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36화
“들어가자.”
택시에서 내린 강산은 재마의 손을 잡아끌었다.
처음 와보는 펍 앞에 선 재마는 펍 안에 있는 동기들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뭐야? 여길 왜 끌고 와.”
“너 요양원 봉사, 매주 갈 수는 없는 상황이잖아.”
“그런데.”
“간다 해도, 나는 면허도 없는 상태에서 봉사하기도 그렇고. 그래서 내가 동기들 좀 모았다.”
“하.”
재마는 오늘 꿈속 요양원 진 주임에게 연락을 받았다.
-이 원장님, 진짜 어려운 부탁인데, 이쪽에서 어르신들 진료 봐주시던 채 원장님이 글쎄 낙상 사고로 6개월은 병원에 입원하신다네요. 급하게 한의사분을 모셔야 하는 데 제가 부탁드릴 곳이 마땅치 않아서요.
인연이 없는 곳이면 모를까 직접 요양원 봉사를 다녀왔던 꿈속요양원의 진 주임의 부탁이니 단박에 거절을 하기도 힘든 재마였다.
주 5일 진료도 아닌 주 6일 진료에 홍천에 있는 꿈속 요양원까지 장거리 진료를 다니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그렇다고 개발예정지인 명의 한의원에 한의사 한 명을 더 채용하는 것도 현실 가능성이 없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강산은 일단 만나자고 하더니, 이렇게 재마가 모르는 새에 일을 벌인 줄은 몰랐다.
강산이 무슨 핑계로 동기들을 모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먼저 도착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저 녀석들 서울깍쟁이들 같지만 그래도 의료봉사 이야기 꺼내면 그래도 생각해 볼 만한 녀석들로만 추려서 불렀어.”
“칭찬해 달라는 거냐?”
이 상황이 맘에 들지 않는 걸 뻔히 아는 강산이었지만, 재마에게 칭찬을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들렸냐.”
“칭찬은 개뿔, 진짜 확.”
“너, 지금 그래도 너 도와주려고 나서는 사람 나밖에 없다. 나 아니면 너튜브 촬영. 편집 누가 할 건데?”
“후. 그것 때문에 참는다. 진짜.”
재마는 너튜브 때문에도 억지로 참지만, 언제까지 동기들과 연락을 안 하고 지낼 수만은 없으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야. 이재마 오래간만이다?”
“그러니까. 몇 개월 동안 단톡방에서 대답도 하지도 않고, 왜 두문불출한 거야?”
억지로 강산의 손에 이끌려서 강남에 있는 펍까지 끌려 온 재마는 썩 유쾌하지 않은 얼굴로 동기들이 있는 테이블로 끌려갔다.
“이 녀석들이 하도 너 죽은 거 아니냐. 어디 산에라도 들어간 거 아니냐 소리를 해대잖아.”
“그렇다고 여기 온다는 말도 없이 끌고 오냐?”
재마는 어금니를 꽉 물고 목소리를 낮춰 강산의 귀에 읊조렸다.
“여기 온다고 했으면 네가 순순히 따라왔겠냐?”
강산은 재마의 말에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재마는 강산의 옆구리라도 주먹으로 한 대 치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있었다.
“왜, 왜. 너 왜 동기들이랑도 연락 안 하는 건데? 생각을 해봐. 저 녀석들은 다 지금 환자 눈치에 대표 원장 눈치, 직원들 눈치 보며 하루하루가 고단한 사회 초년생들이야.”
강산은 재마에게 동기들 사이에서 어깨에 힘 좀 줘도 된다는 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 이 원장은 시작부터가 다르잖아. 시작부터가.”
“하여간 말이나 못 하면.”
“갑자기 개인한의원 물려받게 된 게 동기들이랑 멀어질 이유라도 되냐. 나, 참. 다 함께 사는 세상이야. 동기들 도움도 받고, 서로 도와가며 살아야지. 그렇지 않냐. 얘들아!”
강산은 억지로 재마의 어깨를 눌러 동기들 맞은 편에 재마를 앉혔다.
후. 이렇게 끌고 왔으니 다시 나갈 수도 없고 강산의 힘에 이끌려 억지로 앉을 수밖에 없는 재마였다.
“둘이 와서 뭘 그렇게 소곤거려. 앉아. 앉아.”
