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20화
“저 왔어요.”
오래간만에 본가에 온 재마는 현관에 들어서는 기분이 평소와 달랐다.
전화로 어머니에게 상황을 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터라, 어머니의 반응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어머니와 구 원장의 30년간의 관계 회복이 어느 정도 되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 왔니.”
걱정했던 것과 달리 어머니는 주방에서 무엇인가를 만드시느라 정신이 없으셨다.
오래간만에 집으로 돌아온 아들의 얼굴을 볼 새도 없으신 모양이었다.
평소였다면 ‘아들 얼굴 안 궁금해요?’라고 투정이라도 부렸겠지만, 종종거리며 냉장고와 식탁 그리고 싱크대를 오가는 경옥의 뒷모습을 보니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식탁에는 몇 권의 책들이 있었는데, 주방으로 들어와 그 책 제목을 보니 어머니가 왜 분주하게 움직이시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장암, 요리닥터가 책임집니다.
-음식으로 고치는 암
-대장암 레시피
경옥이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사고, 요리하는지는 알 수 있었지만 한의사로서는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책 제목들이었다.
“요리로 암을 고친다고?”
재마는 입을 삐죽 내밀면서 책을 슬쩍 넘겨 보았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네 할아버지랑 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그래도 모든 것은 음식에서 시작되는 거야. 좋은 것을 찾아 드시면 적어도 나쁜 기운이라도 물리칠 수 있지 않겠니.”
경옥은 이미 구 원장에게 한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누군가는 한의학으로 암을 다스린다고 이야기를 하면 믿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한의학은 그저 대체의학일 뿐 암을 직접 다스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더 많았으니,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재마는 대수롭지 않았다.
한의사를 믿는 환자들,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믿고 자신을 찾아온 환자들을 고치는 데에도 몸 하나로는 부족했다.
한의학을 믿고 따르면 좋은 예후를 볼 수 있듯, 음식으로 좋은 예후를 볼 수 있다면 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구매했을 경옥이었다.
“구 원장님은 어디 계세요?”
“네 방. 할아버지가 계셔야 하니 내어드렸어.”
“잘하셨어요.”
어머니의 입에서는 할아버지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지만, 재마는 아직 그 말이 입에 붙지 않았다.
경옥은 재마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뜻을 이해했는지, 재마의 방 쪽을 가리켰다.
“저 왔어요.”
“어, 왔니.”
어쩜, 30년을 떨어져 살았던 경옥과 철원이었지만 인사를 했을 때의 반응이 똑같은지…….
재마는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오려다 말았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날 찾은 걸 보니, 할 말이 있는 모양이구나?”
철원은 재마가 한의대 시절, 보려고 챙겨다 둔 책들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쓰고 있던 돋보기를 내려놓고, 침대에 걸터앉는 재마를 바라봤다.
“무엇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할 말이 많은가 보구나.”
“일단 상의도 없이 어머니한테 말씀드린 건 죄송합니다.”
재마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죄송하다고 사죄를 했다.
왕래를 전혀 하지 않다가 30년 만에 큰 병을 앓고 있다고 딸에게 연락을 하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어머니가 한참 후, 뒤늦은 후회로 괴로워하실 마음은 자식으로서 이해할 수 있었다.
구 원장을 위해서가 아닌, 제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구 원장의 상황을 알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병을 이겨내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구나.”
“이겨내시더라도 이제는 가족과 함께하시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그래. 내가 널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러와 많은 것들을 떠넘겼으니 네 뜻 하나 정도는 눈 감고 넘어가야지.”
철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 말하지 않아도 재마의 뜻을 알겠다는 듯 말을 했다.
“한의원은 어떻니. 정 실장 말로는 꽃이 펴도 나비들도 드나들지 않을 정도로 고요하다던데.”
구 원장이 한의원에 있을 때와 비교하면 개미 한 마리 드나드는 것까지 보일 정도로 휑한 명의 한의원이니 그렇게 표현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진갑순 환자가 다시 진료를 받으러 오시기 시작했으니 곧 괜찮아질 겁니다.”
“그래?”
진갑순 환자라는 이름이 재마의 입에서 나오자, 철원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동네에서 제일가는 고집불통 환자가 한의원 문턱을 넘었으니 이제는 조금 수월하게 드나들 것이었다.
“아 참,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명의 한의원에 조금 변화를 줄 생각입니다. 그 이야기도 들으셨죠?”
“베드 10개를 놓았다고?”
정 실장을 통해 재마가 베드를 10개를 들였다는 소식을 들은 구 원장이었다.
재마는 구 원장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일 테니 설명하기 더욱 쉽겠다는 생각을 했다.
“네. 처치실이 두 군데니 기존 방식을 원하시는 환자분들은 처치실 1로, 베드가 편하신 분들은 처치실 2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베드를 두지 않았던 것은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셔서 무릎도, 허리도 좋지 않아 찾는 분들이 베드를 부담스러워하셔서야.”
철원은 나름 자신이 운영하던 방식이 이유가 있다는 것을 재마에게 알렸다.
