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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읽는 한의사-17화 (17/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17화

“어흑. 억”

처치실에 바르게 누워 있는 진 할머니의 복부를 이리저리 꾹꾹 눌러보는 재마.

갑순은 큰마음 먹고 명의 한의원으로 발걸음 한 만큼, 재마에게 제 몸을 맡겨보기로 했다.

“많이 아프세요?”

“너무 깊게 누르는 거 아냐?”

“아니에요. 진갑순 환자분 증상이 만성화되어 있어서 그래요.”

재마는 갑순의 한 번의 진료로 이미 처방을 내린 상태였지만, 다시 한번 직접 손으로 느끼기 위해 담 독소가 쌓여 있을 위와 장을 눌러본 것이었다.

검붉은 섬광이 위와 장에 정체되어 있듯 몰려 있었다.

“잘 낫지 않으면서 원인도 알 수 없이 체기가 있으셨죠?”

“그렇지. 속이 좋아질 만하면 또 그러고, 또 그러고.”

시원하게 체기가 모두 내려가면 좋겠지만 항상 정체되어 있었을 것이다.

“구 원장님께서도 말씀하셨을 것 같은데.”

“구 원장님도 똑같이 말씀하셨지 뭐. 자주 와서 치료받아라. 침만으로는 안 된다.”

“약은 써보셨어요?”

재마는 기존 구 원장이 갑순을 진료하며 작성해 놓은 차트를 뒤져 보았다.

꽤 오랫동안 명의 한의원을 다니면서 탕약은 단 한 번도 먹지 않았던 갑순이었다.

“한약을 꼭 먹어야 하나?”

“침술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마 내시경 하시거나 하면 신경성이라고 처방이 나오죠?”

갑순의 나이 정도에 하루가 멀다고 음식을 소화하지 못하니 아들들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터였다.

“맞아. 맞아. 우리 아들이 2년에 한 번씩 저기, 저기. 서울대 대학병원에서 온몸을 싹 건강검진 시켜준다오. 그러면 어디가 아픈지 책자로 딱 나오는데. 거기서는 별문제 없다던데. 신경성 위염쯤이야, 요즘 성인이면 다들 가지고 있는 병이라고.”

갑순은 지금까지 대학병원의 건강검진만 믿고 담적에 쌓인 독소를 그냥 그대로 방치한 상태였다.

“물론 양방학 쪽에서 본다면 신경성 위염으로 치료를 할 수는 있는 데, 약을 드실 때 그때뿐이지 크게 호전되지 않으실 거예요. 담 독소가 쌓인 증상이 오래되면 위장에 있는 독소가 림프관을 통해 전신을…….”

재마가 설명을 쭉 늘어놓으며 갑순의 얼굴을 보았지만 이해하기는커녕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가까스로 참는 얼굴이었다.

“어휴. 그렇게 길게 말해도 늙은이는 무슨 소린 줄 잘 몰러.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해? 결론만 딱 말혀.”

이제는 젊어 실력이 이러쿵저러쿵하는 말 없이 재마의 이야기부터 들어보겠다고 하는 것이 큰 변화는 변화였다.

“약을 드셔보시면서 침도 맞으러 자주 오셔야 할 것 같아요.”

“그럼 낫게 해줄 수 있어?”

그 증상은 갑순을 수십 년간 내내 기분 나쁘게 자신의 몸을 괴롭혔다. 참을 수 있을 만하기에 만성이라고만 여겼지, 지난번처럼 심하게 앓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노인정에서 다른 할매들이 쩔쩔맬 정도로 한 번 앓고 나니 다시는 그런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럼요. 낫게 해드릴 수 있죠. 진갑순 환자께서는 꾸준히 한의원에만 와주시면 됩니다.”

“그야 할 수 있지. 예전에도 하루가 멀다고 온 것을?”

“네. 그때처럼 믿어 주시면 됩니다.”

“그려그려.”

진갑순 환자는 재마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젊고 경력이 없다고 재쳐둘 뻔했던 재마가 이제 보니 구 원장을 쏙 닮아 믿음직해 보였다.

[단골 환자를 잡아라, 다음 보상까지 60% 남았습니다.]

