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37화
“좋은 일?”
“실력이 느는 일은 또 뭐야.”
강산이 예상한 것처럼 동기 셋은 관심을 가지고 그의 말에 집중을 했다.
“그뿐 아니야, 해내고 나면 이 사나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끌어 오르는…….”
“야야, 서사가 너무 길다. 그런 일이 뭔데?”
강산에게 얼른 대답이나 하라고 정수는 부추겼다.
“지난번에 재마랑 내가 홍천 요양원에 의료봉사를 한 번 갔다 왔거든.”
“의료봉사?”
“야, 우리가 무슨 수련생들도 아니고 시골 의료봉사를 가냐.”
기대했던 동기들은 의료봉사라는 말에 힘이 빠지는지 손사래를 쳤다.
“이놈들 보게. 야, 그곳 어르신들이 얼마나 순수하시고 좋은 분들인데. 한의사로서 그런 분들에게 잠시나마 도움이 되면 얼마나 좋겠냐.”
반짝 관심을 가졌다가 흥미가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 동기들의 얼굴에 강산은 당황을 한 모양이었다.
“개원의인 재마라면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서 봉사활동도 시작하고 그럴지 모르겠지만, 우리 같은 페이닥터가 회사 눈치 보느라 정신없는 데 봉사할 시간이 되냐?”
정수는 오늘도 눈칫밥을 배부르게 먹었다는 듯 투덜거렸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이 가는 대로 정말 좋은 곳이야. 한 번씩이라도 가보자. 응?”
강산은 재마에게 부추기지 않고 뭐 하냐는 듯 옆구리를 찔렀다.
얼른 대화에 참여해서 동기들을 꾀어보자는 눈치도 함께였다.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재마와 강산의 일행의 귓가에 들렸다.
그 반갑지 않은 목소리에 맥주를 입에 댔던 재마는 물론, 맥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던 강산도 맥주를 뿜을 뻔했다.
“풉”
“아, 이 새끼. 꼭 하는 짓이.”
거의 뿜을 뻔한 강산에게 정수가 냅킨을 건넸다.
“와, 나. 코로 나올 뻔했어.”
강산이 냅킨으로 코며, 입가를 닦는 사이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중기는 재마 바로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내가 못 올 데라도 왔냐. 짜식들 놀라기는.”
재마를 비롯한 동기들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굳어지자, 중기는 피식 웃으며 가운데 있는 감자튀김을 입에 가져갔다.
“중기, 너도 오래간만이다. 우리 되게 오래간만에 만나는 거거든. 여… 여기는 무슨 일로 왔냐?”
“무슨 일로 오기는. 여기 우리 한방병원 앞이잖아. 자주 와. 조금 이따가 고등학교 친구 놈 하나 만나기로 했어.”
“그…… 그래? 왜 하필 여기를……”
어색한 분위기에 정수가 나서서 해결해 보려고 했지만, 그 또한 어색했다.
어색한 분위기로 강산을 눈치 주는 동기들의 모습에 강산은 약속 장소를 잡아도 한참 잘못 잡았다는 생각에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
“만나는 것도 오랜만이고, 재마는 단톡방에서도 조용하던데 오래간만이다? 잘 지냈지?”
마주 앉아 있는 재마에게 별일은 없냐는 듯 안부를 묻는 중기의 얼굴.
중기의 얼굴에 옅게 남아 있는 미소는 잘 있었을 리 없을 거란 확신을 하는 미소였다.
“잘 지냈지. 그럼. 결혼한다며.”
재마의 입에서 결혼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동기들이 동시에 헛기침을 했다.
끝끝내 피하고 싶은 이야기가 재마의 입에서 먼저 나왔다.
“풉.”
“커컥.”
“이 새끼 또 뿜네.”
이번에는 진짜 술을 뿜은 강산을 더럽다는 듯, 동기들은 노려봤다.
술이 코로 나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재마와 중기 사이의 팽팽한 분위기를 자신이 깨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품는 강산이었다.
