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자를 읽는 한의사-30화 (30/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30화

“하이고. 퍼뜩 오라니까. 뭘 부끄러워하노.”

어르신들을 진료하는 사이 진료실로 정순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원장님, 이제 김정순 어르신만 진료 보시면 오늘 하실 일은 끝나실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 횡성까지 꿈속 요양원을 찾아준 것도 고마운데 김정순 어르신뿐 아닌 다른 어르신들의 건강상태까지 봐준 재마가 고맙고 미안한지 진 주임의 얼굴에는 송구스러움이 묻어났다.

복도를 떠들썩하게 한 정순이 그제야 진료실 앞까지 다다랐다.

“김 여사님 얼른 들어가세요.”

“가자. 얼른.”

김정순은 강산의 손을 꼭 붙잡고 진료실 안으로 들어왔다.

재마와 함께 요양원을 봉사차 온 강산은 자신이 도울 수 없는 상황에 친구인 재마만 고생을 했을 것이 눈앞에 훤해 쉽사리 진료실로 들어오지 못했다.

“슨생님. 즈이 아들인데요.”

밖에서 강산을 끌고 들어오기 위해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던 것과 다르게 재마 앞에 마주 앉은 정순의 목소리는 다소곳했다.

강산의 손을 꼭 쥔 정순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정말 강산을 아들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노마가, 어렸을 때부터 몸이 그래 허약했슴니더.”

“아 그러셨구나.”

재마는 정순이 강산을 자신의 아들로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그녀의 이야기를 잘 듣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강산의 표정을 살핀 재마는 몇 시간 동안 정순의 아들 역할을 하는 그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언제 한번 구 원장님 오시면 진맥 한 번 보고, 약도 해묵이고 싶어가지고 날을 잡고, 또 잡고 싶은데 원장님도 안 오시고…… 이노마도 즈이 엄마 얼굴 보러 올 생각도 안 하고. 속만 새카맣게 다 탔슴니다.”

“잘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왔잖아요.”

재마는 자신을 구 원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정순에게 굳이 사실대로 말을 하지 않고, 그녀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생각이었다.

아들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강산과 그 연극에 함께하는 직원들, 거기에다 재마까지 더해지면 정순에게는 완벽한 하루가 될 것이었다.

“어디 볼까요?”

재마는 강산에게 자신의 앞쪽 의자에 앉으라고 눈짓을 했다.

강산은 지금까지 자신의 할머니를 생각나게 하는 정순과 오후 시간을 함께 보내며 아들 역할을 했지만, 재마 앞에 마주 앉으니 괜히 민망한지 목을 가다듬었다.

“흠흠.”

“자, 성함이……?”

강산의 이름을 알았지만 정순이 애타게 기다리는 아들의 이름을 재마가 알 리가 없었다.

“유정석이구만요. 정석이. 우리 막둥이.”

정순은 강산을 대신해 막내의 이름을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아이고. 뒤통수도 잘생겼지. 우리 막내아들 참 잘 생겼죠.”

정순은 강산의 뒤통수만 봐도 뿌듯한지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마나 아들이 보고 싶으면 저러실까 하는 마음에 옆에서 지켜보던 진 주임은 눈물을 삼켰다.

“어머니 제 머리 닳겠어요.”

“아이고. 우리 아들 머리 닳으면 안 되지. 잘 부탁드립니다. 원장님.”

강산이 자신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는 정순에게 손을 뻗어 손을 잡았다.

정순은 강산의 행동에 민망해하기는커녕 재마 앞에서 깊숙이 인사를 했다.

‘저 녀석이 저렇게 살가운 녀석이었나.’

한의학과 동기로 6년간 함께했던 강산이었지만 정순을 살뜰히 챙기는 모습에서 그답지 않은 모습을 보게 된 재마였다.

“자, 유정석 환자. 제 눈 바라보시겠어요?”

“눈이요?”

“네. 동공만 봐도 환자의 기의 흐름을 읽을 수 있죠.”

재마가 강산의 동공을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마주쳤다.

한의학과에서 재마와 함께 공부한 강산이기에 재마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환자의 동공으로 기의 흐름을 보는 건 맞는데…….’

동공으로 기의 흐름을 읽는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보통은 진맥을 먼저 시작했다.

강산이 고개를 갸웃하자, 재마는 목을 ‘흐음’하고 다듬었다.

“뭐 혀. 우리 원장님은 눈만 봐도 훤히 다 아신다니께. 얼른 눈동자 들이밀어.”

