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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읽는 한의사-33화 (33/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33화

오전에 뽑았던 보상카드의 효과를 톡톡히 볼 수 있는 동공인식.

그야말로 동공지진(指診)이었다.

[동공을 인식합니다.]

이름 : 양정남

나이 : 84세

체내의 진액(津液)이 부족한 상태. 허증(虛症).

기존에 나타나던 섬광과 함께 정확한 상태가 메시지로 나타나니 처방을 하기에 도움이 많이 되었다.

재마는 허리를 제대로 펴지도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정남의 왼팔을 들어 진맥을 짚었다.

“어때요. 심각하면 지금에라도 병원을…….”

“버스 놓친다니께. 화장실만 다녀오면 돼.”

어머니 정남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미자의 말이 무색하게 정남은 화장실만 다녀오면 된다며 안심을 시켰다.

“어르신. 지금 화장실 가시면 괜찮으시겠어요?”

재마가 화장실을 가겠다는 정남을 염려스럽게 바라보자 미자는 손사래를 쳤다.

“오늘만 해도 화장실을 몇 바탕을 다녀왔어요. 제대로 볼일도 못 보는 것 같구만.”

집에서 나오기 전에도 배가 아프다고 화장실을 몇 번 들락거렸던 것 같은 두 모녀의 말에 재마는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어르신. 아무래도 특별한 원인은 없고 대장 운동이 느려져 직장에서 변을 밖으로 내보내는 힘이 부족해서 그러신 것 같아요.”

“늙으면 볼일 볼 힘도 없는 겨. 됐어. 그럼 그냥 버스 타지.”

“엄니!”

별 볼 일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는 정남의 손을 이번에는 미자가 잡아끌어 앉혔다.

잠깐 진맥만 짚고도 어머니의 상태를 이야기해 주는 한의사이니, 몇 마디 더 묻고 싶은 모양이었다.

“솔직한 말로, 한의원을 제집 드나들듯 다니시는 데 변비는 도통 효과를 못 보시는 것 같아요. 자식 키울 때 내 새끼들 먹고 싸는 게 행복이더니, 이제는 엄니 제일 걱정이 볼 일도 제대로 못 보셔서 앓는 모습을 보는 거라니.”

정남의 상태에 툴툴대며 이야기를 했지만, 미자가 어머니를 얼마나 걱정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노령의 나이가 된 이후 변비로 고생한 날들이 하루 이틀이 아닌 모양이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인체의 정(精)과 진액(津液)은 부족해지게 마련이에요. 보통 젊은 사람들의 변비는 실증(實證)성 변비로 대황(大黃)과 같은 약성(藥性)이 강한 약재를 종종 사용하는데 허증(虛症)이 많은 노인들에게 대황(大黃)을 사용하게 되면 진액(津液)이 더 부족해져 오히려 몸을 상하게 할 수 있어서 변비를 악화시키기는 부작용이 뒤따르기도 해요. 아무래도 어르신의 상태가 강한 약재에 따른 부작용이신 것 같은데…….”

“지금 한약을 잘못 드셔서 그렇다는 말이에요?”

환자의 나이와 상태에 따라 약의 강도를 처방해야 하지만 고질적인 변비를 겪고 있다고 무조건 강한 약재만 사용한 탕약을 내놓았던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변비가 생긴 원인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고 강한 약재를 사용하면 그럴 수 있죠.”

몸을 보(補)하기 위해 무조건 효과가 좋은 약재만 넣어 약을 지어 달라고 당부를 했던 정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머니를 위한 것이었는 데, 먹는 만큼 중요한 배출에 문제가 생겼다니 다 자신의 탓 같이 느껴졌다.

“저는 우리 엄니 몸에 좋으시라고. 좋은 약재만…….”

자식의 뜻을 모르지 않는 재마는 민망해하는 미자의 손을 다독였다.

점점 작고 약해지는 노모의 뒷모습을 보며 혼자 걱정을 했겠지. 미자의 지난날들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떤 마음이셨는지 다 압니다.”

“그럼 이제 어째야 해요.”

“일단 지금 대장이 조금이라도 운동해서 체내로 배출하는 운동을 할 수 있도록 간단하게 침을 놔드리겠습니다.”

“여기서요?”

재마가 자신이 들고 있던 가방에서 간단하게 자침할 수 있는 침을 꺼내자, 정남과 미자가 동시에 물었다.

