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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읽는 한의사-35화 (35/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35화

해인동 골목 포장마차.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소주병을 딴 강산은 재마의 앞에 있는 잔에 소주를 따랐다.

“너 솔직히 말해봐. 여기 인수하기 전에 개발 예정지인 것까지 다 파악했지?”

강산은 재마가 이미 개발을 예상하고 더 큰 그림을 그리고 명의 한의원을 인수했으리라는 것을 예상했다는 것처럼 물었다.

“그렇지.”

재마는 짧은 대답과 함께 소주를 한 번에 들이켰다.

“역시 우리 한의대 수석님 머리가 보통 머리가 아니라니까. 저 정도 건물이면 얼마나 받는데?”

강산은 자신의 예상이 맞은 것이 기분이 좋은지 제 잔의 술을 홀라당 마셨다.

“몰라.”

“몰라? 아직 연락 안 왔어? 야, 원래 한옥이 일반 건물보다 부지가 넓잖아. 뒷마당도 좀 있고. 꽤 될걸? 크. 이재마 인생에 빛이 이제 드는구나.”

큰 그림이라도 그리고 있었냐는 듯이 재마의 옆구리를 쿡 찌른 강산은 혼자 큭큭 웃음을 흘렸다.

“너튜브 채널도 하고, 보상금 받아 나가서 번듯하게 강남에 자리 잡아봐. 그럼 큰 한방병원이 뭐가 부럽겠냐. 강남 빌딩 개원의인데.”

기분이 좋아 보이는 강산과 달리, 재마는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제 잔에 소주를 따랐다.

“근데 너 표정이 왜 그래.”

“야, 너도 명의 한의원 와봤잖아.”

“갔지. 그럼.”

“보상받는 게 문제가 아니고, 명의 한의원의 가치. 가치를 봐야지. 인마.”

“가치? 가치 중요하지. 그래야 돈도 더 받으니까. 왜 어느 정도 받아야 할지 감이 안 와서 그래?”

강산과의 이야기가 계속 보상금 쪽으로 흘러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재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명의 한의원 가치도, 의미도 깊은 곳이야.”

“그야 그렇지만.”

“나도 처음에 이 후져 터진 동네 한의원이 손님이 적네, 많네. 돈이 되네 마네 했지만. 이제 보니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아.”

재마의 연거푸 올라가는 술잔에 강산이 그의 손을 만류했다.

“그래서 뭐. 다른 생각이라도 있는 거야?”

“명의 한의원을 구해내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겠냐?”

재마는 자신에게 주어진 미션을 강산에게 다 털어놓을 수는 없었지만 명의 한의원을 구할 방법에 대해 물었다.

“네가 뭐. 지구 용사야? 구하게?”

“지구 용사, 아니지. 근데 내가 지금 명의 한의원 원장이잖아.”

“그야 그렇지만.”

재마는 반복적으로 제 눈앞에 나타나는 미션이 부담스러운 마음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 * *

강산은 아침부터 휴대전화를 들고 명의 한의원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이왕 영상 편집을 맡은 김에 재마를 도와 촬영까지도 그가 맡기로 했다.

“너 인마. 갑자기 적극적으로 돕는 이유가 뭐야?”

어젯밤까지만 해도 두둑한 보상금을 받아 명의 한의원이라는 이름을 잃지 않고 운영을 하면 그것이 명의 한의원을 살리는 일이지 않겠냐던 강산이었다.

재마의 질문에 동기사랑 나라사랑이라며 적극적으로 너튜브 촬영에 가담하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유둉의 하루하루’ 유정과 한 번이라도 더 만날 궁리를 한 강산이었다.

명의 한의원의 채널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했던 유정이니, 재마를 도우면 유정과 만날 기회가 더 생길 것 같았다.

유정을 만날 생각에 사극에라도 나올 것 같은 명의 한의원을 촬영하는 내내 강산의 입가에는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근데 여기는 좀 특이하네요.”

“네. 저희 처치실이 좀 특이하죠? 단골 환자 어르신들이 많으신데, 베드 사용하시는 것보다 이렇게 온돌 사용하시는 걸 좋아해서 쭉 유지해 왔어요.”

“아…….”

지방에서 한의원을 오랫동안 운영해 온 아버지 밑에서 자랐기에 온돌에서 침술을 하는 것에 익숙한 강산이었다.

