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40화
“하이고. 구 원장님!”
명의 한의원의 문이 열리자마자 한의원이 울릴 정도로 진갑순의 목소리가 울렸다.
“누…… 누구?”
갑순을 처음 본 경옥은 정 실장을 향해 누구인지 묻는 표정을 지었다.
“명의 한의원 제일가는 구 원장님 팬이요.”
“팬요?”
“원장님, 왜 이렇게 야위셨어요. 그 동안 여행이 무척이나 고단하셨슈? 아이고, 그러니까 우리 나이에는 어디를 다니려고 해도 큰맘을 먹어야 한다니께.”
갑순은 오래간만에 만난 구 원장을 반기면서 그를 아래위로 스캔해 가며 잔뜩 야윈 모습에 혀끝을 끌끌 차냈다.
“그러게 말입니다. 한의원 떠나서 너무 열심히 여행을 다녔나.”
“잡수는 건 잘 잡숩고?”
“그럼요. 그럼요.”
“밥 잘 잡수는 게 제일 기본이니께. 요즘 저도 밥 잘 먹고, 잘 넘기고, 소화도 잘 시키고 있어요. 원장님 외손자 덕에.”
갑순은 조금 전까지 구 원장을 반겼던 마음을 내비치다가 이제는 재마를 바라보며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일편단심 구 원장을 외쳤던 그녀가 이제는 재마에게 마음이 넘어간 것이었다.
“다행입니다. 이 녀석 좀 쓸 만하죠?”
구 원장 또한 외손자인 재마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재마의 실력을 두 눈으로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없는 사이 명의 한의원을 맡아 이것저것 시작을 한 것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특히나 해인동에서 까다롭기로 제일가는 진갑순의 마음을 잡았으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다른 어르신들 건강도 괜찮으시고요?”
“우리 해인동 사람들 아프면 다 명의 한의원 오면 되는 디, 뭔 걱정이래유. 원장님은 이제 원장님 걱정만 하셔요.”
안부를 묻는 구 원장에게 손사래를 치는 진갑순이었다.
“진갑순 님, 이제 안쪽으로 들어가실까요?”
“네. 젊은 원장님. 구 원장님 오래간만에 한의원 오셨을 테니께 둘러보고 계셔요. 저는 들어가서 치료받고 나올게요.”
“네. 그러십쇼.”
정 실장의 안내에 되레 구 원장을 대접하는 듯한 말을 한 갑순은 진료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누가 보면 아버지가 주인이 아니고, 저 할머니가 주인인 줄 알겠어요.”
40년간 명의 한의원을 지켜온 아버지를 앞에 두고 주인행세를 하는 갑순의 모습이 떨떠름한 경옥이었다.
“주인은 무슨, 다 환자들이 있어야 한의원도 운영이 되는 거지. 명의 한의원은 지금까지 내가 주인인 적이 없었어.”
한평생 명의 한의원에 자신의 몸과 정신을 쏟았던 구 원장은 단 한 번도 주인인 적이 없다는 이야기에 경옥은 더 할 말이 없는지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구 원장다운 대답이었다.
경옥은 자신이 홀로 키운 아들인 재마가 자신의 아버지인 구 원장의 명의 한의원을 이어간다는 것이 이제야 실감이 났다.
어릴 때 자신이 뛰어놀았던 앞마당도, 놀이터처럼 숨바꼭질을 했던 탕제실도 모두 그대로였다.
한때는 가족보다도 한의원과 한의원을 찾는 환자들을 더 챙겼던 아버지가 그토록 미웠다.
하지만 이제 한없이 약해진 아버지를 더 이상 미워할 수 없는 경옥은 아련한 표정으로 한의원을 둘러보고 있는 구 원장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아버지. 같이 둘러봐요. 예전에 여기에 맷돌 있지 않았어요? 그건 이제 치우셨나 봐요?”
구 원장은 항상 혼자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딸과 자신의 뒤를 이어줄 든든한 손자가 있다는 생각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 *
“이 정도면 금방 정한 한방병원 너튜브 따라잡는 거 아니냐?”
“정한 한방병원을 따라잡겠다는 욕심으로 너튜브 하냐, 지금?”
