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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읽는 한의사-12화 (12/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12화

“와. 윤 사장님이 주셨나 보네요.”

주방에서 큰 쟁반에 과일을 여러 가지 가지고 나오는 재마의 모습을 본 정 실장은 반기면서 쟁반을 받아 들었다.

시장이 작기는 했지만, 몇 있는 과일가게 중 윤 사장의 과일 가게 상품이 가장 좋았다.

큼직하고 신선한 과일이 딱 봐도 윤 사장이 청과물 시장에서 선택한 상품이 분명했다.

“마무리는 잘하고 오셨죠?”

“네. 15분 있다가 침 빼냈고요. 마사지도 조금 해드리고 왔습니다. 침 맞고 나니 손발 따뜻해지신 것까지 확인했어요.”

“다행이네요.”

정 실장의 실력이야 구 원장에게 전해 들었기에, 재마는 뒷일을 그녀에게 맡기고 먼저 한의원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역시 오랜 시간 구 원장과 명의 한의원을 이끌어 온 정 실장은 치료 후, 후 처치까지 완벽하게 하고 온 모양이었다.

아무리 환자들이 없어도 한의원을 오래 비울 수는 없었다.

‘미션 메시지가 뜨지 않았어도 내가 나서서 왕진을 다녀올 수 있었을까?’

정 실장에게는 재마에게 발현되고 있는 능력도 미션도 없을 터였지만 누구보다도 먼저 나서서 왕진을 준비했던 그녀였다.

진갑순 환자가 중심이 되어 노인정의 할머니들이 명의 한의원을 찾아오지 않는 것은 서운한 마음에 선뜻 내키지 않았을 재마였다.

하지만 진료를 보고 먼저 노인정에서 나온 재마는 자신이 침술을 놓은 진갑순 환자의 상태가 궁금했다.

한 번의 침으로 체기가 완벽하게 내려갈 리는 없었지만 꽉 막혔던 체기가 뚫리기는 했으니 효과는 있었을 터였다.

‘효과를 느끼셔야 내일 한의원을 찾아오실 텐데…….’

이왕이면 체기가 완벽히 내려갈 때까지 한의원을 몇 차례 방문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환자뿐 아니라 그 옆에는 앞으로 재마의 환자가 될 수 있는 어르신들이 모여 있었으니 진갑순 환자의 반응이 곧 홍보가 될 수 있었다.

“원장님 침이 직빵이었다고 진갑순 할머니가 칭찬하셨어요. 다른 할머니들도 침 맞고 나서 진 할머니 살아나셨다고 어찌나 좋아하시던지…….”

노인정의 평균 연령은 76세.

비슷한 또래의 어르신들만 모여 있으니 무슨 일이 있을 때 우왕좌왕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급체를 한 건 진갑순 할머니였지만, 고통은 그곳에 있는 할머니들 모두가 함께 느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소화 불량이나 자잘한 병치레가 결코 남 일이 아닌 그들이었다.

작은 병이 큰 병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도 그들이 함께 느끼는 마음이었다,

“아마 구 원장님 은퇴하셨다고 서운해하셨던 어르신들한테 조금은 걱정을 덜어드릴 수 있었을 거예요.”

“정말 그럴까요?”

참외를 받아든 정 실장은 능숙하게 칼로 깎았다.

가지런히 접시에 얹어 재마 앞으로 접시를 밀었다.

“팸플릿 홍보 이런 것보다 할머니들 입소문이 백 배, 천 배는 효과적이니까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요.”

재마는 자신이 바라던 말을 정 실장에게 들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재마는 포크로 콕 집어 정 실장에게, 그리고 그 옆에 시큰둥하게 앉아 있는 최 실장에게도 참외를 건넸다.

“거기에다 상인회 회장님이신 윤 사장님이 원장님한테 호의적이면 상인회에 홍보도 절로 되고요.”