하지만 2022년에 그것도 서울에서 온돌에서 침술을 하는 한의원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 했다.

“정말 이런 곳은 서울 어디, 아니, 이제 지방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텐데요. 그렇죠?”

“그렇죠.”

“이 원장님도 여기서 침을 놓습니까?”

“그럼요.”

“정말요? 허.”

동기들이 재마가 온돌 처치실을 사용한다는 걸 알면 강산과 똑같은 반응일 것이었다.

강산이 온돌 처치실에 놀란 모습이 이상하지도 않다는 듯, 정 실장은 처치실 2의 문을 열고 안내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처치실 2에도 베드가 없었는데, 그래도 이 원장님이 오셔서 베드가 생겼어요.”

“아, 베드가 있는 처치실도 있네요?”

“솔직히 말하면 구 원장님이 운영하실 때, 한의원에 대기 환자가 많을 정도로 운영이 잘 되었지만 젊은 환자분들은 불편함을 감수하셔야 했거든요.”

환자들뿐 아니라 한의사 수련을 한 강산, 그리고 재마에게도 베드가 있는 처치실이 확실히 편했다.

“그래도 이 원장님이 베드 들였다는 소문 듣고, 발길 끊으셨던 환자분들도 다시 진료 보러 오시고는 했어요.”

정 실장의 말에 강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처치실 1과 2가 비교가 될 수 있도록 촬영을 이어갔다.

주말 동안 온몸이 콕콕 쑤시는 통에 밤잠을 설친 갑순은 월요일 진료가 시작되자마자 한의원을 찾았다.

명의 한의원에 오는 사람들이라면 1주일에 한 번 약재를 들여오는 약재상 직원, 택배로 한약을 배송하는 택배사 직원까지도 갑순에 눈에 익었다.

처음 보는 청년이 휴대전화를 들고 명의 한의원을 이곳저곳 찍고 있으니 갑순의 눈에 들어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

“지금 뭐 찍는 거랴? 방송국에서라도 나온 거야?”

방송국에서 나와서 찍는다고 보기에는 뭔가 단출했지만, 영상을 찍는 것이 갑순에게는 익숙지 않았다.

“아니에요. 그냥 원장님이 개인 채널을 만드신다고.”

“개인 채널? 그게 뭔디.”

휴일에 찍으면 좋았겠지만, 재마가 너튜브 채널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기로 한 유정은 꼭 진료시간에 명의 한의원을 찍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예전에 구 원장이 명의 한의원을 할 때만큼 환자들이 많은 것도 아니고, 아직은 그를 못 미더운 눈으로 찾아오는 환자도 많다고 핑계도 대보았지만.

-꼭이요. 꼭.

이라며 강산에게 신신당부를 한 유정이었다.

강산도 환자가 없을 때 찍는 것이 나을 것 같았지만, 유정의 말이라면 이제 팥으로 메주라도 쑤어버릴 기세인 강산은 그녀의 당부대로 진료시간에 다시 한번 해인동을 찾았다.

“휴대폰으로 뭘 찍는다고 난리들이여.”

“할머니, 요즘은 이렇게 간단한 장비로도 영상화하기도 해요. 너튜브에 올리면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되고, 동네 사람들 말고도 다른 데에서도 명의 한의원에 대해 알게 되고요.”

명의 한의원 이곳저곳을 찍는 강산을 따라 다니며 중얼거리는 갑순에게 강산은 피식 웃으며 별것 아닌 것으로 보여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다는 걸 설명했다.

“할머니이? 나 알어?”

강산의 설명이 무색하게 갑순은 처음 보는 강산이 자신에게 할머니라고 말을 한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아, 아뇨. 그건 아니지만.”

“진갑순 님, 이분은 촬영 중이시니까 여기, 앉아서 쌍화차 드세요. 네?”

정 실장은 노여워하는 갑순에게 다가와 달랬다.

정 실장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처음 보는 어르신에게 된통 당할 뻔한 강산은 슬금슬금 갑순을 피했다.

동네 한의원의 주의할 점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연세가 많으신 분들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것이라는 걸 깜빡 잊었던 강산이었다.

“한의원 직원 아니면, 저 짝 청년은 누구래?”

명의 한의원을 제집 드나들듯 찾는 갑순에게 강산의 존재가 궁금할 만도 했다.

정 실장은 강산이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원장님 대학 동기시래요.”