진료가 끝나고 회의를 하자던 강산은 진료실로 들어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아직 영상이 하나밖에 올라가지 않았지만, 구독자 수가 500을 넘어섰고, 댓글도 200개 이상 달려 있었다.
조회수는 금새 2만을 찍었다.
첫 시작에 배부를 수는 없지만, 밀려드는 파도처럼 올라오는 영상들에 묻히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재마는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이 녀석 보게. 이왕이면 정한 한방병원은 이기고 봐야지. 명의 한의원 ‘환자를 읽는 한의사’ 채널에는 이 강PD가 있잖냐.”
“강PD?”
“영상 촬영해, 편집해, 업로드해. 그럼 PD지 아니야? 내 명함은 언제 파줄 건데?”
이제 막 시작하는 너튜브 채널에서 한 자리를 차지해 보고자 하는 강산의 표정은 결연해 보였다.
“다음 영상에 올라갈 ‘꿈속 요양원’ 영상은 요양원 측에서 보호자들에게 충분히 설명도 다 했고 허가도 떨어졌어.”
“다행이네.”
“그리고 요양원에서 보름에 한 번 봉사는 어떻게 되어 가냐고 물어보길래. 지난번에 모였던 녀석들에게 다시 한번 연락했고.”
“애들이 뭐래?”
“일단 부산에서 올라와야 되는 정수는 당장은 힘들어도 두 녀석은 하기로 했어. 좋은 일 하는 거 들어놓고 입 닦고 모른 체 할 수 없다고.”
강산이 동기들 중, 봉사 활동 이야기를 꺼내면 그래도 호의적일 것 같은 원석과 동엽에게 연락을 했다더니 고맙게도 함께 해줄 모양이었다.
“다음 주에 내가 애들 데리고 다녀올게.”
“네가 직접?”
“지난번에 먹었던 막국수도 먹고 싶고, 김 여사님도 보고 싶고 겸사겸사.”
역시 정에 약한 강산은 자신을 아들이라 생각하는 김 여사 생각에 더욱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너도 좀 쉬어야지. 평일에는 진료 보고 주말에 지방 출장까지 다녀올 수는 없잖냐.”
거기에다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까지.
재마는 강산이 없으면 이 일들을 어떻게 해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강산과 회의를 하는 사이, 어제오늘 들어 온 탕약을 탕약기에 달이고 있던 재마는 알람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나 탕제실 좀 다녀올게.”
“그래.”
탕제실로 가기 위해 문고리를 잡은 재마의 머릿속이 시원해지면서 보상 타임이라는 걸 알렸다.
[‘명의 한의원을 알려라.’ 미션 성공.]
[‘전임자의 인정을 받아라.’ 미션 성공.]
[보상스토어, 열려 있는 카드를 두 개 고르세요.]
‘오, 이번에 미션 성공을 두 가지나 시킨 거야?’
미션에 큰 의의를 두지 않고 제 할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인데 보상이 두 개나 주어졌다. 좋은 게 나올 것 같은 좋은 기분이 들었다.
더구나 지금까지는 두 장 중에 한장을 골라야 하는 50:50 확률이었다면 이번에는 두 장을 다 골라 100% 확률이었다.
‘오늘 보상을 마다할 필요는 없지.’
미션 두 개를 성공해 두 카드 다 뽑으라 하니, 재마는 신이 나서 두 장의 카드를 모두 선택했다.
‘이번엔 어떤 보상이 나올까.’
[탕약카드1]
[탕약카드2]
‘뭐야. 지난번에도 탕약 카드는 나왔었는데?’
지난번, 설아를 치료하고 마지막 날, 보상 카드로 나왔던 탕약 카드가 기억이 나 기운이 빠지는 재마였다.
더구나 동시에 미션 성공을 해서 보상을 받는 상황에 보상도 1과 2로 나뉘어 똑같은 게 나오다니 조금 전 기대했던 만큼 실망이 컸다.
탕약이란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보상을 받았다고 특별히 더 실력이 늘었다는 것도 느끼기 힘든 보상이었다.
‘같은 카드가 2장이 나오려면 차라리 그냥 한 장을 주지. 사람 마음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재마는 기운이 빠져 어깨를 축 내리고, 알람이 울리는 탕제실로 말을 옮겼다.