정순이 강산의 등을 바짝 들이밀었다.

이 녀석, 뭔가 이상하다 느낀 건지 강산이 재마의 눈을 똑똑히 바라봤다.

‘재마 눈동자 색이 원래 저렇게 차이가 났나?’

강산은 자신 앞에 앉아 있는 동기 재마의 양쪽 눈동자의 색이 확연히 다른지, 고개를 갸웃했다.

[이름 : 강 산]

나이 : 27

재마의 위쪽에서 연둣빛 섬광이 나타나는 모습에 재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트레스로 소화가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또 그 연둣빛 섬광이 머리 위로 솟구친 모양을 나타내고 있었다.

스트레스로 두통과 불면증을 동반하는 건 자연스러운 이치였다.

평소 성격이 좋은 그였지만, 동기들이 모두 면허에 합격해 한의원에 취직을 한 상황에서 자신만 방황을 하고 있으니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음…… 강…… 아니, 유정석 환자분은 위염이랑 식도염이 있으시네요. 잠도 잘 못 주무실 것 같고…… 요즘 스트레스가 많으신가 봐요?”

매일 허허 웃기만 하고 실없는 소리를 잘하는 강산이라 스트레스를 잘 안 받으리라 생각했던 재마였지만, 알고 보니 속으로는 꽤 앓고 있는 모양이었다.

“너 진맥도 안 짚고…… 아니, 원장님. 진맥도 안 짚으시고 지금.”

자신의 상태를 콕콕 집어낸 재마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강산은 말을 더듬었다.

“진맥이야, 이제 짚으면 되지요. 혈색, 동공만 봐도 환자의 상태가 아는 게 명의 아니겠습니까.”

재마는 당황해하는 동기 강산 앞에서 농담을 했다.

그러자, 재마를 제외한 정순과 진 주임이 박수까지 치며 맞받아쳤다.

“그럼요. 정석아. 이분이 서울에서 엄청 대단하신 원장님이야. 운 좋은 줄 알어. 알았어?”

“네? 아. 네. 그…… 그렇긴 한데.”

강산은 자신만 빼고 다른 사람들은 재마의 실력만 믿고 있다는 듯한 반응에 뒷머리를 긁적였다.

“김 여사님. 막내 아드님, 건강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까 위…… 뭐시기랑 식도 뭐시기가 안 좋다고 한 거 다 들었어요.”

정순은 막내아들이 아프기나 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한가득한 모양이었다.

“현대인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정도예요. 그리고 제가 약도 좋은 거로 보내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시고, 요양원 생활 잘하세요. 자, 이제 어르신 진료 볼까요?”

“아닙니다. 원장님. 제가 원장님 뵙고 싶었던 건 요, 눈에 아른거리는 아들놈 때문이지. 저 때문이 아니었어요.”

정순에게 자리에 앉으라 손짓을 하자 정순은 두 손으로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숨겨두었던 지폐 몇 장을 꺼냈다.

“원장님, 여기 약값은 제가 없는 살림에 어렵게, 어렵게 준비했어요.”

“어르신. 아닙니다. 제가 서울에서 봉사차 왔으니까…….”

“어머니, 넣어두세요. 제 약은 제가…….”

강산과 재마는 동시에 당황해서 정순의 주머니에서 꺼낸 돈을 다시 돌려주었다.

“무슨 소리래요. 약을 지어주시면 약값을 받으셔야지…….”

정순은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재마의 난감한 표정에 진 주임이 나섰다.

“김 여사님, 결제는 나중에 다 같이할 거니까 일단 주머니에 넣어두세요. 지금 여기서는 괜찮아요.”

“그런 거예요? 아, 그러면. 이따 꼭 이야기해요. 내가 막둥이 약 한재 해줘야 하니께.”

“네. 김 여사님도 이제 여기 앉으세요. 진료 보셔야죠.”

진 주임이 다시 정순을 앉히려고 하자, 정순은 한사코 거절했다.

제 볼일은 아들의 약을 지어주는 것에서 끝이라는 것이었다.

“제가 멀리까지 왔으니, 여기 계신 어르신들 모두 건강상태가 어떠신가, 불편하신 데는 없나 확인해 보려고 해요. 김 여사님만 안 봐드리고 갈 수는 없잖아요.”

재마는 한사코 사양하는 정순을 설득하기 위해 그녀의 두 손을 맞잡았다.