재마가 건넨 참외를 한입 베어 물며 정 실장의 얼굴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누구든 첫인상이 가장 중요했다.

“상인회 회장님이요?”

“네. 아, 원장님은 모르셨구나. 윤 사장님이 상인회 회장님이세요.”

“아…….”

자신도 모르게 상인회장과 안면을 텄으니, 앞으로 지금처럼 관계만 유지하면 될 것 같았다.

‘상인회 회장이면 해인동 개발에 대해서도 잘 아시겠군.’

앞으로 해인동 개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윤 사장에게 물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재마는 저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죠? 최 실장님.”

정 실장은 최 실장을 바라보며 대답을 하라는 듯, 옆구리를 쿡 질렀다.

정 실장의 찌름에 최 실장은 움찔했지만, 시큰둥함은 변화가 없었다.

“저는 모르겠어유. 상인회 사람들도 요즘 개발 이야기만 하고 있고, 누가 누구를 위한 개발을 하는 건지…….”

최 실장은 해인동 개발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인 모양이었다.

“최 실장님은 개발에 반대하시는 입장인가 봐요?”

“그럼 좋겠습니까. 가뜩이나 구 원장님 은퇴하셨다고 환자들 다 떨어져 나갔는데 개발되서 다 나가면……. 20년 동안 몸담았던 밥줄 끊길 것이 뻔한디.”

“원장님,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구 원장님이 너무 갑작스럽게 그만두셔서 최 실장님이 서운하셔서 그런가 봐요.”

시큰둥한 최 실장의 모습에 정 실장은 민망한지, 재마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습니다. 20년을 함께하셨다는 데 그럴 수 있죠. 그리고 서로 잘 되자고 개발을 추진하는 건데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원장님 그런 마음가짐, 좋습니다.”

정 실장은 엄지를 치켜들었다.

“최 실장님. 그리고 베드는 제 맘대로 들이기는 했지만 다른 부분은 실장님들과 상의 좀 하려고요.”

“상의요?”

상의도 없이 처치실에 베드를 들인 것이 맘에 들지 않았던 최 실장은 자신들과 상의를 하겠다는 재마의 말에 저도 모르게 반응을 했다.

“솔직히 누가 봐도 명의 한의원은 오래된 한의원이죠. 역사는 보전되더라도 환자들이 불편해하면 언젠가는 발길이 끊기게 되어 있습니다.”

“오래되기는 했죠. 저희 건물이.”

“중간중간에 손을 보시기는 했지만…….”

명의 한의원 건물은 현대화가 되지는 못했지만, 환자들이 불편해하지 않을 정도로 몇 군데 보수는 해 가며 진료를 해왔던 상황이었다.

“결단을 내릴 때가 되지 않았을까요?”

“결단이요?”

재마의 결단이라는 말에 최 실장은 물론 정 실장까지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는 이왕이면 명의 한의원의 명맥을 이어가는 방향은 고수하되 시대의 변화에는 발맞춰 갈 생각입니다.”

“그니께 그 이야기는 원장님은 해인동 개발에 찬성표를 던지실 이야기다. 이거쥬?”

최 실장의 사투리는 흥분한 만큼 더욱 거세졌다.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닌 건 알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반대보다는 찬성을 할 생각입니다.”

“전 반대예유. 저희 의견도 반영해 주신다 했으니께. 반대합니다.”

최 실장은 재마의 이야기를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진 할매. 좀 괜찮은가?”

“뭐 하러 여기까정 왔어.”

갑순은 죽을 사들고 자신의 집까지 병문안을 온 옥숙을 바라봤다.

평소에는 할매라 부르면, 좋은 이름 놔두고 할매라 부른다고 크게 호통을 쳤지만, 집까지 찾아왔으니 고마운 마음에 그러지 못했다.

“진짜 죽다 살아났어.”

“아이고. 젊은 원장님한테 안 맡긴다고 하더니, 어쩔 수 없었고망.”

