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31화
“따라와서 영상 좀 찍어 달라고 했더니…….”
늦은 시간, 김정순 어르신의 침술까지 마치고 나니 산속에 있는 꿈속요양원은 칠흑처럼 어두워져 있었다.
시내로 나가 숙소를 잡을 생각을 가지고 왔던 일정이었지만, 늦은 시간이라며 한사코 말리는 진 주임의 배려에 직원들 관사에 재마와 강산은 하루 묵게 되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오래간만에 강산과 가볍게 맥주 한 잔을 할 시간을 놓칠 수는 없었다.
관사 밖으로 나와 작은 테이블에 앉으니 이제야 서울에서 떠나와 여행이라도 온 기분이 났다.
맑은 공기와 풀벌레 소리만으로도 머리까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역시 타이밍 좋게 머리가 맑아지면서 재마의 눈 앞에 금박 보상카드가 세 장 보였다.
‘오호라. 먼 곳까지 왔으니 보상 타임이 빠지지 않는구나.’
재마는 당장에라도 카드를 열어보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진 주임이 사회복지사들이 이용하는 공용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를 바구니에 담아 몇 캔 올려 보내줬다.
아쉽지만, 카드는 다음에 열어보기로 한 재마였다.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강산에게 캔을 따서 건네자 강산의 눈이 반짝거렸다.
“인마. 오늘 내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보고도 그래?”
강산과 함께 꿈속 요양원을 온 이유는 가볍게는 Vlog에 쓸 만한 영상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조금 더 진지하게는 요양원에 계시는 어르신들이 한두 분이 아니니, 어르신들에게 맞는 처방을 재마가 내리고, 침술을 강산에게 부탁할 생각이었다.
면허가 없는 강산이었지만, 한의학 수련을 함께 6년이나 해 온 재마는 강산의 실력을 잘 알았다.
강산의 침술은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재마의 침술 못지않았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김정순 어르신의 눈에 든 강산은 재마를 돕지 못하고 꼬박 어르신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오늘 하루만큼은 강산이 김정순 어르신의 아들 유정석이 된 하루였다.
“인정.”
오늘 강산이 김정순 어르신의 막내아들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재마였다.
아마 강산이 아니었다면 김정순 어르신에게 오늘 같은 하루를 선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정순 어르신에게 도움이 되고자 온 사람은 재마였지만, 본의 아니게 재마는 뒷전이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캔을 부딪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에 가져갔다.
“캬아.”
“시원하다.”
서울에서 마시던 맥주와는 차원이 다른 시원함이었다.
캔맥주보다 생맥주를 선호하는 강산도 다시금 맥주캔을 들여다볼 정도였다.
아무래도 깊은 산속 공기와 오늘 하루의 고단함이 묻어 있어 더욱 시원한 모양이었다.
화려한 안주와 음악 소리가 없어도 이곳이 천국처럼 느껴졌다.
“근데 우리 강산 님이 갑작스러운 연극에 참여하실 분이 아닌데…….”
“어떻게 안 하냐? 할머니가 그렇게 애틋하게 바라보시는데…….”
재마는 저녁 진료 내내, 강산이 김정순 어르신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에 의아할 따름이었다.
가업을 잇기 위해 한의대에 들어왔고, 한의학을 6년 동안 수련하고 나서도 한의사 면허에는 큰 뜻이 없었던 강산이었다.
-난 아직 환자들의 몸을 돌봐주기에는 부족한 것 같다.
의술을 펼치기보다 인술이 먼저라는 선조 한의사들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강산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강산과 동기 중에 가장 친한 재마였지만, 그가 앞으로 거취를 어떻게 할지 쉽게 물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의 모습으로 봐서는 상대적으로 연세가 있는 환자들을 더 많이 만나는 한의사로서 충분한 모습이었다.
“너 알고 있었지?”
“뭘?”
“유정석 씨…….”
“지금 세상에 없는 분이라는 거?”
진 주임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던 재마가 조심스럽게 묻자, 강산은 이미 눈치챘다는 듯 대답했다.
