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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읽는 한의사-14화 (14/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14화

딱딱…… 딱…….

재마는 진료실 책상에 앉아 불안한 듯 다리를 떨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재마가 무엇을 고민할 때 나타나는 증상인데 한의대에서 시험을 보기 직전이나, 첫 실습을 나갔을 때의 불안함을 느낀 이후로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었다.

명의 한의원에 온 이후로 이렇게 다급한 적은 처음이었다.

동기 중 가장 친한 친구인 강산에게 전 여자친구인 박연아의 소식을 듣고는 저도 모르게 산이에게 덜컥 한의원을 인수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박연아와 동기인 최중기가 상견례를 한다는 소식에 욱했지만, 전화를 끊고 나니 괜한 이야기를 한 것 같았다.

“개발 확정이라도 나면 이야기할 것을.”

재마는 불과 몇십 분 전의 자신의 행동을 답답해하며 머리를 책상에 가져다 박았다.

말을 해도 이왕이면 보상이 결정된 다음에라도 말했다면, 지금처럼 대기실이 파리 날리는 상황이 아니라 환자들도 복작복작한 상황에서 창피한 상황은 모면할 수도 있었다.

“후. 왜 그랬냐. 이재마…….”

친분이 두터운 강산이니, 지금 자신의 상황을 모두 알게 된다 해도 단톡방에 자신의 상황을 그대로 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개원을 한다는 소식에 축하는커녕 걱정하는 소리만 들은 재마였다.

시청률 50프로를 훌쩍 넘었던 한의학 드라마 허준 탓에 한때는 하늘을 찔렀던 한의학과였지만, 이제는 한의원의 수가 차고 넘쳐 개원의인 선배들은 강산의 말처럼 힘들다는 이야기를 토로하고는 했다.

그런 길을 처음부터 걷는다니, 동기로서 걱정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터였다.

똑똑.

재마의 머리가 복잡해 애꿎은 책상에 머리를 내리박는 사이, 정 실장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김성자 님 진료 있으십니다.”

명의 한의원에서 재마의 첫 환자였던 김성자 환자가 병원을 찾은 모양이었다.

걱정은 걱정이었고, 찾아온 환자에게는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래야 입소문이라도 나서 환자라도 늘어날 것이었다.

“아이고. 선생님. 안녕하세요.”

출근 준비를 하다 허리를 다친 성자는 구 원장에게 진료를 받을 생각에 왔다가 명의 한의원의 새로운 원장인 재마에게 치료를 받았다.

제 아들보다도 한참이나 어려 보이는 한의사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는 것이 탐탁지 않았지만, 출근도 해야 했고 무엇보다 다른 병원으로 움직일 여력이 없을 만큼의 통증이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침술을 받았다.

“허리 좀 어떠세요?”

“씻은 듯이 나았다고는 할 수는 없는데, 지난번까지는 걸을 때마다 뒤꿈치까지 저렸거든요. 근데 이제는 그런 거는 없어요.”

어쩔 수 없이 침술을 받았다고 하기에는 꽤 성실히 주 3회 이상 재마의 치료를 받으러 오는 성자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재마를 바라볼 때마다 의심의 눈길을 보냈던 성자의 표정은 점점 풀리기 시작했다.

처음 침을 맞고, 어혈을 풀어주는 약을 지어야 한다고 할 때는 환자도 뚝 끊겨 비싼 한약을 일부러 지어주나 싶었지만 신통방통하게도 약을 먹고 나서는 점점 통증이 줄어들었다.

그뿐 아니었다.

자신이 다친 상황을 동료들이나 친구들에게 이야기했을 때 저마다 그런 경험이 있다고 한마디씩 건넸는데, 나이 오십이 넘어 잘못 넘어졌다가는 한 달 이상 병원 신세를 지는 경우도 더러 있다고 했다.

운 좋게 병원 신세 없이 버틸 수 있는 약한 통증이라고 얕봤다가는 디스크 파열이나 후유증이 남을 수 있으니 치료를 끝까지 받으라는 조언이었다.

“내 친구들헌티 출근도 못 할 정도로 씨게 넘어졌는데 척추 전문병원 안 가고 한의원으로 갔다고 얼마나 욕을 먹었는데…… 그래도 원장님이 솜씨가 좋으셔서 이렇게 걸어 다니고, 출근도 허니께. 다들 대단하다고 하대요.”

성자의 말에 재마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지만, 자만할 수 없었다.

“대단은요. 저야 김성자 님 상황에 맞게 처치를 해드린 거였죠. 한의사로서 제가 김성자 님의 상태에서 도움을 드릴 수 있으니 자신 있게 치료를 하겠다고 말씀드린 거고, 만약에 제가 치료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면 다른 병원으로 전원시켜드렸을 겁니다.”

솔직한 재마의 대답이었다.

무턱대고 환자를 늘릴 욕심에 한방으로 치료가 되지 않는 상태인데 재차 한의원으로 와서 침과 뜸, 한약까지 먹어가며 치료를 하면 호전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지금껏 그런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는 재마였다.

“원장님 말씀 들으니 더욱 믿음이 가네요. 역시 구 원장님 손자 다우세요.”

성자는 젊은 원장을 불신하고 있었다. 그나마 가진 작은 희망은 오랜 명의 한의원의 구 원장 손자라는 것 하나였다.