가녀린 정순의 손을 잡으니 그녀의 세월이, 요양원에서 아들만 기다리던 그 시간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럼 한번, 저도 볼까요?”

“네. 그러셔야죠. 그래야 아드님이 어머니 걱정 안 하고 일도 열심히 하시고, 잠도 푹 주무시죠.”

“맞아요. 어머니. 제가 어머니 건강하신 모습을 봐야 잠을 푹 잘 것 같아요.”

옆에 있던 강산이 재마를 거들었다.

아들이라 생각하고 있는 강산을 슬쩍 올려다본 정순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는 별로 아픈 디는 없어요. 늙으면 여기 쑤시고, 저기 쑤시고. 다 하죠. 원래가 건강 체질이었어서…….”

정순은 자신은 아픈 곳이 없고 걱정할 곳이 없다는 듯 혼잣말을 했다.

[이름 : 김정순]

나이 : 82

“흐음.”

재마는 정순의 병세를 읽고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지금까지 치매 어르신들의 동공을 보고 비슷한 패턴의 섬광을 읽었지만, 김정순 환자에게서는 또 다른 섬광이 나타나 있었다.

외상 증상이 있을 때 나타나는 섬광이었는 데, 그 섬광이 뇌 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연세가 있으니 당뇨와 혈압 같은 성인병은 말년의 동반자처럼 함께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외상형 허증 치매라는 것이 왠지 모르게 마음에 걸렸다.

정신적인 충격에 의한 치매라는 것인데, 지금까지 꿈속 요양원 어르신들에게 기를 순환시켜드리는 침을 놔드렸지만 정순에게는 효과가 미미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건강하시네요.”

“그렇죠? 제가 건강하다니까요. 다들 무릎 아프다 할 때 무릎 수술도 받지 않고 산으로 들로 나물도 캐러 다니고. 이 녀석 서울로 발령받아 올라갔을 때는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도 갔어요. 집이 을매나 많던지. 등산을 하는 줄 알았어요. 동네 어귀에서부터 집까지 올라가는데…….”

정순은 막내아들의 자취방을 떠올리며 눈에 눈물이 맺혔다.

손은 가녀렸지만, 자식들을 키우느라 고생을 많이 하신 모양이었다.

“베드로 가서 누우실게요. 제가 더 건강하시라고 좋은 침 놔드릴 테니까 아드님하고 자리 옮겨 가시겠어요?”

재마는 정순이 침마저 거부를 하기 전에 얼른 베드로 모시라는 듯, 강산에게 다급한 신호를 보냈다.

강산은 재마의 뜻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정순의 손을 붙잡고 진료실 옆 베드로 자리를 옮겼다.

“진 주임님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 데…….”

“네. 말씀하세요. 원장님.”

늦은 시간까지 어르신들을 진료를 봐준 것도 감사하고 먼 곳까지 와준 재마에게 뭐든지 해줄 것 같은 얼굴인 진 주임이었다.

“혹시 김정순 어르신은 어쩌다 치매가 찾아왔는지 아시나요?”

“네?”

“아, 진맥을 짚으면 어느 정도 알 수 있거든요. 외부 충격에 의한 뇌 손상으로 온 치매인지 아니면 기력이 쇠해져 생긴 치매인지…….”

어떤 의사도 지금까지 묻지 않았던 질문에 진 주임은 조금 당황한 모양이었다.

“아……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말씀하셔도 됩니다.”

“오늘 김 여사님이 기다리셨던 아드님은, 7년 전에 돌아가신 아드님이세요. 연세도 있으신 상태였는 데 갑작스럽게 젊은 나이에 아드님이 돌아가시자 충격으로…….”

재마가 예상했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대답이었다.

자식을 잃는 충격은 겪어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충격일 터였다.

사람의 뇌는 본인이 극도로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서는 충격적인 상황을 스스로 지워내기도 했다.

종종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던 일이지만 과학적으로도 밝혀진 일들이었다.

김정순 어르신은 그 이겨내기 힘든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억지로 기억을 지워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애타게 기다려도 오지 않던 자신이 스스로 지워냈던 죽은 아들이 오늘 그녀를 찾아왔으니 오늘만큼은 그녀의 마음이, 기억이 행복함으로 가득 찼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잘 알겠습니다. 김정순 어르신 끝까지 좋은 기억만 남기실 수 있게 제가 치료 잘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진 주임은 정순과 강산이 있는 베드로 향하는 재마에게 깊숙이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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