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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읽는 한의사-16화 (16/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16화

“진 할매. 어디 가는 겨? 노인정으로 안가?”

평소 오전 일찍 골목 안에 있는 대문을 나선 갑순은 곧장 노인정으로 향했다.

집에서 홀로 앉아 TV를 보는 것보다 이른 아침 노인정을 찾은 동년배 할머니들과 TV를 보며 대화를 나누는 것이 훨씬 재밌고, 외롭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노인정으로 향할 생각이 아니라 다른 곳을 먼저 들릴 생각이었던 갑순은 부지런히 발을 옮겼다.

집에서 나와 노인정으로 오는 게 일상이던 그녀가 노인정을 지나쳐 가는 갑순을 보고 옥숙은 아는 체를 했다.

“나 어디 들렀다 갈 데 있어. 먼저 가 있어.”

“어디 가는디. 같이 가자 하지, 왜 혼자 가?”

평소에 바늘 가는 데 실 가는 것처럼 어디든 함께 가던 옥숙은 자신에게 말도 없이 어디론가 가는 갑순을 따라가기 위해 올랐던 노인정 계단을 다시 나섰다.

갑순이 지난번에 한 번 대차게 아픈 뒤 더욱 갑순을 챙기는 옥숙이었다.

“아유. 무릎 아픈데 괜히 계단 내려오지 말고.”

“오늘 이상허네. 나 두고 어디 좋은 데가? 좋은 데 가면 혼자 가지 말고 날 데려가야지.”

옥숙은 내려오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는 갑순을 날카롭게 바라봤다.

평소와 여러모로 다른 갑순의 모습을 의심스럽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옥숙에게 무엇인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조금 서운해지려는 찰라 옥숙의 표정을 읽은 갑순이 민망한 듯 목소리를 낮춰 입을 열었다.

“아니, 뭐. 저기, 저기 한의원 가. 가서 침 맞고 하면 시간 좀 걸리니께. 그냥 여 있어. 댕겨오께.”

갑순은 민망한지, 옥숙을 여기 있으라고 계속 한사코 말렸다.

“한의원 가? 그런데 뭐 못 갈 데 가는 것처럼 그려. 하루 이틀 가나. 김 한의원으로 가는 거야?”

명의 한의원에는 안 가겠다 했던 갑순이니, 재마가 노인정까지 와서 침을 놔 줬어도 경력이 많은 김 원장을 찾아갈 줄 알았다.

“아녀. 김 한의원 안가. 김 원장이 할머니래자너.”

갑순은 김 원장이 자신에게 할머니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는지, 가던 길도 멈추고 옥숙을 바라봤다.

다시 생각해도 고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는 늙지 않나? 늙어서 할배란 소리를 들어보라지 얼마나 서러운지.

“한의사면 환자 마음도 헤아려주고 해야지. 할머니가 뭐여. 할머니가. 늙는 것도 서러워 죽겠구만. 환자면 환자지, 환자도 할머니라 부르다니 다시 가나 봐라.”

“아휴. 알았어. 알았어. 나도 할매라 안 할게.”

갑자기 버럭 하는 갑순을 달랜다고 옥숙도 눈을 질끈 감으며 할매라 안 부르기로 다짐했다.

“그럼 명의 한의원 가는 겨? 젊은 원장헌티?”

“응? 으응. 뭐. 지난번에 침놔주기도 했고 허니께.”

“그려. 잘 생각했어. 젊은 원장 아니었으면 갑순 할…… 아니, 자기 죽을 뻔했으니께.”

“죽을 뻔하기는.”

갑순은 뒷짐을 지고는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허옇게 질려서는…….”

“알았어. 알았어. 나 다녀올 테니까 다른 할머니들한테 이야기하지 말고.”

“왜, 민망한 겨? 젊은 원장 실력 못 믿겠다더니 마음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어서?”

“민망하긴. 뭐가 민망해? 그리고 내가 괜히 마음이 손바닥 뒤집듯 헤까닥 바뀌었나? 내가 먼저 다녀오고 추천할 만하믄 추천할 테니까 그런 줄 알어.”