재마의 눈앞에 번쩍이는 홀로그램이 뜨며 머리가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발길을 뚝 끊었던 진갑순 환자를 다시 한의원에 오게 하면서 미션을 수행한 거로 카운트된 모양이었다.

보상까지 아직 60%나 남았다고 하지만 머리가 개운해지는 것이 체력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개운한 기분으로 갑순의 혈 자리에 침을 모두 둔 재마가 타이머를 맞췄다.

“쉬고 계세요. 탕약은 내일모레 찾아가시면 되고요.”

“그려. 그려. 고마워요. 젊은 원장님.”

갑순은 침을 맞느라 누운 채로 손을 흔들었다.

재마는 눈인사를 하고 처치실을 나서려 할 때, 갑순이 그를 다시 불러 세웠다.

“그나저나 구 원장님은 여행 갔다가 언제 오시는 겨?”

* * *

재마는 지난주와 지지난 주, 자신이 명의 한의원을 도맡아 하기 시작하면서 환자 차트와 장부를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물론 처음부터 명의 한의원을 40년간 지켜온 구 원장을 따라갈 수는 없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라면 명의 한의원을 유지하지 못할 정도의 매출이었다.

자신의 월급은 물론 정 실장과 최 실장의 월급도 어떻게 할지 막막했다.

“후…… 이를 어쩐다.”

재마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원장님?”

재마의 한숨 소리가 바깥까지 새어나간 걸까?

정 실장은 자신에게 장부와 차트를 부탁해 진료실로 들어간 재마가 한참을 나오지 않자 걱정이 되었는지 노크와 함께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

“아, 정 실장님.”

“무슨 고민 있으세요?”

재마는 자신이 있을 고민이 무엇이겠냐는 듯,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딱히 대답하지 않아도 정 실장도 파악하고 있을 상황이니 그저 웃음으로 넘기고 있었다.

정 실장은 문을 열고 들어오며 손사래를 쳤다.

“에이. 새로 오신 지 얼마나 되셨다고 장부 파악하시려고 하세요.”

“정 실장님도 아시다시피, 당장 이번 달 임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구 원장님이 그 정도도 생각 안 하시고 이 원장님을 모셨을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매달 월급은 제가 정산해서 막힘 없이 해결하겠습니다.”

정 실장은 자신을 믿으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임금 문제는 구 원장과 이야기가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제가 이끌어 나가려면 제가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거니까요.”

“그렇긴 한데…… 지금 상황이 오래 갈 것으로 생각해서 괜한 걱정은 하지 마세요. 그리고 오전에 진갑순 환자도 다녀가셨잖아요. 그럼 금방 복구될 거예요.”

정 실장은 진갑순 환자의 마음만 사로잡으면 노인정 어르신들도 곧 다시 올 것이라 믿는 모양이었다.

“해인동 개발 이야기는 얼마나 진행되었습니까?”

“개발 이야기는 꾸준히 나오기는 했었는데, 2구역이 재개발이 들어가면서 저희가 속한 구역도 본격화되어 가는 모양이에요.”

정 실장은 자신이 알고 있는 선에서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사실 명의 한의원의 환자가 줄어든 것은 개발도 한몫했다.

먼저 개발이 시작된 1, 2구역의 환자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를 나가면서 명의 한의원을 찾기 힘들어졌다.

현 상황에서 새로운 환자를 찾을 수도, 기존의 환자도 붙잡기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위기의 명의 한의원을 구하라.]

번듯한 미션 메시지가 다시 번쩍거렸다.

구 원장이 다시 와도 구하지 못할 상황에 자신이 어찌 살리라는 것이라는 건지, 재마는 한숨을 푹하고 내쉬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이 부분은 구 원장님이 오시면 다시 이야기해야겠군요.”

갑작스럽게 명의 한의원을 떠안게 된 상황이니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재마였다.

인건비 문제도 그렇고 명의 한의원에 대해 정확히 구 원장과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재마의 이야기에 정 실장은 알겠다며 다시 진료실을 나갔다.

혼자가 된 재마는 주민들이 떠나는 해인동에서 명의 한의원을 어떻게 구해야 할지 다시 고민에 빠졌다.

-닥쳐라 이재마. 너 단톡 확인했냐?