“야, 너 여기서 침을 놓겠다는 건 아니지?”

혹여 두 사람이 불안해할까, 강산도 놀랐지만 티를 내지 못하고 목소리를 낮춰 재마에 귓가에 대고 낮게 물었다.

“상황이 안 좋기는 하지만, 터미널에 오신 걸 보니 먼 길 가려고 하신 거 아니세요?”

“서울까지는 가기는 하는데…….”

터미널에서 만난 두 모녀의 옆에 있는 짐가방을 보니, 가까운 거리의 지역을 가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재마와 강산도 서울에서 내려왔으니 서울 여행길이 얼마나 긴지 알 수 있었다.

변비를 해결하지 않으면 간헐적인 통증으로 버스 안에서도 앓으실 것이 분명했다.

“큰 언니네 1년 만에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엄마가 병원을 가재도 안가고 고집을…….”

“어르신. 여기서 간단하게 침 맞으시고, 화장실도 다녀오실 수 있으면 다녀오세요.”

“아이고. 버스 시간이 정해져 있는 데…….”

정남은 재마가 설득을 했지만, 1년 만에 만날 큰딸의 얼굴을 생각하니 자신의 볼일이 문제가 아닌 모양이었다.

“어르신, 버스표는 제가 창구 가서 여유 있게 교환해다 드릴게요.”

옆에서 미심쩍게 바라보던 강산이 정남이 안심할 수 있도록 미리 예약된 표를 직접 교환해 오겠다고 나섰다.

“아휴. 안 바꿔주면 어째. 돈 주고 산 표인데…….”

노모는 혹여 돈 주고 산 버스표가 자신 때문에 쓸모가 없어질까 걱정인 모양이었다.

“제가 확실히 책임지고 교환해 올게요.”

“청년. 그래 줄래요? 차 시간이 다 되서 어쩌나 했는데…….”

정남이 결정도 하기 전에 미자는 손에 쥐고 있었던 버스표 두 장을 강산에게 내밀었다.

“그럼요. 어려운 일도 아닌걸요.”

미자가 건넨 버스표를 흔들며 강산은 긴 줄이 있는 창구 쪽으로 향했다.

“엄니, 저짝 청년이 버스표도 바꿔준 댔으니께. 걱정 말고 침 맞아요. 네?”

“미숙이가 동서울터미널로 나온다고 했잖아. 괜찮은 거여?”

“언니한테야, 전화하면 되지. 휴대폰 뒀다 뭐 한디.”

큰딸이 터미널에 와서 기다리지는 않을까 걱정을 하는 걱정에 강산의 뒷모습을 탐탁지 않게 보는 정남의 얼굴에 미자는 당장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언니, 나 미자. 응. 엄니 또 배 아프다고 터미널에서 허리도 못 펴고. 응. 응. 근데 여기에서 한의사 선생님을 만나서…… 아이고. 고맙지. 응. 그러니까…….”

“나 아픈 게 뭐 대수라고. 젊은 양반들 잡아놓고…”

버스표도 걱정이었지만, 가던 길도 멈춰서서 자신의 상태를 살펴준 재마와 강산에게도 미안한 마음을 갖는 정남이었다.

“어르신, 저희는 걱정 마세요. 힘드신 분들 도우려고 한의대 가서 열심히 배우고, 진료 보는 거니까요.”

“내가 돈 내고 진료 보러 온 것도 아니고…….”

늙고 노쇠해진 자신 하나 때문에 여럿이 고생하는 것이 송구스럽고 불편한 눈치인 정남을 재마는 달래기 시작했다.

“돈 안 냈다고 환자가 아닌 건 아니죠. 그리고 제가 먼저 어르신 찾아온 거니 부담 갖지 마세요.”

“아휴. 청년이 말도 예쁘게 잘하네.”

침을 놓기 전 환자를 안심시키는 것 또한 한의사의 역할이었다.

정남은 재마의 말에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얼굴이 조금 피는 모양새였다.

“엄니, 언니한테 전화했으니까 이제 침 맞아요. 네?”

“미숙이 보고 천천히 나온댔어?”

큰딸과 연락이 잘 되었는지, 확실히 확인을 하는 정남의 얼굴에는 이제 미소가 띄워졌다.

“응. 내가 침 맞고, 화장실 다녀오고 차표 새로 끊고 연락한 댔으니께. 걱정 마셔.”