“동기? 그럼 한의사여? 어느 동네 한의원이길래 월요일에 진료도 안 허고 한가~ 하게 남의 한의원을 촬영하고 있는가.”

“아뇨. 아직은…”

정 실장이 대답을 하기에는 조금 불편한 물음이었다.

아직 강산은 한의사가 아니라는 말에 혀끝을 끌끌 찼다.

“우리 젊은 원장님 맨치로 실력이 뛰어나지는 않는가 보네. 그 힘들다는 한의대를 나와서 아직 한의사가 못 된 걸 보면……. 쯧.”

강산에게 다 들리도록 이야기를 흘린 갑순이 불편했지만, 한의사 면허도 취득하지 못한 강산은 반박할 수 없었다.

한의대 6년을 재마와 항상 붙어 다녔지만, 수석을 놓치지 않는 재마를 성적으로는 쫓아가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흠.”

“맞나 부네.”

갑순은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도 반박을 못 하는 강산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하고 찔렀다.

“맞아요. 다 맞아요. 할머니…… 아니, 어르신 말씀대로 재마 저 녀석은 수석 놓친 적 한 번도 없고, 전 못 따라갔고요.”

“수석? 수석이 뭔디.”

대학 문턱은 밟아 본 적이 없었던 갑순은 강산의 입에서 나온 수석이라는 것이 좋은 뜻이긴 한 것 같았으나 정확한 뜻은 알 수 없었다.

“1등이요. 과 1등.”

강산은 자신의 입으로 재마가 과 1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썩 유쾌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진갑순 님 오셨어요?”

출근하자마자 진료가 시작되기 전 탕약실에서 오늘 오전에 나갈 탕약을 확인을 마친 재마는 한의원 마당에 갑순이 도착한 걸 이제야 알아챘다.

재마가 꾸벅 인사를 하자, 갑순은 주말이 되기 전에 진료를 봤지만 한참 만에 만난 사이처럼 재마를 반겼다.

“아이구. 우리 젊은 원장님 한의대 수석이셨어? 난 여즉 그것도 몰랐네.”

갑순은 지금까지 재마를 못 알아봤다는 듯, 껄껄 웃었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젊은 원장에게 몸을 맡길 수 없었던 갑순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재마에 대한 신뢰가 두둑했다.

“수석이요?”

재마는 갑자기 자신의 한의대 성적 이야기가 왜 나왔냐는 듯 강산을 바라봤다.

“아우. 여기 이상해. 이재마, 여기 오면 나도 세뇌될 것 같아. 우리 원장님 최고. 짱. 멋져요!”

“아이구. 당연한 거 아니여? 내 몸을 아무헌티나 맡길 수 없으니께. 우리 원장님이 최고지. 짱.”

갑순은 강산 앞에서 재마를 향해 엄지를 척하고 들어 올렸다.

“이 모습 그대로 영상으로 찍어서 올려도 되냐? 너튜브 스타 될 것 같은데.”

강산은 지금 광경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재마를 비꼬았다.

“됐거든. 한의원 광경이나 잘 찍어줘. 개발 예정지 같은 모습으로 말고.”

“개발 예정지를 개발 예정지처럼 찍지, 뭐. 문화재처럼 찍냐?”

재마의 부탁에 강산은 입술을 삐죽였다.

“뭘 삐죽여. 우리한테는 명의 한의원이 문화재여. 문화재. 없어져서는 안 되는.”

갑순은 명의 한의원이 사라질 것을 생각하면 아찔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갑순만 해도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진료시간이 되자마자 한의원 문턱을 넘었다.

“원장님, 안녕하세요.”

“왜 이제사와. 얼른 오지 않고.”

“아침부터 아들한테 전화가 와서. 전화 받고 오느라고.”

미리 와 있던 갑순과 막역한 사이로 보이는 옥숙이 손을 흔들며 들어왔다.

옥숙을 처음 보는 강산도 두 사람은 명의 한의원에 매일 드나드는 단골 환자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다.

한의대를 졸업하고 정한 한방병원에 입사해서 번듯하게 비수술 한방치료를 하며 이름을 날릴 줄 알았던 재마가 동네 한의원에 있는 것이 낯설게 느껴질 줄 알았던 강산이었다.

하지만 재마가 어르신들과 주말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간단히 나눌 정도로 가까워 보이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너 해인동 한의사 다 됐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어울린다고. 이 자리에.”

강산은 재마의 어깨를 다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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