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19화
재마는 자신 앞에 앉아 있는 환자의 손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소개를 받고 명의 한의원을 찾아왔다는 사내는, 아버지를 치료했던 구철원 원장이 은퇴를 하고 새롭게 재마가 맡아 진료를 하고 있다는 소리에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재마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이 서른넷.
아직 창창하게 젊은 나이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이곳을 찾아왔을 것이다.
자신보다 먼저 힘든 길을 걸어온 아버지에게 희망을 만들어준 원장님에게서 그도 희망을 찾고 싶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찾는 원장님이 계시지 않으니 찾고 있던 희망까지도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일 것이었다.
“장영원 님. 너무 걱정 마시고, 진료 시작하겠습니다.”
재마는 영원이 진료실로 들어올 때, 정 실장의 당황한 얼굴을 확인하고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하지만 책상 위로 얹은 두 손을 보고는 마음이 철렁하고 내려앉은 것도 사실이었다.
“이쪽 방향으로 앉아서 절 바라보시겠어요?”
재마는 동공을 인식시키기 위해, 자신이 앉은 방향으로 앉게 했다.
[동공을 인식하세요.]
재마는 어느 때보다 동공을 인식하라는 말이 떨렸다.
영원의 상태가 어느 정도 일지, 걱정이 되는 마음이었다.
[동공을 인식합니다.]
이름 : 장영원
나이 : 34
영원의 간단한 정보와 함께 푸른색 섬광이 그의 관절 마디마디에 작고 단단하게 뭉쳐져 나타났다.
때때로 날카롭게 변하는 섬광도 있었는 데 그 부분은 통증까지 동반하거나, 관절의 모양을 변화시킨 상황이었다.
“류마티스 진단을 받으신 지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사실 저희 아버지, 친할머니께서 류마티스로 고생을 하셔서 어릴 때부터 추적검사는 꾸준히 해왔습니다.”
류마티스 관절염 환자의 자녀도 류마티스 관절염에 걸릴 확률은 10% 정도이다. 이는 일반적인 관절염의 유병률보다 높은 편이었다.
관절염 발생에 유전적인 영향이 작용한다는 뜻이었다.
재마는 영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영원뿐 아니라, 명의 한의원을 소개해 준 그의 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한의원을 소개했을지 알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픈 것도 서럽고 세상이 원망스러울 텐데, 그런 자신의 병을 아들에게 물려 준 아버지의 마음을 다는 헤아릴 수 없었다.
“2년 전부터 증상이 조금씩 나타나 약을 꾸준히 먹고 있기는 한데 약을 먹는데도 변형은 빠르게 진행되더라고요.”
정 실장과 재마가 영원의 손을 보자마자 놀란 이유도 손의 변형 상태였다.
요즘은 약이 좋아져 류마티스여도 초기에 발견해 약만 꾸준히 먹는다면 손가락 변형을 꽤 오랫동안 막을 수 있었다.
류마티스 유전병의 가능성을 열고 추적관찰을 해왔지만, 자신이 정말 류마티스라고 진단받았을 때는 얼마나 괴로웠을지.
약을 먹었지만 약을 먹는 수고로움이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손가락에 변형이 오기 시작했다면 그 마음은 어땠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놀라고 있을 수만 없는 재마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지금까지 류마티스에 대해 많이 알아보셨겠지만, 간단하게 설명 들이자면 자가면역질환입니다. 한의학에서는 이 자가면역질환으로 어혈이 우리 몸속 여러 조직에 달라붙어 염증을 일으킨다고 보고 있고요. 류마티스는 몸속의 독소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이동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재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마의 눈에 보였던 섬광들도 영원의 몸에 돌아다니는 어혈들일 것이다.
“한의학에서는 어혈이 관절의 활막에 침범해서 관절염이 생긴 것이니 ‘피를 맑게 하라’라는 치료 원칙에 따라 두 가지 방법으로 치료를 합니다.”
재마는 자신이 하는 이야기가 환자가 듣기에는 다소 어려울 수도, 막막할 수도 있는 이야기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한의학을 믿고 찾아와 준 영원이 이해할 수 있도록 최대한 쉽게 설명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표증 치료 방법에는 옻나무에서 추출해 만든 ‘건칠단’과 ‘건칠관절단’, 벌독을 이용한 ‘봉독 약침요법’이 있습니다. 어혈을 없애고 혈액순환을 촉진 시켜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죠.”
“아버지께서 20년 전에 명의 한의원에서 약을 드시고는 큰 효과를 보셨다고 했습니다. 어려워도 어떤 방법이든 따라갈 생각입니다.”
영원은 차분히 설명해 가는 재마의 손을 잡고 간절한 마음으로 자신의 바람을 말했다.
“이렇게 변형이 될 정도였다면 고통이 그만큼 컸을 텐데, 되돌리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양방학에서는 이렇게 빠르게 진행되는 경우는 약으로도 소용이 없다고 손을 놓을 정도니까요. 되돌리지 못해도 좋습니다. 더 이상 진행은 안 되었으면 좋겠어요.”