그런데 치료를 받다 보니 단박에 자신의 증상을 알아보고 적절한 치료를 할 뿐 아니라, 솔직하게 환자를 대하는 것 같아 믿음이 가기 시작했다.

이 정도라면 자신의 몸뿐 아니라 가족, 그리고 동네 사람들에게도 새로 온 젊은 한의사가 실력이 좋다고 추천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감사하고 또 감사해요. 다친 그 날은 어찌나 아찔하던지…….”

다쳤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성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 괜찮아지셨다고 너무 무리해서 움직이시는 건 안 됩니다! 절대로.”

치료를 하고 추이가 좋다며 무리를 했다가 오히려 더욱 독이 되는 경우도 있어 재마는 당부했다.

“네. 알겠습니다.”

“이제는 주 3회 치료받으셨지만, 다음 주에는 두 번 정도만 오셔도 되겠어요. 주 2회 정도 오시다가 호전되시면 주 1회로 줄이시고, 그 이후에는 필요하실 때 오시고 그러면 될 겁니다. 약은 다 드셨죠?”

“네. 딱 15일 먹으니 맞더라고요.”

“부담되시겠지만, 한 재 더 드시는 걸 추천드리고 싶네요.”

재마는 자신이 받았던 보상이 탕제술이었던 것을 떠올렸다.

동네 한의원의 특성상 탕약을 지어 가는 환자가 드물어 탕제 능력이 생긴 것을 좀처럼 확인할 수 없었다.

통증을 느껴 한의원을 찾는 환자들이었지만, 가벼운 침이나 뜸 치료가 아닌 한약을 권유받을 때는 적은 돈이 아니라 가격 면에서 부담스러운 건 당연했다.

그런 면을 잘 알기에 재마는 조심스럽게 한약을 추천했다.

“필요허니까 원장님이 추천하시는 거겠죠?”

“그럼요.”

재마는 자신의 뜻을 알아챈 성자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역시 한 번이라도 효과를 몸으로 느낀 환자들은 그다음 치료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드는 모양이었다.

“그럼 한 번 더 먹어야죠. 뭐.”

성자는 자신의 허리가 이만한 것이 모두 재마 덕이라 생각한 건지, 첫날 약을 지어갈 때보다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정성껏 준비하겠습니다.”

“네. 잘 부탁드려요.”

자신을 믿어주는 환자가 있을 때, 재마가 보답할 수 있는 것은 정성으로 치료를 하는 것이었다.

잘 부탁드린다며 처치실로 자리를 옮기는 성자의 모습에 재마도 고개를 숙였다.

* * *

첫 항암치료를 마친 철원은 오늘 아침 퇴원을 해도 좋다는 담당의의 소견을 받았다.

며칠 동안이나 재차 퇴원하는 날 보호자가 오지 않느냐 물었던 간호사는 오늘은 포기했는지 묻지도 않았다.

“흠.”

짧은 탄식과 함께 철원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퇴원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물먹은 솜 같은 몸을 이끌고 철원은 조금씩 움직여 퇴원 준비를 해야 했다.

“어르신 좀 도와드릴까요?”

옆 침대에서 지내는 환자의 보호자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철원의 상황을 쭉 지켜본 옆 침대에서 입원해 있는 환자의 보호자가 퇴원 준비를 돕겠다고 나섰지만, 그는 끝끝내 거절하고 본인의 몸을 움직였다.

앞으로 익숙해져야 할 상황들이었다.

몇 번이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오늘이 그날 중 가장 활력이 있는 날일지도 몰랐다.

한평생을 다른 사람의 건강을 위해서 살아왔지만, 이제 제 몸조차 한날한시를 내다 볼 수 없었다.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거나, 불편한 상황을 끼칠 날들만 남았는데 제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는 스스로 해내고 싶었다.

“구철원 님. 이제 퇴원 수속 거의 다 되어가요. 원무과에서 연락 오면 제가 병실로 와서 알려 드릴 테니까 앉아서 조금 쉬고 계세요.”

어느 정도 준비를 마쳤을 때, 담당 간호사인 미정이 수속이 다 끝나 간다며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인 철원에게 쉬고 있을 것을 권유했다.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어느 정도 준비를 마친 철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입원을 한 지, 2박 3일밖에 되지는 않았지만 바깥 구경을 한 지 한참이나 된 것 같은 설렘이 들기도 했다.

좀처럼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고 묵묵부답이었던 철원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니, 간호사는 안쓰러울 정도였다.

홀로 퇴원 준비를 하는 철원을 지켜보기 안타까웠지만, 미정이 간호사로서 도울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그를 도울 보호자가 없다는 질문도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느낀 미정은 적어도 택시를 잡을 수 있는 로비까지는 배웅을 할 생각이었다.

“김 쌤. 나 여기까지 처방전 확인하고 원무과에서 연락 오면 로비까지 다녀올게요.”

“네. 선생님.”

후배 간호사에게 미리 언질까지 해놓는 미정이었다.

데스크로 돌아온 미정은 다른 환자들의 점심 식사 이후 나갈 처방약을 다시 확인하며 구철원 환자의 수속이 완료되었다는 전화를 기다렸다.

“저기…….”

“네. 면회 오셨어요?”

전화가 오기 전 제 할 일을 끝내려 바쁘게 약을 체크하고 있는 미정의 뒤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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