어디에다 따지고 싶어도 따질 수도 없는 재마는 그저 혼자 속으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온 재마는 탕제실에 다다라 문고리를 잡는 순간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평소와 다름을 확실히 느꼈다.
“뭐야.”
재마는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내뱉었다.
조금 전 탕약 카드를 두 장 뽑은 것밖에 없었던 재마는 문을 열기도 전에 자신의 온 신경이 반응한다는 것을 느꼈다.
탕제실에 다다라 문을 열기도 전에 안쪽에서 밀려 나오는 탕약의 향이 그의 코를 찔렀다.
원래 탕약을 달이기 시작하면 한의원 전체가 탕약 냄새로 둘러싸이지만, 평소보다 더욱 진하게 그에게 다가왔다. 문을 열자마자 안쪽의 탕약의 냄새가 진동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윽. 설마 이게 보상?”
진한 탕약 냄새에 민감해진 코를 재마는 한 손으로 가렸다.
하지만 이내 곧 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코로 들어온 탕약의 냄새는 코를 통해 그의 모든 신경을 자극하고 곧장 뇌로 전달했다.
[영계출감탕- 기립성 저혈압에 탁월한 효과. 혈압 자체의 개선뿐 아니라 어지럼증, 만성피로, 불면증, 소화 및 식욕 저하 증상에 효과가 있음]
재마가 다리고 있는 탕약에 대한 정보가 냄새를 통해 그의 머리로 전달되었다.
“허.”
이번에는 탕제기 쪽이 아닌 탕약 재료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천문동 제철 11월~12월 기침 완화, 해독 기능, 피로 회복.]
[우슬 진통, 항염, 위장관궤양 억제. 주의 임산부에게는 금기한다.]
재료를 손에 쥐자 손에 있는 재료에 대한 간단한 정보들이 재마에게 전달되었다.
조금 전 같은 보상 카드가 두 장 나왔다고 투덜거렸던 것이 무색하게, 이번 보상은 재마가 기대했던 그 이상이었다.
냄새만 맡아도 탕약의 효능을 알 수 있고, 그 안에 들어가 있는 탕약의 재료들을 알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재료를 만지기만 해도 재료의 궁합과 효능. 주의사항까지 알려주다니.
이미 수련을 통해 알고 있는 내용이라도 처방에 큰 도움이 되는 보상이 확실했다.
한의사로서 실수할 수 있는 것까지 잡아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 투덜댔던 것, 취소합니다.”
재마는 저도 모르게 알 수 없는 누군가를 향해 자신의 투덜거림을 반성했다.
“뭐야. 탕약 보러 간다더니 왜 안 들어오나 했는데 뭘 취소해?”
“어?”
탕제실에서 혼자 신이나 이 재료, 저 재료 꺼내 보며 혼자 웃고 있는 재마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강산이었다.
“너는 몰라도 돼. 인마.”
“야, 너 나한테 비밀 만들지 마라. 서운하다.”
“서운하면 어쩔 건데.”
재마가 서운하다는 강산의 어깨를 툭 치자 강산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악마의 편집. 뭐 그런 거로 복수하는 수가 있어.”
“하나도 안 무섭네요.”
“이 원장아. 그나저나 다음 영상은 뭘 찍지? 간단한 한의학 상식 뭐 이런 건 어때?”
“좋지. 이 한약 재료들로 어떤 조합이 좋은지 궁합이 맞는 재료, 궁합이 맞지 않는 재료들에 대해 찍어 볼까?”
재마는 자신이 받은 보상을 곧장 사용할 수 있는 주제를 떠올렸다.
“야, 이 많은 걸 다 조사하겠다고?”
강산은 탕제실 한쪽 벽이 모자라 양쪽 벽을 가득 메운 탕제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척하면 척이지. 우슬. 진통 항염, 임산부에게 금기. 천문동. 기침 완화 해독기능.”
조금 전 자신이 느꼈던 재료들에 대한 정보를 술술 읊자 강산은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수련을 하며 밤마다 줄줄 외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바로 그 재료에 대한 정보를 읊을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
“이건. 이거는!”
탕제 서랍에 있는 재료들을 무작위로 꺼낸 강산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재마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