는 시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 지 남편감 출연시키면서 출연료를 따로 받아 챙겨 먹고. 이거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거야? 이거 도둑이 따로 없구만.”

조카에게 도둑년이라는 말은 쓸 수는 없었지만, 결재 서류에 적혀진 예산을 보면 상스러운 말이 절로 나왔다.

곧 결혼을 한다면서 데리고 온 녀석을 너튜브에 출연시키는 것도 다 꿍꿍이가 있었다.

너튜브 제작 총괄을 맡고 있는 박연아가 챙길 돈은 챙기고, 또 따로 출연자 몫의 돈까지 챙기겠다는 뜻이었다.

‘회삿돈이 제 돈인 줄 알아도 조카라고 데리고 있으면서……’

윤 비서는 속으로는 혀끝을 내 찼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 결재가 떨어지지 않으면 박연아가 비서실로 쳐들어와 난리 칠 것이다. 그럴 바에는 잠시 그녀의 편을 들어주는 편이 나았다.

“구독자 수도 늘고 있고, 반응도 좋으니까요. 지난번에 구독자 이벤트를 할 때도 2만 명 이상 몰렸습니다.”

“돈을 이렇게 처바르지 않아도 다들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한방병원에서는 뭐라고 하나, 내가 아픈 곳에 대한 정보가 있나 하고 구독하고 찾아보는 거 아니야?”

“그렇긴 하지만 이왕이면…… 보기 좋게…….”

윤 비서는 어쩔 수 없이 박연아의 편을 들면서도 박상도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목소리를 낮췄다.

윤 비서는 그래도 너튜브 성적이 꽤 잘 나오고 있는 영상 하나를 태블릿에 띄워 박상도에게 건넸다.

화면에는 박연아의 예비남편인 최중기의 모습이 띄워져 있었다.

-교통사고로 한방 병원 입원시…….

대형 한방병원에서 빠뜨릴 수 없는 환자는 교통사고 입원 환자였다.

보험사와 합의를 보기 위해서는 정해진 일정만큼 입원을 시켜야 했는데, 그 수가가 꽤나 높았다.

종종 나이롱 환자가 들어와 골치가 아플 때가 있었지만, 적절한 치료법을 제시하고 정해진 일정만 잘 맞춘다면 병원으로서는 해가 될 일은 없었다.

더구나 정한 한방병원은 교통사고 입원 환자를 받기 시작하면서 더욱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었다.

최중기는 교통사고 발생 시, 입원 절차와 정한 한방병원 만의 치료방법, 호텔 버금가는 입원실과 서비스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하고 있었다.

댓글에는 정한 한방병원의 서비스 품질에 대한 호평이 쏟아졌고, 정한 한방병원을 와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꼭 한번 방문해 보고 싶다는 댓글까지 있었다.

조카인 박연아가 겉모습만 번지르르하지 한의대학 성적은 그의 기준에 내키지 않는 녀석을 데려왔을 때는 몇 해 데리고 있다가 맘에 들지 않으면 정한 한방병원에서 내칠 생각부터 했지만, 그래도 쓸모가 있어 보였다.

영상을 확인한 박상도는 결재 서류에 사인을 하려고 손을 뻗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구독자 수도 잘 나오고 반응도 나쁘지 않으니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윤 비서는 자신의 할 일은 이 정도면 되었다는 듯, 상도에게 건넸던 태블릿을 다시 가져가려고 손을 뻗었다.

“잠깐.”

“네?”

“태블릿 잠깐 둬보라고.”

결재 서류에 사인을 하려던 상도는 손을 멈칫했다.

윤 비서가 쥐었던 태블릿을 뺏어 든 상도는 최중기의 영상 다음 차례로 떠 있는 영상을 재생시켰다.

“환자를 읽는 한의사?”

상도의 눈썹이 휘어졌다.

무엇인가 맘에 들지 않을 때 나타나는 표정이었다.

누구보다도 상도의 행동 작은 것 하나에도 신경을 쓰고 있는 윤 비서는 곧장 입을 열었다.

“대표님, 신경 쓰실 정도의 채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너튜브 특성상 알고리즘이…….”

“조용.”

상도는 윤 비서의 입을 다물게 하고 재생 중인 영상을 계속 보고 있었다.

한참을 보던 상도는 윤 비서에게 물었다.

“윤 비서도 이 영상 확인했어?”

“네. 알고리즘에 떠서 보기는 했는데…….”

“보기는 했는데…….”

“일단 저희 한방병원과 결 자체가 다른 한의원이라서…….”

“결 자체가 다르다?”

윤 비서는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한 마디가 박상도의 기분을 좌우하는 것은 물론 박연아와 최중기의 목을 쥐고 흔드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에 신중히 입을 열었다.

“같은 서울에 있지만, 저희는 대형 한방병원이고 원장님이 확인하신 한의원은 동네 한의원이라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고 말을 하는 윤 비서의 대답과는 달리, 영상이 단 두 개만 올라왔을 뿐이지만 조회 수는 정한 한방병원 영상의 평균 조회 수를 금세 따라잡을 모양새였다.

