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22화
유 소장은 재마의 단호함에 재차 거절하지 못하고, 처치실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명의 한의원의 꽃이라며 처치실 1을 리모델링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다고 하여 분위기가 궁금했다.
“소장님이 경험하시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우실 텐데…….”
유 소장이 처치실 1으로 가고싶다는 내색을 하자 정 실장은 먼저 들어간 진갑순 환자와 나란히 누워 침을 맞아야 한다고 언질을 줬다.
조금 전 노인정에서 삶은 달걀이라며 유 소장 손에 억지로 쥐여주었던 할머니를 생각하니 부담스러워 처치실 2로 들어가 베드에 누웠다.
직업의 특성상 한곳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매번 현장으로 나돌아야 했고, 전국이 제집인 양 다녀야 했던 그에게는 물리 치료를 받을 시간적 여유도 적었다.
오래간만에 서울 현장을 잡아 조금 여유가 생길 것은 예상했지만, 이렇게 치료까지 받을 줄은 몰랐다.
“아이고. 괜찮은데…… 바쁘신데 제가 괜히 실장님까지 귀찮게 하는 게 아닌가 걱정입니다.”
“어휴. 아니에요. 아프실 땐 당연히 치료를 받으셔야죠.”
유 소장은 물리 치료를 준비하는 정 실장의 뒷모습을 보며 민망한 듯, 사과했다.
“사실 한창 아팠을 때는 재작년이었고, 바쁘다 보니 치료를 못 받았거든요. 버티고 버티다 보니 요즘은 자주 아프지도 않은데…… 이정도면 오십견이 지나간 것 아닙니까?”
유 소장은 주변에서 오십견은 때 되면 다 낫는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50대가 되고 보니 동년배 친구들이나 건설 현장 선배들의 관심사는 이제 모두 건강이었다.
아무리 일을 하고 싶어도 건강이 따라주지 않으면 할 수 없었다.
더구나 50대쯤 되면 너도나도 통증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이 필수 같았다.
그동안 3, 40년 동안 제 몸을 혹사해 가며 살아왔다는 것이 서글프기도 했지만, 이만큼 열심히 살아왔다는 노력의 산물 같기도 했다.
“원래 오십견이 1~3년 정도 엄청 아팠다가, 어느 날 씻은 듯이 나은 것 같은데 또 무리한 날은 또 아프고 그렇대요.”
유 소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정 실장은 물리 치료의 흡착판을 그가 아파하는 통증 부위에 붙였다.
오십견을 꽤 오래 견뎠다는 유 소장의 어깨가 딱딱히 굳어 돌덩이 같았다.
“기계에서 느껴지는 것 느껴보시고 적당한 세기 말씀해 주세요.”
정 실장은 기계의 주파수를 조금씩 움직였다.
엎드려서 흡착판을 붙인 유 소장은 적당한 주파수를 찾기 위해 느끼고 있었다.
“오오. 이 정도면 좋겠어요.”
전극이 들어오자, 낯선 느낌이 찌릿찌릿하게 느껴졌다.
본인에게 맞는 세기를 찾은 유 소장은 세기가 적당하다고 말했다.
“네. 쉬고 계세요. 원장님은 옆 처치실에서 침술 하시고, 유 소장님 봐주실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누구나 겪는 통증, 언제쯤 한번 느끼고 지나가는 통증이라는 생각에 오십견을 쉽게 보고는 하지만 결코 쉽게 지나칠 통증은 아니었다.
만성화되면 아무래도 석회가 쌓이기 쉽고, 무엇이든 만성이 되면 치료가 어려웠다.
오랜 시간 버티며 일만 해온 유 소장의 상태는 이미 치료하기 힘든 케이스였다.
유 소장에게 꼭 물리 치료와 침을 맞으라고 말한 재마는 먼저 처치실에 들어가 있는 갑순에게로 향했다.
“진갑순 환자? 어제 저녁 드시고 운동 좀 하셨어요?”
“에이. 죽겠어.”
재마가 질문을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앓는 소리를 하는 갑순이었다.
위장이 필요로 하는 충분한 영양, 수분, 산소가 공급되지 않으면 운동성이 떨어지는데 이미 갑순에게는 만성화된 상태였다.