영원은 나이에 비해 빠른 진행상태로 이미 심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다.
그가 찾던 구 원장은 더 이상 명의 한의원에 없었지만 그래도 새로 왔다는 원장에게 설명을 들으니 시름이 한시름 놓였다.
“혈액순환의 원동력이 떨어져 있는 상태 같은데, 평소에 몸이 늘 피곤하고 자꾸 눕고 싶으신가요?”
“네. 약 기운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아침에도 얼굴이 푸석푸석하고, 일어날 때는 힘드시지만 또 일어나서 활동을 하면 몸이 활기차지는 걸 느끼시죠?”
“네.”
“그게 아마 잘 때보다 활동할 때 기 순환이 잘 되어서 그런 걸 겁니다. 땀날 정도의 유산소 운동을 시작하시는 게 좋아요.”
“운동은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유산소 운동은 양학 치료를 시작하면서 의사의 권유로 시작했던 영원이었다.
“혈액순환에 도움 되는 침을 일단 맞는 거로 하고, 치료 시작하겠습니다.”
재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처치실로 가 영원에게 침술을 하겠다 이야기했다.
* * *
“조금 전에 한의원 들어온 젊은 남자, 누구여?”
갑순은 한의원을 나서다 마주친 영원이 궁금해 되돌아온 모양이다. 재마와 영원이 있는지 확인을 하고 살금살금 들어왔다.
그러고는 데스크에 있는 정 실장에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정 실장은 안타까운 얼굴로 진료실로 들어간 영원과 재마를 바라보다 갑자기 나타난 진 할머니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아이고, 갑순 님. 환자 정보를 제가 어떻게 말씀드리겠어요.”
정 실장은 난감한 기색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갑순도 정 실장이 왜 말을 아끼는지,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우리 동네 사람은 아닌 것 같은디, 구 원장님 찾아왔대?”
구 원장이 명의 한의원을 맡았을 때는 다른 동네는 물론, 다른 지역에서도 찾아오는 환자들이 있었으니 아주 특이한 케이스는 아니었다.
이 동네 터줏대감인 진 할머니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 그녀가 모르면 외지인이 분명했다.
“구 원장님을 찾아오신 거 같긴 한데, 그래도 이 원장님도 적절한 치료 시작하실 거예요.”
그렇지 않아도 구 원장이 자리에 없다는 사실에 영원이 실망을 한 눈치를 정 실장도 이미 알아챘다.
하지만 정 실장은 이 원장을 믿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혹시 장만춘이 아들 아니여?”
“네?”
“그 있잖어. 요 앞에서 구두 가게 하던 장 사장.”
“아…… 장 사장님.”
명의 한의원에 20년 가까이 몸담았던 정 실장이니, 이 동네 주민들은 물론 상인들도 대부분 알고 있었다.
특히 진갑순 할머니가 말했던 구두가게 장 사장님은 정 실장의 기억에도 똑똑히 남아 있는 분이셨다.
“손이 아프다 할 때, 그냥 일을 많이 해서 그런가 보다 했지 뭐. 근데 그게 아니었잖아. 류마티스였잖아. 그것도 아주 진행이 빠른…….”
“그때는 약도 지금 같지 않아서 많이 힘들어하셨죠…….”
정 실장은 차트에 써 있는 장영원의 이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장 씨 아니여?”
“네? 아니, 뭐…….”
“내 생각에 맞는 것 같어. 촉이, 확 와.”
“갑순 님, 젊은 환자분들은 이렇게 과도한 관심은 불편해하세요.”
“그래? 내가 불편한가? 그럼 또 젊은 사람한테 민폐는 끼칠 수는 없지.”
갑순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 정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흔드는 갑순에게 고개를 숙였다.
환자의 개인정보를 둘러 물어보았지만, 티를 낼 수 없는 제 사정을 갑순이 이해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이 써놓은 차트에는 그의 성, 장이 삐뚤게 써 있었다.
이미 변형될 대로 변형이 된 손 때문에 이제 필기구 잡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장 사장님도, 사모님도 걱정이 많으시겠네…….”
아직 한창일 나이에 손가락부터 변형이 왔으니, 고단한 삶일 것이었다.
장 사장이 20년 전, 15년 가까이 운영하던 구두 가게를 정리하던 날이 떠올랐다.
상인들뿐 아니라, 그의 고객이었던 손님들도 장 사장의 폐업에 함께 슬퍼했었다.
구두를 정말 사랑했던 장 사장은 그저 직업병인 줄 알았던 자신의 손이 날이 갈수록 더욱 변형되고 고통스러움에 살아야 한다는 걸 알고는 구두 가게를 어렵사리 접었었다.
그때 중학생이었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오늘 재마를 찾아온 영원이었다.
“정 실장님. 장영원 환자 처치실로 안내해 주세요.”
정 실장이 옛 기억에 빠져 있는 사이, 재마와 함께 영원이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처치실로 가실까요? 장영원 님?”
정 실장은 영원의 차트를 들고, 베드가 있는 처치실 2로 앞장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