“미안하다. 아, 오늘 왜 이렇게 술이 안 넘어가냐.”
하지만 강산의 희생이 무색하게 중기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들었냐? 나는 또 단톡방에서 잠잠하길래, 못 들었는 줄 알았지.”
“아, 축하라도 바랐나?”
자신의 물음에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대답하는 재마의 담담함에 중기의 미소에는 균열이 일었다.
“재마, 잘 지냈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단다.”
“정한 한방병원에는 입사도 못 했는데, 요새 뭐 하길래 그렇게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냐?”
강산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지만, 중기는 또다시 한번 재마의 심기를 거슬렀다.
정한 한방병원 입사를 못 했다는 중기의 이야기를 바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재마는 테이블에 몸을 기댔다.
이것 하나는 똑똑히 하자는 듯, 중기와 두 눈을 마주쳤다.
“이건 못 전해 들었나 보네. 정한 한방병원은 입사를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건데.”
“뭐?”
“나 한의원 인수 했다.”
“인수?”
생각지도 못했던 재마의 근황에 중기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재마의 전 여자친구이자, 자신의 현 여자친구인 박연아에게 듣기로는 두 사람이 헤어지고 당연히 정한 한방병원을 입사 할 수 없게 되었다고만 들었던 그였다.
그 바람에 충원이 생겨 특채로 중기가 입사하게 된 것이었고…….
재마는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정 실장이 명함 잔뜩 뽑아줬을 때 환자들에게 나눠줄 수도 없고 어디다 쓸까 했던 명함을 이렇게 꺼낼 줄은 몰랐던 재마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명함 디자인이라도 멋들어지게 뽑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혹시 몰라 명함 케이스에 자신의 명함으로 채워서 가지고 다니길 얼마나 다행인 줄 모르겠다.
‘선견지명도 생겼나.’
재마는 여유롭게 자신의 명함케이스를 열어 중기를 비롯한 동기들에게 한 장씩 내밀었다.
“다 같은 처지에 명함을 굳이 꺼내야 하나 했는데 하나씩 받아라.”
“인마, 같은 처지는 무슨. 우리들은 월급쟁이고 너는 대표원장인데.”
“그러니까 명함에 대표원장. 딱 이렇게 박혀 있구만.”
재마의 명함을 받아든 동기들은 명함에서 번쩍번쩍 빛이 나는 것 아니냐며 한마디씩 했다.
“이 녀석이 일을 내도 크게 낼 줄 알았어. 하하.”
한의원 인수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중기 앞에서 보이는 동기들의 반응은 재마의 기를 살려주기에 충분했다.
“요즘 개인 한의원 할 만하냐? 페…… 페이닥터라도 이왕이면 큰물에서 있어야 눈에라도 띄지. 어디 있는 거냐?”
“해인동에 있다. 그 동네가 생각보다는 커. 좁은 땅바닥에 한 칸이라도 더 지어보려고 빌딩이 빽빽한 곳보다는 좀 나은 것 같더라. 여자만 믿고 눈에 띌 생각 하다가 팽 당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재마는 자신의 앞에 있는 맥주 500㏄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단번에 맥주 500㏄를 마시고 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자, 재마를 동그란 눈으로 바라보는 동기들, 그리고 잔뜩 구겨진 얼굴로 재마를 노려보는 중기가 보였다.
여자만 믿는다는 건 박연아만 믿고 자신이 정한 한방병원에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중기는 이내 손까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뭐? 너 방금 뭐라고 했어?”
재마가 잔을 내려놓자, 기다렸다는 듯 중기가 달려들었다.
“크. 시원하다. 그렇지? 역시 여름에는 맥주지.”
재마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손으로 입술을 훔쳤다.
“야야. 재마야. 너 무리한 거 아니냐?”
“무리는 무슨. 나 내일 진료 있어서 먼저 간다. 너네도 일찍 일찍 들어가.”
아무 일 없다는 듯, 재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기들에게서 멀어졌다.