“이재마! 너 진짜 이러기냐. 6년 내내 수석 놓치지 않더니 졸업하자마자 쌩이야?”
동기들은 재마가 연락이 되지 않았던 것이 서운한 티를 냈다.
‘서운하기는. 그보다 내가 정한 한방병원에 들어가지 않고 도대체 뭘 하고 사는 지가 궁금했겠지.’
단톡방에 대답만 하지 않았지 그 안에서 동기들이 하던 이야기를 다 보고 있었던 재마는, 그를 걱정하는 말보다 돌아가는 상황이 궁금해했던 동기들의 속마음을 알고 있었다.
“이 녀석 엄청 바빠서 그랬을 거야.”
“야, 다 바쁘지. 우리도 다 바빠. 사회 초년생 중에 안 바쁜 사람들이 어디 있냐.”
“그러니까. 후. 나 부산에서 올라왔잖아. 매주 올라오기 빡씨다. 빡세.”
각자 자신이 소속해 있는 한방병원 이야기를 하며 두 달이 넘도록 눈코 뜰 새 없이 적응했던 날들을 한탄하기 시작했다.
“부산에 내려가서 취업했으면 거기서 놀면 되지. 굳이 매주 올라오고 있어. 그것도 주말도 아니고 평일에.”
“야, 막내가 주말에 일을 어떻게 빼냐. 365일 한방병원의 막내 한의사 설움을 네가 아냐. 응? 네가 부산 내려가 봐. 거기에 있고 싶은가. 나 서울 토박이야. 거기에서 환자들 사투리 듣고 있으면 외국어 듣기 평가 하는 것 같아. 같은 한국말인데 왜 이렇게 어렵냐?”
“얼른 적응해. 인마.”
부산에 있는 한방병원으로 들어간 원석은 앓는 소리를 했다.
재마는 말없이 앓는 소리를 하는 원석의 맥주잔에 잔을 부딪치며 슬며시 웃을 뿐이었다.
서울에서도 성북동 땅부자 집 아들인 원석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어려움이 없었지만, 부산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한의대 성적이 인생에 있어 가장 큰 난관이라 말을 했다.
지금 인생의 큰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은 오프 때마다 서울로 올라와 서울 공기를 마시는 게 다였다.
“진짜 내가 다시 한의대 시절로 돌아가면 이 녀석 옆에 딱 붙어서 공부만 한다. 공부만.”
“야야, 아서라. 맨날 그렇게 붙어 다닌 강산이 봐라. 재마 따라다닌다고 다 공부 잘하는 거 아니야.”
동기들은 앓는 소리를 하고 있는 원석에게 시간을 되돌려도 똑같을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재마는 그저 동기들 사이에서 웃을 때 함께 웃고, 분위기를 맞춰가며 맥주 500㏄를 천천히 마실 뿐이었다.
“그래서 우리 수석님은.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동기 모임에 나온 재마의 모습을 보고 처음부터 그의 근황을 묻고 싶었던 정수는 재마의 맥주잔에 자신의 맥주잔을 부딪치며 근황을 물었다.
“나야 뭐.”
“너 요새 뭐하냐. 정한 한방병원 가는 거 아니었어? 졸업 전부터 정해진 것 아니었나? 왜 안 갔어? 설마.”
“이 녀석 개원했어.”
동기의 입에서 연아의 이름이 나올세라, 강산이 그의 말을 끊었다.
“개원? 뭐야. 개인 한의원 개원한 거야? 개원을 하고도 동기들한테 말을 안 해. 야, 강산. 넌 언제 알았어?”
동기들은 한방병원으로 입사해 선배 의사들 사이에서 눈치 보랴, 오전 9시부터 7시까지 진료 보랴, 입원환자들 챙기랴 정신이 없는 와중에 개원을 했다는 재마의 뒤늦은 소식에 놀란 모양이었다.
한편으로는 병원 세 곳 중, 한 곳이 한의원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 요즘 세상에 경력 없는 초짜 한의사가 개인 한의원을 차렸다는 말에 곧장 축하한다는 말이 안 나오는 모양이었다.
환자를 읽는 능력과 뒤따르는 보상에 대한 걸 동기들은 알 수 없으니 그런 반응 또한 당연했다.
