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29화
“어르신, 이쪽을 향해서 한번 앉아 주시겠어요?”
다행스럽게도 꿈속 요양원은 중증알츠하이머 증상을 앓고 있는 환자들보다는 경증인 어르신들이 더 많은 요양원이었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은 사회복지사의 도움을 받아 차례차례 진료를 보기 위해 마련된 진료실로 들어오셨는데, 모자란 손을 도와달라고 강산을 데리고 왔던 재마는 아쉬웠지만 아쉬워할 수만 없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저 한번 바라봐주세요.”
그래도 동공을 읽으면 어르신들의 몸이 어디가 좋지 않은지, 환자의 설명이 없어도 알 수 있는 건 재마 스스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네. 슨생님.”
한가지 문제점이 있다면 이곳 어르신들의 특징이 재마의 눈을 제대로 맞추시기 어려워하신다는 점이었다.
동공으로 환자의 병을 읽기 시작했던 재마에게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환자명 : 정말순]
나이 : 87세
환자들의 공통된 특징은 짙은 회색의 섬광이 뇌를 중심으로 퍼져 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때때로 외상 이후에 알츠하이머 증상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런 경우에는 외상을 겪은 곳의 상태도 섬광을 통해 추측할 수 있었다.
어렵사리 정말순 환자의 동공을 확인한 재마의 미간이 구겨졌다.
정말순 환자를 도와 함께 자리하고 있는 사회복지사 은정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재마를 바라봤다.
“원장님, 어르신 상태가 많이 좋지 않으신가요?”
그렇지 않아도 구 원장의 외손자인 한의사가 봉사를 온다는 소식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던 은정이었다.
그동안 구 원장과 인연이 닿아 꿈속 요양원 환자들에게 성심성의껏 치료를 해왔으나 구 원장 후임으로 오게 된 채 원장의 진료는 환자가 아닌 보호자로서는 불만족스러운 상황이 여러 차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순 환자께서 아무래도 연로하시기도 하시고, 담 독소가 위장 바깥쪽에 많이 쌓여 있으신 것 같네요.”
담 독소가 뭉쳐 쌓여 있을 때 나타나는 섬광이 정말순 환자의 명치에 꽉 막혀 있는 모습이었다.
재마는 정말순 환자의 명치 쪽을 꾹꾹 눌러보았다.
“아이고. 슨생님. 아파유.”
정말순 환자는 힘이 없는 목소리였지만, 아픈 지점에서는 으악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소화가 어찌나 잘 안 되고 있는지, 눌러본 재마가 놀랄 정도로 단단하게 뭉쳐 있었다.
소리를 지르는 정말순 환자의 손을 은정은 꽉 쥐었다.
제대로 표현도 못 하시는 분이 얼마나 아프면 이렇게 고통스러워하시는 건지 안타까울 뿐이었다.
“요즘 정말순 어르신의 상태가 이 전보다 확연히 안 좋아지신 상태인가요?”
“네. 아무래도 연세도 있으시고 알츠하이머에 걸리셨으니까요. 날씨가 더워지면 어르신들도 기력도 쇠약해지셔서 힘들어하시기는 해요.”
은정을 비롯한 사회복지사들은 어르신들의 건강이 계절의 변화에 따라 상태가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예측하고 미리 대비해 두고는 했다.
간혹 자녀들이 면회를 온다거나, 외출을 다녀오면 기력회복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자신과 같은 처지인 친구 같은 어르신들과 함께 지내고, 종종 봉사활동을 오는 봉사자분들과도 지내지만 그만큼 가족을 그리워한다는 뜻이었다.
반대로 면회 기간이 길어진다거나 가족들과의 연락이 뜸해지면 기력이 약해지기도 했다.
이럴 때는 요양원 측에서도 가족에게 연락을 해 면회를 추진하기도 했다.
