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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읽는 한의사-27화 (27/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27화

-이번 주 토요일 진료

12시 마감합니다.

명의 한의원 대문 앞, 좀처럼 붙지 않던 공지가 붙었다.

명의 한의원을 찾는 환자들마다 공지사항을 확인하고, 이번 주 토요일은 서둘러 진료를 봐야겠다며 한마디씩 했다.

“이게 뭐여?”

“이번 주에 무슨 일 있당가?”

진갑순 할머니와 박옥숙 할머니도 이제는 하루의 일과처럼 들리시는 한의원에 들어오며 공지사항이 눈에 띈 모양이었다.

“아, 이번 주에 원장님이 지방 다녀오실 일이 있어서요.”

“지방?”

계단을 올라 대문이 삐걱 소리를 내고 열기도 전에 정 실장이 알아채고 문을 열어 두 환자를 반겼다.

오랜 단골인 두 어르신은 문을 열지 않아도 발소리, 목소리만 들어도 두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명의 한의원에 와서 침을 맞는 진갑순 할머니는 요즘 소화가 잘되어 새로운 하루를 사는 것 같다고 이야기를 종종 할 정도였다.

속이 편안해지니 마음도 편안해지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니 그 재미 또한 삶의 낙이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환자들은 어쩌고 일찍 문을 닫느냐며 예민하게 반응했겠지만, 이제는 마음의 여유를 찾았다.

재마는 갑순의 성격까지 변하게 만든 실력이라며 노인정에서 다른 어르신들까지 인정받았다. 그리고 발길을 돌렸던 환자들의 발목을 확실히 잡아버렸다.

“구 원장님이 봉사 다니시던 요양원에 다녀오시겠다고 하셔서요.”

“요양워언?”

“아이고 잘됐네. 참말로 잘했어.”

자신들이 있는 요양원도 아니고 연고가 전혀 없는 요양원에 재마가 찾아간다는 소식이었지만, 제 일처럼 좋아하는 두 사람이었다.

먼 곳에서 구 원장의 도움을 받고 있었던 어르신들이 구 원장의 발길이 뚝 끊겨 얼마나 서러웠겠냐는 말도 덧붙였다.

“우리처럼 하루하루 다른 몸에는 다른 거 다 필요 없어. 침이 최고여.”

“맞어. 맞어.”

“거기다 젊은 원장이 침을 좀 잘 놔? 분명 거기 가서도 잘 허겄지.”

“암만.”

“뭘 그렇게 잘했어요?”

처치실에서 침을 놓고 진료실로 가던 재마는 진 할머니와 박 할머니의 이야기가 자신에게 향하는 이야기인 줄도 모르고 물었다.

미리 공지를 해둬서인지, 토요일 단축 진료에 금요일 오후부터 환자들이 몰려 진료를 받았다.

이렇게 명의 한의원의 처치실이 꽉 차는 것도 오래간만이었다.

“아이고. 착한 사람 나왔네.”

“네? 저요?”

갑순은 자신들이 칭찬한 재마가 눈에 보이자 박수까지 쳐가며 환대했다.

“아이고. 오늘은 구 원장님을 더 빼다 박았네. 빼다 박았어. 마음을 곱게 쓰고 어르신 공경도 할 줄 알고 해야 한의원도 잘되는 거여. 이제 명의 한의원 환자들도 꽉꽉 들어차고, 예전처럼 바빠지겄구만.”

오래간만에 명의 한의원에 환자들이 많은 것도 저들의 기쁨인 것처럼 기뻐하는 진 할머니와 박 할머니.

“오늘은 내일 단축 진료 때문에 환자분들이 많이 오신 것 같아요.”

갑작스러운 환대에 재마는 당황스러운지, 환자와 정 실장 사이를 번갈아 봤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는 뜻이었다.

“원장님 이번 주 토요일에 요양원 봉사를 가신다는 소식에…….”

정 실장은 지금 이 상황이 나쁜 상황은 아니잖냐는 듯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단축 진료 덕에 환자들이 많아 정신은 없었지만 이런 분위기도 오래간만일 뿐 아니라, 어르신 두 분의 입방아에 오르는 말들이 긍정적인 효과도 보일 수 있었다.

재마는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우리 조금 이따 다시 올게. 젊은 원장님 먼 길 간다는 데 계란이라도 삶아줘야지.”