치료를 병행하며 운동을 시작해 위장에 조금이라도 활력을 준다면 위가 무력해진 상태에 조금이라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었다.
한약과 함께 물구나무나 윗몸일으키기 같은 위장을 지탱해 주는 코어운동을 해주면 좋겠지만, 갑순의 나이나 건강상태로는 무리였다.
지금으로서는 산책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왜 죽겠어요. 안 아프려고 매일 이렇게 시간 내서 침 맞으시는 건데.”
“젊은 원장 믿고 매일 같이 운동도 하는디, 이게 나을라나 모르것어.”
재마를 믿고 시간을 내어 길게 보고 치료를 시작한 갑순은 요즘 30분씩 동네 어귀를 걷기 시작했다.
60대, 영감이 먼저 떠나기 전까지는 전국에 있는 산을 누볐던 그녀였지만 혼자가 되고 나니 그 좋아하던 산도, 동네 산책을 하는 것도 끊었었다.
하지만 재마의 권유로 20년 만에 산책을 시작했다. 4일째 저녁 식사 이후 해 질 녘마다 산책을 하는 갑순은 입으로는 앓는 소리를 했지만 사실은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 먹고 할 일이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그녀를 활력 돋게 했다.
무릎이 아픈 건 사실이었지만, 산책을 하고 나면 소화가 잘되는 것은 물론 잠도 잘 오는 것 같았다.
나이가 들며 피곤하면 잠이 더 잘 들 줄 알았지만, 오히려 잠이 잘 오지 않아 고생도 꽤 했던 그녀였다.
“소화가 안 되서 고쳐준다면서 걷기는 왜 시키는 겨. 이제 무릎도 고장 나도 쉽게 수술도 못 할 나이가 되었는데.”
“다리도 아프세요? 그럼 오늘 다리에 침도 놔드릴게요.”
“아니아니, 침놔 달라는 게 아니고.”
갑순의 손목을 짚은 채 진맥을 짚는 재마는 다리에 침을 추가로 놓는 것은 문제없다는 듯 이야기를 했다.
지난번 갑순의 동공을 통해 이미 무력해진 위 때문에 역류성 식도염으로 목까지 불편해진 갑순의 상태를 파악한 재마였다.
아직 위하수 상태까지는 아니었지만 위가 무력해져 활동이 더뎌진다면, 음식물이 묵직하게 위장에 자리하고 있는 만큼 아래로 쳐져 위하수를 동반하는 상태까지 올 수 있었다.
재마에게 괜한 투정을 부리는 갑순이었다.
“이제 내 나이에는 운동도 조심하게 되는 겨.”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갑순 환자, 몸이 힘드시다고 계속 누워 계신다거나 하시면 위도 그걸 다 느끼거든요. 무력해지기 십상이에요.”
“힘들면 누워 있는 거지 뭐. 젊은 원장도 늙어 봐. 어디.”
아직 머리에 피도 마르려면 한참 남아 보이는 재마를 바라보며 갑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갑순에게도, 먼저 세상을 떠난 영감에게도 저런 젊은 날이 있었는데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외모가 변하는 것도 서러운데 몸이 한 군데, 두 군데 고장 나니 서럽기만 했다.
갑순은 재마가 젊은 나이에 제 컨디션을 잘 몰라 준다는 듯 입술을 쭉 내밀었다.
활력이 돋는 건 사실이었지만 함께 산책을 하자고 박옥숙에게 권유를 해도, 이 나이에 잘못 움직였다가 몇 날 며칠 고생할 수 있다는 말에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예전에는 산도 들도 좋아하셨다면서요.”
지난번 하루 30분 산책을 권유했을 때, 갑순의 입에서 가보지 않은 산이 없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기도 했고, 이제는 노쇠하고 노쇠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몸이었다.
“그건 옛날이고.”
“침 치료하시고 하루 30분 산책도 하셔서 체력 좋아지시면, 지금도 충분히 산에도 놀러 가시고 여행도 가실 수 있을 거예요. 지금은 속이 부대끼고 멀미가 심해서 멀리 여행도 못 가시잖아요.”
재마는 산책을 해, 체력을 끌어 올리면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갈 수 있다고 희망차게 말을 했다.