그렇지 않아도 진갑순 환자에게 한차례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재마 또한 처치실 1은 기존의 방식대로 운영하기로 결정을 했다.
-어휴, 나는 침상에 누우래도 못 누워. 일어나서 내려오다가 떨어지기라도 해봐. 그러면 한의원을 들락거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내 나이에는 병상에 드러누워야 해. 언제 일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고.
“너도 생각이 있어 결정한 일일 테니, 내 의견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결정한 일을 자신에게 보고를 하는 외손주 재마의 행동에 구 원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처음은 적응하기 힘들어도 이렇게 명의 한의원에 적응해 갈 것이라는 기대도 생겼다.
“그리고 제게 위기의 명의 한의원을 구하라는 미션이 주어졌습니다.”
재마는 그 어디에서도 미션이라는 단어를 꺼낼 수 없었지만, 구 원장에게만큼은 꺼낼 수 있었다.
“흠.”
구 원장의 얼굴에서 지금까지 띠었던 흐뭇한 미소가 사라지고 얼굴에 시름이 생겼다.
위기의 명의 한의원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 걱정도 되는 모양이었다.
“아시지 않습니까. 명의 한의원에게 안과 밖으로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요.”
안으로는 명의 한의원을 이끌어오던 구 원장이 물러나고 후대인 재마에게 넘어간 변화가 생겼다.
또 밖으로는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해인동이 개발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것은 제아무리 지키고 싶다고 고집대로 지키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네 말이 다 맞다. 가족까지 잃어가며 지켜왔던 명의 한의원이 지금 보니 그저 한낱 내 고집일 뿐이었구나.”
구 원장은 씁쓸한지 마른침을 삼켰다.
5대째 내려온 명의 한의원은 한옥을 개조해 만든 한의원이었는 데 대청마루까지 있는 구옥 중에도 구옥이었다.
조선 후기의 한옥이 서울에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적어지면서 종종 드라마 세트장으로 섭외할 수 있는지 방송국에서 연락이 올 정도였다.
누군가에게는 신기한 장소이기도 했지만,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불편함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명의 한의원뿐 아니었다.
해인동 자체가 조성된 지 오래된 동네라 대부분의 주택들이 낡았고, 각자 부족한 부분을 고쳐가며 살아가는 데에도 문제가 있었다.
주민들의 뜻을 모아 개발을 진행하고 있으니 고집을 부리고 자리를 지키겠다고 마음먹어봤자 끝내 꺾이고 말 것이었다.
“최대한 명의 한의원 선조들의 뜻, 할아버지의 뜻은 거스르지 않겠습니다. 명맥은 이어가되 시대에 맞춰서 명의 한의원을 운영할게요.”
재마는 씁쓸한 표정을 지은 외할아버지, 구 원장이 마음이 쓰였다.
구 원장은 듬직하게 이야기를 하는 재마의 목소리에 그의 손을 잡았다.
“고맙다.”
재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주와 외할아버지와의 가까운 관계가 되기에는 아직은 한참은 멀었을 것이라고 경옥은 예상했다.
오랜 시간 서로를 알지 못하고 지냈으니 여러 일을 겪으며 알아가는 시간도 필요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주방에서 식사 준비에 신경을 쓰던 경옥은 준비를 마치고 방문에 대고 노크를 했다.
“두 분 대화는 자리를 좀 옮겨서 하시죠? 할아버지 식사 시간 다 되었어. 재마도 어서 나와.”
“네.”
고개를 끄덕인 재마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경옥은 방 안으로 들어와 철원의 한쪽 팔을 잡고 부축을 했다.
항암치료를 시작하기 전보다 식욕이 부진해지고, 체력 저하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예상했던 철원이었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바닥을 치는 체력에 매번 딸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제가 할게요.”
잠자코 지켜보고 있기만 했던 재마는 철원의 나머지 한쪽 팔을 잡았다.
지금 항암치료를 하며 몸무게가 많이 줄어든 구 원장이었지만, 50대인 경옥이 홀로 그를 간호하기에는 무리라는 생각이 든 재마였다.
“그럴래? 엄마는 가서 그러면 된장국 좀 덜고 있을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손주와 할아버지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대화를 하던 두 사람이 이제는 서로의 팔을 교차하고 있는 모습에 경옥은 자리를 비켰다.
자신이 걱정했던 것보다는 서로에게 빨리 적응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피는 못 속인다니까.”
경옥은 방을 나서며 혼자 읊조렸다.
홀로 키우며 매번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던 재마가 자랑스러웠던 경옥은 갑작스레 의대가 아닌 한의대를 선택하겠다는 재마의 선택을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가족보다도 한의원이 우선이었던 인연을 끊은 아버지, 구철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한의대를 선택한 것일까 의아했지만, 이제 보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왕래를 하지 않고 지내도 필연적으로 끌리는 무엇인가가 두 사람에게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경옥은 그 무엇인가를 알 수는 없었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재마는 경옥이 먼저 자리를 피하자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도 감사해요.”
재마는 제 입에서 왜 감사하다는 말이 튀어나왔는지,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자신을 올려다보는 철원을 보니 진심으로 우러러 나온 말이라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