정말순 환자는 요양원에 계신 어르신 중에서도 고령에 속하시고 요양원에 들어오신 지도 꽤 되어 이번 여름이 시작되자마자 기력이 급격히 쇠약해진 것이 눈에 보였다.
“치매는 뇌의 노화로 인해 발생하는 허증 치매와 몸 안에 담음 등이 생기면서 갑자기 발생하는 실증 치매 두 가지인데 정말순 어르신의 경우 허증 치매로 시작되었지만 최근 담 독소가 쌓이면서 기의 순환이 활발하지 못해 실증 치매의 증상도 함께 나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매일을 알츠하이머 환자들과 생활했던 은정이었지만 의학적으로 알츠하이머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재마의 설명에 흠칫 놀란 얼굴이었다.
“그러기도 하나요?”
“몸 안의 장기가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어 우리 몸속의 기는 순환을 하는데, 한 곳이 막혀 순환이 잘 안 되어 병이 생기면 다른 곳에서도 병이 다발적으로 생기기도 합니다.”
재마는 은정이 정말순 어르신의 가족으로 온 보호자는 아니었지만 환자의 상태를 정확하고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뇌의 노화로 시작한 허증 치매이든, 몸 안의 담음이 쌓여 생긴 실증 치매이든 병의 시작은 하나였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여러 증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하시면 이해하기 쉬우실 겁니다.”
“네. 정말 이해하기 쉽네요.”
은정은 꿈속 요양원에서 일을 한 지 2년이 다 되어갔지만 어르신들의 상태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다.
마음으로는 백번 이해하고, 자신의 직업이 된 사회복지사의 일을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종종 머리로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있었는데 차분한 재마의 설명에 이해가 가지 않았던 부분들까지도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제가 봉사자로 방문해서 해드릴 수 있는 처방은 기 순환을 시켜드리고, 위와 장에 쌓여 있는 담적들을 풀어주는 데 미약하게 도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방법도 있기는 한가요?”
재마에게 제아무리 병을 읽고 그에 딱 맞는 처방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요양원 봉사를 와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가 있었다.
요양원에 있는 모든 알츠하이머 환자들에게 약을 처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의학적 방법으로는 보중익기탕과 황련해독탕이 과학적으로 치매에 효과가 있다고 학술지에 올라와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격이 비싼 한약을 어르신들께 모두 공급해 드릴 수 없는 상황이겠네요.”
“그렇죠.”
은정은 안타까운지, 정말순 어르신의 가디건 어깨의 숄을 매만질 따름이었다.
“어르신, 저쪽에 베드가 비었네요. 자리 이동하시겠어요?”
이전에 베드에 누워서 침을 맞던 어르신의 치료가 끝날 때까지 조금 시간을 가지고 상담을 하던 재마는 정말순 어르신을 일으켰다.
조금 전까지 명치를 누르자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던 말순의 손에는 땀이 가득 차 있었다.
긴장을 한 모양이었다.
“아유, 슨생님. 저는 침은 안 맞아유. 아야 해서 싫어요.”
어느새 아이처럼 변해 버린 말순은 체면 같은 것을 챙기지도 않았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을 모면하기 급급했다.
침상에 나란히 누워 날카로운 것을 꼽고 있는 어르신들의 모습에 뒷걸음질을 칠 뿐이었다.
“괜찮아요. 정말 하나도 안 아프게 놔 드릴게요.”
“기냥 아프고 말래유.”
정말순 어르신은 다른 어르신들과 다르게 치료를 받는 것이 두려우신지, 치료를 거부하고 울기 시작하셨다.
“어르신, 정말 괜찮아요. 저도 맞을게요. 원장님 제가 먼저 맞을게요. 똑같이 놔 주실 수 있으시죠?”
은정은 말순을 설득하기 위해 자신이 먼저 맞겠다며 건너편 베드에 먼저 누웠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재마가 당황해했지만, 은정은 전혀 당황하지 않은 눈치였다.
“진짜 너도 맞을 거야? 같이 맞을 거야?”