“알았어. 알았어. 조심히 다녀오셔.”

옥숙은 못 말린다는 듯 혼자 간다는 갑순을 그냥 보내기로 했다.

옥숙이 노인정으로 들어가는 건지 재차 확인을 하는 갑순의 모습에 옥숙은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하여간 할매들이 말이 많아서.”

갑순은 명의 한의원 쪽으로 발을 옮기며 혀끝을 찼다.

한곳에 오래 자리 잡고 살다 보니 동네 사람들이 다 가족 같았다.

사생활이라고는 없고 어디를 가는 지, 어제는 뭘 했는 지 훤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갑순에게 인사를 예의 바르게 하고 지나가는 중학생부터

“할머니, 지난번에 아프셔서 큰일 나실 뻔하셨다면서요? 과일 가게 윤 사장님이 그러시던데.”

“큰일은 무슨. 늙으면 다 한 군데씩 아프고 그런거야.”

“그래도요 건강 챙기셔야죠.”

정육점 사장 또한 갑순을 아는 체했다.

“이 동네에는 비밀이 읍써. 비밀이.”

갑순은 자신이 아팠던 사실을 규모가 크지도 않은 작은 시장의 상인들이 모두 알고 있는 기분이었다.

모두들 아는 체를 하는 것이 귀찮은 것 같지만, 그래도 모두 갑순을 신경 써주는 것 같아 묘하게 기분이 좋기도 한 갑순이었다.

“어서 오세요. 갑순 님.”

갑순이 명의 한의원에 도착해 대문을 열자, 정 실장이 갑순을 반겼다.

바깥에서는 모두 그를 할머니라 불렀지만, 명의 한의원에 들어서면 할머니가 아닌 진갑순 님이 되었다.

“정 실장. 잘 있었어?”

“잘 있었죠. 오래간만에 오셨네요?”

정 실장은 하루가 멀다고 명의 한의원을 찾던 갑순이 왜 발길을 끊었었는지 잘 알면서도 아는 체하지 않았다.

그저 일이 있어 오래간만에 왔다고 받아들이면 되었다.

“응. 내가 바빴어.”

“지난번에 아프셨던 건 괜찮으시고요? 그냥 체기라고 가볍게 넘기시면 안 돼요. 원장님께서 몇 번 침도 맞으시고 약도 드셔야 할 것 같다고 하신 것 같은데…….”

“젊은 원장이 솜씨가 그래도 좋나 봐. 꽉 막혀서 숨도 못 쉬었는데 한 번에 싹 내려간 기분이더라니까.”

갑순은 목소리를 낮춰 정 실장에게 감춰왔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직 제대로 말 못 했지만 정 실장에게만은 말할 수 있었다.

“그런 것 같아요. 오시는 환자마다 아프신 데 콕콕 집어서 치료해 주셨다고 얼굴이 활짝 피어서 나가시더라고요.”

“젊은데 어떻게 그렇게 잘한디야? 구 원장님 닮은 건가? 침놓고 그런 것도 유전이 되나?”

“하하. 그런 걸까요?”

정 실장은 갑순의 마음이 풀어진 것 같아 한시름 놓았다.

“원장님께 진갑순 님 오셨다고 말씀드릴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랴그랴.”

갑순은 정 실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 실장이 가져다준 따뜻한 쌍화탕을 입에 가져다 댔다.

갑순은 자신의 손에 들린 쌍화탕을 다시금 내려다 보았다.

약국에서도 돈 주고 사다 먹어도 보고 아들들이 선물로도 가져다줘 여태 먹어본 쌍화탕이 한 트럭이었지만 맛이 좋은 쌍화탕은 명의 한의원이 제일이었다.

몇 주 만에 온 명의 한의원에서 오래간만에 쌍화탕을 먹으니 온몸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크, 맛이 좋구만.”

* * *

30년 가까이 만에 만난 부녀의 눈물겨운 상봉이 끝나고, 퇴원 수속을 마친 두 사람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세월이 무색하게 중년이었던 구 원장은 이제 희끗희끗하던 흰머리가 전체적으로 새하얗게 새어버렸고, 20대 후반이었던 경옥은 이제 불혹을 넘겨 50대가 다 되어 있었다.