“일단 아직 비교할 만한 수치 자체가 없으니 오늘은 이 정도로 넘어가고, 윤 비서는 계속 모니터링해. 이쪽 한의원에서 어떤 영상을 올리는지. 너튜브 성장 속도가 어떤지.”

“네?”

윤 비서는 동네 작은 한의원의 영상을 예의주시하라는 박상도의 말에 의아한 얼굴이었다.

“하라면 해. 다음 주에 보고서 올리고.”

“아, 네.”

하라면 하라는 박상도의 말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는 윤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응. 오빠. 결재 오늘 떨어졌어. 이따가 퇴근하고 백화점만 가면 돼. 지난번에 봤던 정장이랑 구두랑. 응.”

핑크색 에나멜 구두를 신은 연아는 책상 위에 발을 얹고 까딱이면서 전화 통화를 했다.

작은 아버지인 박상도에게 올렸던 결재 서류가 떨어지자 백화점을 갈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하루가 멀다고 가는 백화점이었지만, 정한 한방병원 법인카드를 들고 갈 때는 기분이 달랐다.

회장 딸은 아니지만, 회장 딸이 된 기분?

“응응. 이따 봐아.”

연아는 윤 비서가 있다는 것도 있고 콧노래를 부르며 약혼자와의 전화를 끊었다.

“박 팀장님?”

“네. 윤 비서. 또 할 말 있어요?”

낙하산으로 홍보팀 팀장 자리 하나 차지해 놓고는 마치 임원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는 게 눈꼴이 시리지만 윤 비서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정한 한방병원 대표원장인 박상도가 했던 이야기를 전달했다.

“대표님이 다른 채널 하나를 모니터링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아무래도 모니터링은 제 일이지만 홍보팀에도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윤 비서가 윤 비서 일인 줄 잘 알면 알아서 하면 되지. 굳이 이야기를 왜 해요? 이상한 사람이야. 참.”

자신을 위해서 언질을 주는 것도 모르고 투덜대는 박연아를 보며 윤 비서는 혀끝을 내차고 싶었다.

“근데 그 채널이 뭔데요?”

박연아는 별로 관심 없었지만 묵묵히 서 있는 윤 비서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환자를 읽는 한의사’ 채널입니다.”

“환자를 읽어요? 딱 봐도 사기꾼 채널인 것 같은 데 우리 작은 아버지 취향이 특이하시네.”

박연아는 투덜거리면서 휴대전화를 들어 너튜브를 켰다.

“환…… 자를 읽…… 는 한의사. 어디 보자. 정한 한방병원이라는 타이틀이 있는 데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우리 채널 따라오겠어요?”

한 글자 한 글자 검색을 하는 박연아는 아무리 박상도가 모니터링하라고 해도 자신이 관리하는 채널을 따라올 채널이 없다는 자신만만한 목소리였다.

“여기 뭐야. 완전 한옥이네? 이거 완전 쇼하는 거 아니에요? 어디서 한옥 섭외해서?”

박연아는 섬네일을 보며 실소를 터뜨렸다.

자신까지 모니터링을 하기에는 너무 유치해 보이는 컨셉이었다.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200년 가까이 지키고 있는 한의원이라고 하네요. 대대로 이어온.”

“대대로 이어 온 한의원 하면 우리 한방 병원이죠. 여기는 동네 코딱지만 하네.”

연아는 200년이건 뭐건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재생시켰다.

나이가 지긋이 들어 보이는 편안한 목소리가 나레이션으로 입혀 있었다.

“완전 영감님이네.”

보나 마나 뻔한 영상일 텐데 도대체 언제까지 보라는 듯이 서 있을 생각인지 윤 비서가 홍보실을 떠날 생각을 안 하자, 박연아는 억지로 영상을 볼 수밖에 없었다.

200년이나 되었다는 한의원을 소개하는 영상은 꽤나 신박하기는 했다.

서울 하늘 아래 이렇게 오래된 한옥이 있는 것도, 실제로 그 안에서 사람이 살고 또 진료를 본다는 것도 특이했다.

“근데 목소리의 주인공이 원장이 아닌가 봐요?”

나레이션은 나이대가 높은 할아버지 목소리였는 데, 진료를 보는 한의사의 뒷모습은 젊은 원장이었다.

“이게 뭐야! 윤 비서. 이거 뭐예요? 이거 나한테 일부러 가지고 온 거야?”

200년이 된 한옥에서 진료를 보고 있다며 환자들을 하나하나 챙기는 젊은 원장의 뒷모습에서 고개를 돌려 얼굴이 보이자 박연아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신의 휴대전화를 집어 던졌다.

“무…… 무슨 소린지?”

“이 사람. 여기. 여기 이 인간. 이재마인 거 알고 나한테 가지고 온 거 아니에요?”

“네?”

윤 비서는 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됐어. 이제 봤으니까. 됐죠? 나가요. 이제.”

박연아는 윤 비서를 내쫓듯 몰아냈다.

윤 비서는 어이가 없다는 듯, 떠밀려 홍보실을 빠져나왔다.

“이…… 재마?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이기는 한데.”

윤 비서는 낯설지 않은 이름에 되뇌어 봤지만 곧장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유리 벽 안쪽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뭐라고 전화 통화를 하는 박연아를 보니, 미친년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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