말순은 자신보다 먼저 침대에 누워 침을 맞을 기세인 은정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봤다.
“할머니. 제가 거짓말하는 거 봤어요?”
할머니라는 호칭과 함께 살갑게 묻는 은정의 목소리에 말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재마는 베드에 누운 은정의 동공을 빠르게 스캔했다.
[이름 : 구은정]
나이 : 35
재마는 은정의 오른쪽 팔목을 잡아 가볍게 짚었다.
진맥을 통해 그녀의 상태에 맞게 침을 놓아줄 생각이었다.
이왕 침을 맞기로 한 거면 정순을 위해 먼저 나서서 자리에 누운 은정에게 도움이 되는 치료를 하고 싶은 재마였다.
“원장님, 저는 그냥…… 가볍게…….”
은정은 갑작스러운 진맥에 당황한 건지, 재마를 바라보며 눈을 찡끗거렸다.
말순이 못 알아챌 정도로 침놓는 시늉만 해도 된다는 뜻 같았다.
“복지사님도 치료받으셔야겠습니다. 상부로 기가 몰려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과다한 상태시네요. 이미 담이 발생하여 기의 승강도 막혀 있고요.”
항상 어디에서 일이 터질지 모르는 요양원에서 일을 하며 식사도 제때 하지 못하고, 한다 해도 급하게 먹는 것이 일상이 되어 있는 은정은 자신의 소화기관이 정상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예상했다.
하지만 소화가 되지 않는 것이 스트레스가 과다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당장 몸에 병으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문제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미리 치료를 받아 나쁠 것은 없었다.
“어르신들만 기 순환을 시켜드리고 담적을 완화 시키는 것이 정답은 아닌 것 같군요. 복지사님도 나란히 누워서 침 맞고 계세요.”
재마는 은정의 양발이 보이도록 베드에 자리를 잡게 했다.
“발에 놓는 침은 조금 아파요.”
“정말 아파요? 선생님? 나는 아픈 건 싫은데.”
아프다는 말을 기가 막히게 알아챈 말순이 재마의 말에 끼어들었다.
재마는 은정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말순을 향해, 따뜻하게 대답했다.
“어르신은 안 아프게 놔드릴게요. 복지사님은 아프게 놔드릴까요?”
“아니에요. 우리 은정이. 착해요. 아프지 않게 해요.”
복지사인 은정이 평소에 말순에게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한마디였다.
말순은 자신의 몸도 성치 않지만 자신보다 먼저 나서서 침을 맞는 은정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첫 번째 발가락과 두 번째 발가락의 사이 발등과 발허리뼈로 이어지는 곳, 그곳이 바로 태충혈이었다.
재마는 혈 자리를 잡고 태충혈에 침을 놓았다.
평소에도 아프기로 유명한 혈 자리 중 하나여서 은정은 미간을 순식간에 구겼지만,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말순을 위해 표정 관리를 했다.
“아파?”
“아뇨. 하나도 안 아파요.”
은정은 말순을 안심시키기 위해 하나도 안 아프다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평소에도 이곳, 오목한 곳을 눌러주시면 두통에도 좋고, 불면증에도 좋으실 거예요.”
“지압만 해도 효과가 있나요?”
조금 전, 예상했던 것보다 태충혈의 침이 아파 잠시 놀랐지만 평소에 불면증으로 잠을 쉽게 들지 못하는 은정은 솔깃한 모양이었다.
“네. 지압만으로도 충분히 효과 있어요.”
재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프지 마. 은정아. 알았지? 잠도 잘 자고.”
말순은 자신이 아픈 것은 잊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은정은 자신이 치료를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것처럼, 요양원 어르신들에게 치유를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오늘은 뜻밖의 치유를 받은 기분이었다.
“원장님. 감사합니다.”
“아뇨. 제 자침보다는 어르신의 손길이 복지사님이 힘드신 곳에 효과가 있겠는 데요.”
재마는 두 사람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