“여행은 무슨, 근데 여행은 못 가더라도 막내아들 집에 한 번은 가보고 싶긴 해.”
지방으로 발령받은 막내아들의 집에 단 한 번도 가지 못한 것이 한이 된 듯한 갑순이 속마음을 내비쳤다.
자식들을 모두 키우고 출가를 해, 외로운 것도 사실이었지만 자주 찾아오지 못하는 자식들에게 서운하지는 않았다.
다만 먼 곳에 자리를 잡은 막내아들을 한 번 찾아가 제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게 더 늦으면 한이 될 것 같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아들을 옆에 끼고 살았으면 좋으련만, 직장이 지방이니 눈물을 머금고 지방으로 내려보냈던 갑순은 지금도 막내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렸다.
“혼자 살면서 먹는 건 잘 챙겨 먹는 지, 잠자리는 잘 살펴놨는지 궁금해 죽겠어.”
이 마음을 잘 아는지, 몇 번이고 막내아들은 서울로 갑순을 모시러 온다고 했지만, 편도 세 시간 거리의 지방 도시를 가는 것이 엄두도 나지 않았던 갑순이었다.
늙어서 그런 줄만 알았는데, 그게 위가 좋지 않아 그렇다니 젊은 원장이 고쳐준다면 한 번쯤 아들의 집을 가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러잖아도 막내아들이 보내준 용돈으로 치료받는 거야. 치료 끝나면 내가 꼭 가봐야지. 우리 막둥이 집에.”
막내아들이 용돈을 보내주는 것도 잊지 않고 자랑을 하는 갑순이었다.
재마는 갑순의 자랑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홀로 지내는 노령의 환자들에게는 대화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치료가 될 때가 있었다.
조금 전까지 운동을 하는 것도, 침을 맞으러 오는 것도 힘들어 죽겠다고 투정을 부리던 갑순의 얼굴색이 환해져 있었다.
“그러니까 힘드셔도 30분씩은 꼭 걸으세요. 다리 아프시면 다음 날 와서 침 맞으시고요. 제가 다리 침은 서비스로 놔드릴게요.”
“그럼! 걸으라고 권유한 사람이 젊은 원장인데 이 정도는 서비스로 놔줘야지.”
재마는 이미 무력해진 갑순의 양쪽 무릎에 10대도 더 박힌 침이 흔들리도록 무릎을 들어 올린 갑순은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를 했다.
“위장의 기운이 가볍게 소화 문제만 일으키는 게 아니라 환자의 몸 상태 전반을 가리키는 거니까 위장의 기운이 좋게 가벼운 산책 지속해서 해주세요. 꼭이요.”
“알았어. 젊은 원장이 하라면 해야지.”
“약도 꼭 제시간마다 맞춰 드시고요.”
갑순은 이미 지난주부터 보중익기탕을 받아 하루 두 번 먹고 있었다.
탕약술이 올라간다는 보상을 받기는 받았지만 그 수치가 미미해 환자들에게 영향이 얼마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갑순이 매일 같이 한의원을 제 발로 찾아오는 것만 봐서는 효과가 있음이 분명했다.
재마의 재차 강조하는 산책에 갑순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릎에는 전기 자극 좀 넣어 드릴 테니 힘드시면 벨 눌러서 정 실장님 불러주세요.”
통증이 있다고 말한 무릎에는 전기 치료까지 겸하는 재마였다.
“오늘도 고마우이, 젊은 원장.”
“별말씀을요.”
고맙다 인사를 하는 갑순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는 재마의 머리가 또 한 번 시원함을 느꼈다.
‘설마 보상 순간이 다가왔나?’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미션의 보상이 나타난 순간이었다.
재마의 눈앞에는 세 장의 카드가 나타났다.
[두 장의 카드를 뽑으시오.]
‘지난번까지만 해도 한 장의 카드만 뽑으라고 했는데!’
재마는 군침을 삼키며 한 장의 카드를 뽑았다.
[진맥술이 상승합니다.]
진맥을 짚는 기술의 단계가 상승한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진 재마는 나머지 한 장도 더 넘겨 보려다 멈칫했다.
“원장님, 장명순 환자 오셨습니다.”
정 실장의 목소리가 재마의 머리를 시원하게 하는 보상 타임을 멈추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