“나 때문에 몇 명이 고생을 하는 거야.”

정남은 어쩔 수 없이 터미널 대합실에서 재마에게 몸을 맡겼다.

한의원의 처치실은 아니었지만, 오늘만큼은 대합실이라도 노령의 정남에게 꼭 필요한 침을 놓을 생각으로 재마는 침을 잡았다.

“어르신, 그야말로 간단한 침술이니 너무 걱정 마세요.”

“선생님만 믿어유.”

미안하고 민망했지만, 이렇게 된 것 어쩔 수 없다는 듯 재마에게 맡긴 몸은 그를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재마는 정남의 양쪽 손 합곡혈에 침을 놓았다.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팔꿈치와 무릎을 뜻하는 굽을 곡(曲)을 쓰는 곡지혈에도 침을 놓았다.

혈자리에 맞게 침이 들어가고 정남의 표정을 살피는 재마를 정남은 흐뭇하게 바라봤다.

“젊은 양반이 참, 콕콕 집어 침을 잘 놓네.”

곧바로 효험은 없겠지만, 갑작스럽게 재마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고마워서인지 놓는 침 자리마다 시원한 느낌이 드는 정남이었다.

“아마 배에 묵직하고 가스가 들어찬 것이 이정도 침이면 해소가 될 거예요.”

한의원이었다면 배꼽을 중심으로 제중과 신궐 쪽에도 침을 놓았겠지만, 급하게 대합실에서 놓을 수 있는 데까지만 침을 놓는 재마였다.

“선생님 노력을 봐서라도 우리 엄니, 볼일을 잘 봐야 할 텐데.”

“가스만 해소되셔도 당장 허리도 못 펴실 정도로 있었던 통증은 괜찮아지실 테니 걱정 마세요.”

재마가 침을 놓고 고개를 들어 목을 쭉 빼는 사이, 매표소로 갔던 강산이 돌아왔다.

“서울까지 가는 버스는 다행히 30분마다 있네요. 넉넉히 한 시간 후 표로 바꿔왔습니다.”

작은 소도시의 터미널이었지만, 서울 가는 버스는 부족함이 없었다.

“고마워요. 청년. 선생님도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어려우셨을 텐데 믿고 맡겨주셔서 제가 감사하죠.”

미자와 정남이 고개를 숙여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모습에, 재마와 강산도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정남의 옆에 미자가 앉아서 짐 안에서 사과 두 개를 꺼내 재마와 강산에게 건넸다.

“우리 과수원에서 딴 건데, 생긴 건 이래도 맛있어요.”

상품성 있는 사과들은 모두 판매를 하고, 모양새가 조금 안 좋거나 크기가 작은 거로 골라 큰딸네 집으로 가져가는 모양이었다.

“먹어보고 맛있으면 이따가 좀 가져가요.”

“그럴까요?”

강산은 넉살도 좋게 사과를 받아들어 옷으로 쓱쓱 닦더니 반으로 쩍 소리가 나도록 쪼갰다.

“아까 차표도 나서서 바꿔준다더니 성격도 좋네.”

“하하. 제가 좀 어르신들께 인기가 있죠. 봤냐? 이재마.”

칭찬 한마디에도 어깨가 하늘로 치솟는 강산은 사과를 먹음직스럽게 베어 물었다.

미자와 강산이 담소를 나누는 사이 허리도 펴지 못하던 정남이 어딘가 불편한지, 양 주먹을 쥐었다 피더니 재마를 불렀다.

“선생님, 이거 몇 분이나 더 맞아야 해요?”

“왜요? 어르신.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세요?”

“그게 아니고…….”

재마가 묻는 대답에 곧장 대답을 못 하는 정남의 모습을 보더니 미자는 옳다구나 박수를 쳤다.

“아이고 엄니, 신호 오나부네.”

“조용히 못 해. 뭐 소문이라도 낼 생각이여?”

큰 소리로 신호가 왔다고 알리는 미자를 구박을 한 정남은, 급한 나머지 더 이상 침을 맞지 못하고 재마에게 침을 빼달라 재촉을 했다.

재마가 놨던 침을 모두 빼내고 확인까지 하자, 정남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자리를 피해 화장실로 갈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참말로 고마워유.”

급하다 재촉을 하는 정남의 손을 잡고 화장실로 향하며 미자는 큰 소리로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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