“그거 아냐? 김정순 할머니도 기다려서 올 수 있을 것 같은 자제분이었다면 그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리시지 않았을 거야. 찾아오지 못할 분이니 몇 날 며칠, 아니, 수 해를 한결같이 기다리신 거였지.”
이번 생에 다시 못 볼 아들을 본 김정순 환자의 눈빛을 읽었다는 듯 강산이 씁쓸한 대답이었다.
강산은 그 대답 이후로는 한참을 대답하지 않고 맥주를 들이켰다.
“내가 말했었지? 우리 할머니도 치매로 꽤 오랜 시간 병상에 계셨다고.”
오늘 하루 종에 마음속에, 머릿속에 자리 잡은 한 분을 떠 올리는 모양이었다.
그의 마음을 알기에 재마는 섣불리 무엇이라 묻지도, 대답을 하지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할머니도 그랬어. 우리 아버지가 매일 같이 아침저녁으로 할머니를 돌봐드리고, 엄마가 24시간을 붙어 있어도. 우리 아버지나 어머니보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고모를 더 기다리셨어. 고모를 어린 나이에 떠나보내셨거든. 시간이 갈수록 더. 고모가 세상을 떠날 나이보다 더 어린아이처럼 된 이후에도 고모를 그리워하셨어.”
김정순 어르신의 상황도, 그녀의 가족도 이해가 간다는 듯 강산은 작게 읊조렸다.
“미안하다. 괜히 내가 안 좋은 기억을 되새기게 한 것 같아서.”
치매 환자의 가족이 되지 않고서는 느끼지 못할 마음을 다시 꺼내게 만든 것 같아 재마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야. 오늘 내가 살아 돌아온 자식이 되어보니, 그리고 김정순 할머니와 지내보니. 그토록 미웠던 할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것 같더라. 정말 내가 살아 돌아온 정석 씨 같더라니까.”
강산은 사과를 하는 재마에게 손사래를 쳤다.
할머니께서 생전에 계실 때 그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아 점점 거리를 뒀던 강산이었다.
돌아가신 이후에도 안타까움보다는 안도감이 더 들기도 했었다.
오늘에서야 할머니의 마음이 이해가 갔고, 때로는 할머니의 딸이 되기도, 남편이 되기도 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붉게 물든 강산의 눈꺼풀이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야, 그나저나 너 솔직하게 말해봐.”
“뭐?”
“너. 뭐 있지?”
강산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재마를 똑똑히 바라봤다.
사위가 어둑어둑해진 산속 깊은 곳이라 선글라스는 당연히 벗고 있었던 재마의 눈을 강산은 놓치지 않았다.
“이상한데.”
[동공을 인식합니다.]
눈동자를 마주치자 어김없이 동공을 인식하겠다는 안내메시지가 재마의 눈앞에 나타났다.
이미 강산의 동공을 인식한 적이 있어, 건강상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재마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했다.
“너 원래, 양쪽 눈동자 색이 그렇게 차이 났냐?”
역시나 눈썰미가 있는 강산은 놓치지 않고, 재마의 한쪽 동공 색이 변하기 시작한 걸 눈치챘다.
“뭐 그런 거 있잖아. 오드아이라든가. 내가 몰랐을 리가 없는데…….”
6년을 함께 붙어 다녔으니, 그런 특징이 있었다면 강산이 몰랐을 리가 없었다.
‘하여간 보통 놈은 아니지.’
“워…… 원래 멜라닌 색소가 좀 부족해서 양쪽에 차이가 있었어. 근데 요새 좀 더…… 부쩍 그렇게 보이는…… 뭐 아무튼 그래. 신경 쓰지 마. 건강이 이상한 건 아니니까.”
재마는 생각이 나는 대로 핑계를 대충 둘러댔다.
“이상한데…….”
강산의 진맥을 짚지도 않고 그의 건강상태를 정확하게 읊었던 것도 봤다. 그 점 역시 의심의 한 부분이 됐으리라 예상했다.
“너, 나 불면증 있는 거 알았어?”
“그럼 네 상황에 잠이 잘 오면 정상이냐?”
동기들 대부분이 면허를 취득하고 개인 한의원에 취업을 할지, 대형 한방병원에서 인턴을 할지 고민을 할 시기에 면허 취득에 대해 고민을 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 강산뿐이었다.