왕래를 하지는 않았지만, 어디에서인가 경옥이 혼자가 되어 아들인 재마를 홀로 키우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선뜻 나서서 그녀를 도울 수 없었던 철원이었다.

자신을 부축하겠다고 손을 내민 딸의 거친 손을 맞잡으니, 그 오랜 세월 어떻게 살았는지 얼마나 많은 고생이 있었는지 가슴이 아려왔다.

“천천히 내리세요. 제가 문 잡고 있으니까요.”

항암치료를 하기 전 병원에 들어설 때보다 더욱 체력이 노쇠해진 철원은 발 한걸음 떼기도 쉽지 않았다.

어렵사리 경옥의 손을 붙잡고 로비 바깥으로 나온 철원은 딸과 함께 택시를 잡아탔다.

“기사님, 구정동으로 가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택시에 올라탄 경옥은 자신의 집이 있는 구정동으로 가 달라 요구를 했다.

“기사님, 아닙니다. 해인동 명의 한의원 앞으로 가주세요.”

“아버지. 지금 이 몸으로 어딜 가시려고 하세요. 우리 집으로 가서 요양하세요. 그냥.”

“요양은 무슨. 40년간 이렇게 오래도록 한의원을 비운 적이 없었어. 얼른 내가 가봐야…….”

“재마한테 맡기셨잖아요. 나이는 어려도 제 할 일 잘하고 책임감 있는 애예요. 걱정시키실 일 없을 거예요.”

경옥은 택시에게 해인동으로 가달라는 철원에게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기사님. 해인동 말고 구정동 965-7번지로 가주세요.”

“어르신. 구정동으로 갑니다?”

택시 기사는 뒤에 나란히 탄 부녀의 실랑이를 듣고, 철원에게 다시 한번 구정동으로 가겠다며 말을 했다.

“여행 가신다고 말씀하시고 자리 비우셨다면서요. 근데 아버지 이렇게 야위셔서 그대로 한의원으로 가면 사람들이 다 걱정할 거라고요.”

경옥은 누구보다도 철원을 잘 알고 있었다.

철원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제 몸도 아니요, 자신의 가족도 아닌 5대째 이어온 명의 한의원이었다.

철원은 자신의 가족보다도 명의 한의원을 찾는 환자들을 더욱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지만 결국에는 홀로 되는 것을 택하고 명의 한의원과 함께 시간을 보냈으니 어쩌면 지금 상황에서도 한의원으로 향하는 것이 맞을지도 몰랐다.

대장암이라는 것을 안 이후에도 자신의 몸 걱정이 아닌, 한의원 걱정.

한의원을 찾는 해인동 주민들 걱정을 했을 철원을 생각하니 또 한 번 울컥하는 경옥이었다.

울컥한 경옥의 한마디에 예전 같았으면 성질을 버럭 내었을 철원이지만, 항암치료 후 기력이 쇠해서인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강남대로를 지나치는 창밖을 바라봤다.

“이제 재마한테 한의원 맡기시고 가끔, 아주 가끔 놀러 가세요. 몸도 성해지시면 저랑 여행도 가시고요.”

“여행은 무슨.”

갑작스레 자리를 비우기로 하자 당황해하는 사람들에게 이제는 한의원이 아닌 제 인생을 살아보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급하게 여행을 잡아서 외손주인 재마에게 한의원을 맡기고 여행을 떠나겠다고 말은 했지만, 지금껏 여행다운 여행을 해본 적 없었던 철원이었다.

그는 한평생 명의 한의원과 함께하느라 인생을 즐길지도 몰랐다.

“다른 집 아버지와 딸처럼 못 지낸 삼십 년 세월 메꾸시려면 아버지 남들보다 두 배, 세 배 저랑 시간 보내셔야 하는 거 알죠? 저도 그만큼 아버지한테 잘할 테니. 제 말대로 하세요.”

경옥은 철원의 손을 더욱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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