-재마야. 진짜 몰랐다. 나는 진짜 몰랐어.
펍 밖으로 나온 재마의 휴대 전화는 강산의 메시지로 쉴 새 없이 울려댔다.
강남 한가운데에 정한 한방병원이 있지만, 강남인 만큼 맥주집 또한 즐비했다.
그 많은 곳 중에 최중기 녀석이 콕 집어 들어온 펍이 하필이면 동기들과 재마가 있는 곳이니 강산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됐다.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가 오늘 모인 녀석들한테 봉사활동 확답은 확실히 받을게.
강산은 제 할 일은 확실히 마무리하겠다는 듯 답장을 했다.
강산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재마는 이제 정말 괜찮았다.
동기들도 언젠가는 재마가 명의 한의원을 인수 했다는 것을 알게 될 터였다.
언제까지 말을 안 하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 이번 기회에 이야기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강산의 제안처럼 동기들과 꿈속 요양원 봉사를 하게 되면 재마 또한 편할 수 있었다.
강산과 성격이 다른 재마였지만, 어쨌든 미워할 수는 없었다.
-내일 출근해서 너튜브 편집이나 봐라.
-당연한 말씀을. 원장님, 사랑합니다.
출근을 하라는 말에 되지도 않는 아부까지 덧붙이는 강산의 메시지를 본 재마는 피식 웃으며 버스를 탔다.
강남에서 해인동까지 가는 버스를 탄 재마는 아주 오래간만에 서울 버스를 탄 기분이었다.
한의대를 다니며 정신없이 공부하고 수련을 할 동안이 떠올랐다. 졸업하고 면허를 따고 난 이후에는 남들과 다르지 않은 생활을 하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매일 똑같이 한의원으로 출근해 환자들을 진료하고 매일 보는 직원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다행스럽게 명의 한의원은 야간진료는 없었지만, 아직 탕약까지 재마가 담당을 하고 있어 자신의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었던 재마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일반적인 한의사와 달리 재마에게는 남들에게 없는 환자를 읽는 능력이 있었고 이 능력으로 환자의 치료와 미션을 수행해야 했다.
띠링.
-원장님, 좋은 저녁 보내고 계신가요?
원장님이 알려주신 운동 꾸준히 하고 있는데, 오늘은 아주 컨디션이 좋아 사진 찍어 보내드립니다. 약도 잘 먹고 있고 운동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모두 원장님 덕분입니다.
매일 똑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아쉬움을 느낄 찰나, 타이밍 좋게 장영원 환자에게 메시지와 함께 사진이 도착했다.
사진 속에는 재마가 알려준 마사지 후, 손가락 운동 발가락 운동을 하는 영원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처음 재마를 찾아왔을 때와 모양은 크게 차이 없는 손과 발이었지만 운동을 할 때의 가동성은 확실히 좋아진 상태였다.
-영원 님, 상태가 호전되어 제가 더 감사합니다. 목요일 진료 날 뵙겠습니다.
자신만의 여유시간은 거의 없이 환자를 만나는 매일 똑같은 일상.
갑작스럽게 생긴 능력과 보상과 함께 덜컥 명의 한의원을 이어받기로 한 재마였다. 하지만 이제는 환자를 보는 보람에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능력과 미션에 따른 직접적인 보상이 아니어도, 이런 메시지는 개인적인 심적 보상이나 다름없었다.
강산에게 괜찮다고 말을 한 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강산은 느끼지 못하는 환자와 한의사와의 유대관계가 생기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해인동 골목 어귀를 들어왔다. 개발 예정의 기대를 품은 현수막과 반대 서명을 바라는 현수막 사이, 명의 한의원 앞에 선 재마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재마가 명의 한의원 앞에 서자, 어두운 골목 안에서도 눈동자에 빛이 서렸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이제는 전혀 낯설지 않은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명의 한의원의 이름을 알려라.]
명의 한의원을 이어받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재마에게 새로운 미션이 주어진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