강산의 개인 톡이었다.

-아니. 안 봤는데. 왜 또.

박연아와 최중기의 상견례 소식에 가뜩이나 멀리하고 싶었던 단톡방에 아예 관심을 끊은 재마였다.

-한번 들어와서 봐봐라.

강산의 들어오라는 재촉에 300+이상의 톡이 밀려 있는 단톡방 창을 열어보는 재마였다.

-이야. 중기 출세했네.

-너튜브 데뷔냐?

-정한 한방병원 모델이야?

-중기 정도면 얼굴마담 가능하지.

-야, 얼굴마담이 뭐냐. 앞으로 정한 한방병원 이끌어가실 몸한테.

-이러다 대표원장되는 건 아니겠지?

정한 한방병원 대표원장의 조카인 박연아와 최중기가 곧 결혼을 할 상황이 되었으니, 앞으로 최중기의 출세는 어디까지 될지 모른다는 듯 동기들은 떠들어댔다.

거기에다 최중기가 링크를 걸어둔 정한 한방병원의 공식 너튜브 링크에는 신임 한의사인 최중기가 짤막한 한의학 상식에 대한 인터뷰를 한 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정한 한방병원은 규모가 큰 만큼 홍보용 공식 너튜브가 있었는데 그 구독자 수가 100만이 훌쩍 넘어 있었다.

재마는 100만이라는 구독자 수에 놀라 두 눈을 비벼댔다.

-이야. 구독자 수가 100만이면 100만 뷰는 기본으로 찍는 거 아냐?

-최중기. 이거 필터 넣었냐? 너 왜 이렇게 멋있게 나와?

-짜식들. 정한 한방병원 공식 너튜브 데뷔인데 그냥 갔겠냐? 압구정동 유명 샵에서 머리도, 메이크업도 다 하고 갔지.

동기들의 흥분 속에 최중기의 너스레까지.

재마는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한의사도 이제 얼굴로 먹고 살겠구나.

-그러니까. 이렇게 너튜브라도 데뷔하면 어디냐. 이제 중기 더 바빠지겠네.

깨톡왔숑.

-야, 이 정도면 너 보라고 올리는 거 아니냐?

재마가 보고 있을 걸 뻔히 알면서 정한 한방병원에서 자신이 잘 나갈 것을 광고라도 하듯 단톡방에 올린 최중기도 뻔뻔하다며 강산은 개인톡을 했다.

-관심 없다. 쨔샤. 바빠 인마.

재마는 신경질적으로 휴대 전화를 책상 위에 내려놨다.

아무리 생각해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백 번 이 상황을 이해를 해보려고 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박연아가 자신의 큰아버지 눈에 들기 위해 세중한방병원 수석인 자신과 2년 가까이 사귀었다고 치자, 그러면 그 다음번 타자는 적어도 차석인 녀석과 만나야 하는 것 아닌가?

하필 만나도 간당간당하게 면허를 땄다고 소문이 난 최중기를 만나 초스피드로 결혼 소식까지 들리게 하는 박연아가 원망스러웠다.

갑자기 왜 성적도 저조하면서 번드르르하게 잘생긴 녀석을 만나서 자신과 비교를 하게 만드는가.

-최중기, 넌 뭘 믿고 그렇게 시험 기간에도 뻔질나게 소개팅을 하냐?

-저 녀석 병원장 딸들하고 선도 보잖아.

-얼굴로 큰일 할 녀석이네.

동기들이 놀리듯 이야기를 했지만, 속으로는 저마다 부러움도 가지고 있었다.

얼굴로 제아무리 병원장 딸을 만나 팔자를 피게 되어도 수석 자리를 놓치지 않아 박연아와 소개팅을 하게 된 자신과는 차원이 다를 거라 생각했던 재마였지만 결국 연아는 최중기의 손을 잡았다.

깨톡왔숑.

-야, 인마. 원래 식장 들어갈 때까지 모르는 거야. 또 아냐. 박연아가 갈아탈지.

단톡방을 보고도 아무 대답이 없는 재마에게 위로랍시고 개인 톡을 보내는 강산이었다.

전혀 위로되지 않는 위로.

“후.”

재마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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