“네?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냥 침 맞고 가세요.”

재마는 계란을 삶아 오겠다고 다시 한의원 문을 나서려는 갑순의 팔을 잡고 만류했다.

가운 안쪽 주머니에서 전화벨이 울리자 재마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강산

동기인 강산의 번호가 뜨자, 재마는 미간을 찡그렸다.

너튜브를 시작해 볼까 하고 자신보다는 조금 더 그런 쪽으로 잘 아는 강산에게 깨톡만 보내놨을 뿐이었다.

깨톡을 확인하자마자 전화를 한 건지, 울려대는 전화벨에 바로 전화를 받아야 할지 말지 고민을 했다.

처치실이 가득 찰 정도로 환자가 많은 것도 드문 상황일 뿐 아니라, 강산에게 홍천을 함께 갔으면 좋겠다는 말을 꺼낼 생각이었다.

“원장님, 전화 받으셔요.”

“우리 신경 쓰지 말고. 계란 삶아 오지 말라 했으니까 여기서 기다리지 뭐.”

진 할머니와 박 할머니는 정 실장이 건네는 쌍화탕을 받아 들고 평소와 같이 평상에 앉았다.

두 분에게 평상은 대기실 의자이자, 이야기꽃을 피우는 장소였다.

“잘혔어. 잘혔어.”

“구 원장님이 봉사를 하도 많이 허시고, 좋은 일도 허시고. 우리 같은 노인네들 병도 고쳐주시고 해서 복이 많으시잖어. 그래서 외손주도 이렇게 번듯하게…….”

“네네. 처치실로 들어가 계세요. 조금 이따가 진료하러 들어갈게요.”

재마는 이야기보따리를 늘어놓으려는 두 할머니들을 향해 이야기하고는 휴대전화를 들고, 한의원을 빠져나왔다.

그 안에서 전화를 하면 통화 내용이 해인동 바닥에 소문이 쫙 날 것이 뻔했다.

밖으로 나온 재마는 목소리를 낮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 원장. 바쁜가봐?

“바쁘지 그럼. 내가 너처럼 한가할 줄 알고?”

개인 한의원을 운영하겠다는 말에 걱정부터 하던 강산은 이제는 아주 이 원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너는 내가 왜 한가하다고 생각하는 거냐.

“백수가 한가하지. 그럼.”

-어허. 백수라니.

지방에서 한의원을 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한의대에 진학했던 강산은 대한민국에서 제일간다는 한의대를 졸업했지만, 동기들처럼 한의학이 정말 자신의 길인지 모르겠다며 공부를 소홀히 하더니 졸업하는 해에 면허를 취득하지 못한 상태였다.

-근데 갑자기 너튜브?

강산이 생각해도 재마의 이미지에 너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것은 딱히 어울리지 않는지, 반문했다.

역시나 재마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말주변이 없어 너튜브 채널을 운영할 수 있을까 걱정부터 할 것이 뻔했다.

-역시 개인 한의원을 운영하는 게 쉽지 않지?

척하면 척, 착하면 착이라는 듯 강산은 눈에 선하다는 것처럼 말을 했다.

말주변도 없는 녀석이 너튜브 채널을 준비할 정도면 말 다 했다는 뜻이었다.

-아니면, 너 최중기 그 자식 의식하는 건 아니지?

생각해 보니 중기 녀석이 계속해서 동기 단톡방에 자신이 너튜브에 나오는 영상을 올리는 것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최중기 그 자식을 내가 왜 의식해.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병원 홍보 좀 될까 하고. 너 토요일에는 시간 되는 거지?”

-시간이야 있지.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준비도 없이 너튜브를 시작해?

“일단 와. 와서 봐.”

재마는 강산에게 긴말할 것 없다는 듯, 토요일에 강산과 약속을 덜컥 잡아버렸다.

* * *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

약속이 없다는 강산과 덜컥 약속을 잡고, 약속 장소도 터미널로 바로 잡아버린 재마였다.

홍천의 요양원에 봉사를 가자고 하면 쉽게 나설 강산이 아니었다.

유정에게 너튜브 채널을 위해 코치를 받은 재마는 봉사뿐 아니라 소재가 될 수 있는 영상도 찍어올 생각이었다.

혼자 홍천을 가서는 봉사도, 영상도 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재마는 강산을 꼭 데려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함께 갈 요량으로 약속을 잡은 재마는 오늘 두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 아직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너네 한의원에서 만나는 줄 알았더니, 고속버스 터미널은 무슨 일이야?”