아마 자신도 동기들 자리에 앉아 있고, 과 동기가 갑자기 동네 한의원을 개원 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재마도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터였다.
동기들의 반응을 예상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재마는 옆자리에 앉은 강산의 다리를 발로 까댔다.
“윽. 야 인마. 작작 차.”
강산은 발로 차대는 재마에게 차지 말라고 으름장을 놨다.
“나야 미리 알고는 있었는데…….”
“미리 연락 못 해서 미안하다. 뭐 떠들썩하게 개원한다고 알릴 상황도 아니고, 기존에 진료 중이던 한의원 인수받은 거야.”
“오오. 어디, 서울?”
부산에서 쌔빠지게 고생 중이라는 정수가 개인 한의원을 인수했다는 재마의 이야기에 눈을 반짝거렸다.
“너는 아버지가 한의원 개원은 5년 뒤에나 해주신댔다며.”
“개원을 5년 뒤에 해주신댔지, 인수는 이야기해 본 적 없어.”
개원과 인수는 확연히 다르니, 정수는 재마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며 재촉했다.
“어디? 청담? 강남?”
정수는 그래도 돈이 될 만한 곳의 한의원을 인수 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청담과 강남을 꼽았다.
“아니, 해인동.”
“해인동?”
동기들과 함께 한의대를 나온 장수동에서 멀지 않은 해인동이었지만, 다들 생소한 지명을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해인동이 어디 있냐?”
압구정 토박이인 광수가 물었다.
“아, 그. 그. 듣기는 했는데, 내가 성북동 쪽밖에 몰라서.”
정수도 해인동이 어딘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장수동 바로 옆에 붙어 있다. 이것들아.”
강산은 눈앞에 있는 오징어를 입에 물며 동기들에게 대답했다.
서울 토박이면서 지방에서 올라온 자신보다 모르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 눈빛에도 동기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자신들이 나고 자란 부촌 아니면 서울 안이어도 전혀 경험해 보지 않은 미지의 동네였다.
“아, 장수동? 학교 옆?”
“응. 학교에서 버스 타고 10분 정도.”
“아, 그 동네 매출이 나오려나.”
해인동이 어디 있는 줄은 모르지만, 장수동 옆이라는 말에 동기들의 한탄이 쏟아졌다.
이런 반응 또한 예상했던 바였다.
“이 녀석들이 뭘 모르네. 동네를 꽉 잡고 있는 한의원이면 대대손손 가업만 잘 이어도 부자가 된단 말이야.”
강산이 명의 한의원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을 동기들에게 말하려는 타이밍에 재마가 그의 말을 탁 잘랐다.
“그래 봤자 동네 한의원이지, 뭐.”
강산은 왜 그러냐는 시선으로 재마를 바라봤고, 재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아, 나 생각났다. 그쪽 이제 개발예정지인 곳 아니야? 한쪽은 벌써 개발 중인 것 같고.”
부동산 투자에 관심이 많은 정수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눈을 번뜩였다.
“역시. 정수, 아는구나? 재마가 똑똑하기만 한 줄 알았더니 돈 냄새를 좀 맡아. 그렇지?”
강산은 재마가 곧 개발예정지인 한의원을 인수한 이유가 다 있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아, 그런 거야? 그러면 또 말이 다르지. 개발 전부터 알박기하고 있는 것도 괜찮지.”
“알박기보다 보상 받아 나와서 강남으로 진출하는 게 낫지 않겠냐?”
역시나 명의 한의원을 인수한 이야기가 나오니 재마가 무슨 말을 하지 않아도 저들끼리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냥 어쩌다 보니 기회가 생겨서.”
“그렇지. 인생에 기회가 올 때는 그걸 놓치면 안 되는 거야. 역시 우리 재마 이 중에 제일 낫구나.”
가뜩이나 명의 한의원의 앞날을 어떻게 이끌어갈지 고민 중인 재마는 본의 아니게 흘러가는 대화에 끼어들 수 없었다.
재마는 동기들의 분위기에 맞춰 잔을 들었다.
“너희 선배 의사들 눈치 봐가며 침놓고, 약재 창고 정리하느라 정신없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너네 좋은 일도 하고 실력도 느는 일 좀 같이하자.”
재마가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강산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