물론 강산은 평소에 허허거리는 성격에 면허 취득은 고민거리도 안 되리라 생각은 했지만, 재마의 입으로 불면증이라는 것을 말한 이상 이렇게 치부할 수밖에 없었다.
“네 눈빛이 이미 날 정상으로 보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그야 그렇지.”
“진맥도 보지 않고 내 건강상태를 꿰뚫는 것처럼 읽어서 그때 소름 돋았잖아.”
강산은 지금도 그때 돋은 소름이 다시 돋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양팔을 손바닥으로 비벼댔다.
“너를 안 지가 6년인데 그것도 모를 리가 있냐?”
“진짜 그런 거지? 눈만 봐도 다 알아. 뭐 이런 거 아니지?”
강산은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재마를 바라봤다.
김정순 할머니가 입이 닳도록 말했던 것처럼 눈만 마주쳐도 환자의 상태를 훤히 다 아는 능력자 한의사가 아니냐는 물음이었다.
‘눈치 빠른 놈. 눈만 봐도 환자의 상태가 훤히 읽힌다. 읽혀.’
“그럴 리가. 그랬으면 내가 이 깊숙한 산골에 들어왔겠냐. 방송국을 가자고 했겠지.”
강산은 예과 때부터 눈썰미가 예사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 다른 분들 진료할 때는 몰라도 김정순 할머니 진료할 때랑 자침할 때는 영상 좀 찍어봤는데 볼래?”
강산은 휴대전화로 간단히 찍은 영상을 재마에게 건넸다.
기대하지 않았던 영상을 받은 재마는 강산이 건넨 휴대전화를 받아들었다.
-아니에요. 제가 멀리까지 왔으니, 여기 계신 어르신들 모두 건강상태가 어떠신가, 불편하신 데는 없나 확인해 보려고 해요. 김 여사님만 안 봐 드리고 갈 수는 없잖아요.
막내아들만 한의사에게 상태를 보여주고 자신은 진료를 받지 않겠다던 김정순 어르신의 모습과 그녀를 설득하는 재마의 모습이 고스란히 영상에 담겨 있었다.
“이 장면, 여기 여기. 캬. 너 이거 노린 거 아니냐? 두 손으로 지그시 환자의 손을 잡는 이재마 원장. 그는 의술이 아닌 인술을 펼치고 있었다. 뭐 이런 텍스트랑, 똭.”
“아니거든. 인마!”
한의사 면허는 합격도 하지 못한 녀석이 요즘 너튜브를 얼마나 본 건지, 극적인 장면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흥분했다.
정확한 편집점과 자막까지.
역시 예사롭지 않은 녀석이었다.
“그리고 이 영상은 아직 요양원 측이랑 협의된 영상은 아니라 Vlog로 사용할 수는 없을 거야.”
“하긴 그렇지.”
원래는 강산에게 영상을 부탁하게 된다면 진 주임과 미리 이야기를 하고 요양원 측의 허락하에 공식적인 영상을 찍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강산이 김정순 어르신 막내아들의 역할을 해내느라 그에게 부탁도, 진 주임과 영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틈도 없었다.
이왕이면 먼 곳까지 왔으니 좋은 영상 좀 담아가고 싶었는데 아쉬운 마음이 드는 재마였다.
“그래도 이 영상은 혹시 모르니 진 주임님한테 여쭤봐 봐. 적어도 이 먼 곳까지 면회를 자주 오지 못하는 가족분들에게는 보여드릴 수 있잖아.”
강산은 자신이 찍은 김정순 어르신의 영상이 폐기되는 것보다는 가족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는 모양이었다.
“내일 한번 물어볼게. 고맙다.”
정식으로 부탁도 하기도 전에 스스로 나서 재마에게 도움이 될지 몰라 영상을 남겨 준 강산에게 재마는 고맙다는 마음을 전했다.
“짜식. 맥주 한 캔 더 없냐.”
강산은 답지 않게 고맙다 이야기를 하는 재마에게 맥주 한 캔이나 더 따라는 듯 종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