“네가 말했던 것처럼 준비도 없이 너튜브를 찍을 수는 없잖아.”

“그래서. 우리 어디 가는 건데?”

“일단 따라와.”

재마는 자신이 들고 있던 가방 두 개 중 하나를 강산의 품에 덜컥 안기고는 앞장섰다.

홍천행 버스를 타기까지 아무런 정보도 없던 강산은 도대체 재마가 어디를 가자고 하는지 추측을 할 수 없었다.

“너네 한의원 해인동에 있다고 하지 않았냐? 왜 차가 시외로 나가지?”

얼떨결에 홍천행 버스를 올라탄 강산은 의아하다는 듯, 재마에게 물었다.

“오늘 홍천 가는 거야.”

“홍천?”

뜬금없이 홍천에 가는 것이라 말을 하는 동기의 말에 강산은 말문이 막혔다.

너튜브 촬영에 대해 이야기 나누자는 녀석이 홍천까지 가자니, 이해할 수 없는 녀석이었다.

“야, 뭐 일상 Vlog 이런 거 찍으려고 다짜고짜 여행부터 잡은 건 아니지? 한의사가 무슨 여행 Vlog야.”

생각해 보니 어울리지도 않는 선글라스를 쓰고 나타난 재마의 모습이 이상했다.

말도 없이 둘만의 여행을 가는 건 아닐까 의심을 했다.

“인마, 남자 둘이 시골 여행 가는 거 아무도 안 보는 거 다 알아.”

“그래. 우리 둘이 나가 봤자 오디오가 비기나 하지. 어울리지 않는 선글라스나 벗고 이야기해. 실내에서 무슨.”

“어허. 비싸게 주고 산 선글라스야. 내버려 둬.”

재마는 자신의 선글라스를 벗기려는 강산의 손을 잡아챘다.

재마는 고속버스 터미널부터 시작해, 버스 안에서까지 뜻하지 않게 사람이 많은 곳을 오게 되었다.

새로운 능력을 가지고 많은 사람이 많은 곳을 갈 일이 없었던 그는 이제는 티가 나도록 양쪽 동공의 색이 차이가 있어 부담스러웠다.

그러다 어젯밤, 선글라스를 생각해 냈고 자신의 눈동자를 가리자 새로운 곳에 가도 부담 갖지 않을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도 여행을 가는 설렘과 함께 너도나도 선글라스를 끼고 버스에 오르니 선글라스를 낀 자신이 눈에 띄지도 않았다.

“너튜브는 도와줄 친구가 있어. 이미 채널 운영을 하고 있는 친구고.”

“그럼 나는. 나는 왜 부른 건데.”

너튜브를 위해 함께 홍천행을 하는 줄 알고 있는 강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제 갈 길이 한의학이 맞는지 고민을 하는 친구를 끌고 봉사를 가는 것이 맞을 지 걱정이 되는 재마였지만, 강산이 아니면 자신을 도울 만한 친구 녀석도 없었다.

정말 Vlog를 위해서라도 강산이 자신의 영상을 찍어 주기만 해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오늘 네 침 실력 좀 빌리자.”

“뭐? 너 이거 의료봉사 가려고 짐 싼 거야?”

그제야 자신이 들고 온 가방이 부항과 함께 약재, 그리고 침이 들어 있는 가방임을 깨달은 강산이었다.

“야, 나 면허도 못 땄어. 알고 말하는 거지?”

“면허는 못 땄어도. 수련은 6년이나 같이 했잖아. 네 침술 능력은 나도 다 알아. 오늘 손이 많이 바쁠 테니까 좀 도와. 틈틈이 영상도 찍어주면 좋고.”

이미 한번 오른 버스, 내릴 수 없다는 듯 재마는 강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나 비싼 인력이야. 오늘 일당 톡톡히 챙겨줘.”

이미 버스가 고속도로에 올라탔으니 내릴 수도 없다고 생각한 건지 강산은 투덜거릴 뿐이었다.

“일당뿐 아니라 밥, 술까지 내가 다 쏜다.”

“오올. 이 원장님. 요즘 환자 많은가 봐?”

요즘 얼굴 보기 힘들었던 두 동기는 오래간만에 수련의 때로 돌아간 기분으로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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