갑순은 노인정에서 급체를 하고, 죽다 살아났다고 느낀 갑순은 재마가 아니었다면 정말 저승길로 오를 뻔했다.

화장실과 거실을 오가며 파김치가 되어 있는 상황에서 명의 한의원 구 원장이 없으니 새로운 젊은 원장을 데려와야 했다.

갑순이 아무에게나 제 몸을 맡기지 않겠다고 말했던 터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옥숙이 큰 결심을 하고 노인정 밖으로 뛰어나갈 때는 그녀를 말릴 힘도 없었다.

차라리 김 한의원 김 원장을 부르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조차 뗄 힘이 없었던 갑순은 옥숙의 요청에 윤 사장이 그 길로 명의 한의원으로 달려갔다는 말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짝 원장님도 다 한의대 나와서 했을 건디, 뭐.”

지금까지 새로 온 젊은 원장이 자격증이 없으리라 생각해 몸을 맡기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이제와서 마음을 내려놓은 갑순이었다.

괜한 고집을 부렸던 탓에 민망한지 갑순은 애꿎은 이불만 만지작거렸다.

꽉 체한 상황에서 옥죄는 명치와 깨질 것 같은 두통에 반 기절해 있던 상황에서 젊은 원장의 목소리가 들리고, 제 손목으로 진맥을 짚는 것 같더니 눈을 떠 보라 말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눈동자를 보는 건 구 원장이랑 같구먼.’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몸을 40년 가까이 맡겼던 구 원장과 진료를 보는 것이 같다는 걸 느낀 갑순이었다.

40년 전, 구 원장에게 처음 진료를 받았을 때도 눈동자 하나로 자신을 꿰뚫어 보는 구 원장이 신기했다.

구 원장의 눈만 마주쳐도 아프던 곳이 싹 낫는 기분은 제 기분만은 아니었다.

노인정에 있는 그녀의 친구들도 하나같이 입을 모아 구 원장의 실력을 칭찬해 왔었다.

건강뿐 아니라 자신의 성격까지도 단박에 파악했던 구 원장이었다.

“근디 신기하긴 하던데? 젊은 원장말이여.”

“왜?”

“진 할매 성격 고약한 걸 단박에 알아챘어.”

“뭐야?”

할매라는 말도 참아주고 있었던 갑순은 옥숙의 입에서 고약하다는 말이 나오자 참고 있었던 갑순은 이불을 화들짝 펴들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아이고. 진 할매 살아났네, 성격 안 죽었고만.”

옥숙은 깜짝 놀랐지만 갑순이 본모습을 드러내자 반가운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이런 반응이 정말 진 할매, 진갑순이었다.

“내 성격이 뭐. 뭐 어땠다고. 젊은 원장님이 뭐라고 했는디!”

“그 뭐라더라. 평소에도 체기가 있어서 두통도 잦고, 짜증도 많다 했지 뭐. 다 사실이자너. 무슨 말만 하면 머리 아프다 손사래 치고, 어제처럼 좋아하는 거 먹어도 맛있게 먹으면 꼭 소화 안 된다고 하고. 잘 체하고.”

성격이 고약하다고 말했지만, 옥숙처럼 갑순을 생각하는 사람 또한 없었다.

어떨 때는 멀리 사는 자식보다 가까이 사는 옥숙이 더 의지가 되기도 했다.

“그건 그렇지.”

옥숙 말이 하나하나 맞아 고개를 끄덕인 갑순이었다.

“이번 한 번 침 맞아서 괜찮아졌다고 그냥 두지 말고 몇 번 한의원에 찾아오랴.”

“흠.”

지금까지 제 발로 새로 온 원장에게 진료를 받은 적은 없었던 갑순이었다.

“내가 예민하기는 뭘 예민해. 됐어. 죽 며칠 먹고, 약 먹고 속 다스리면 돼.”

“에이. 한의원 한번 다시 가서 진료 받아보라니께. 뭐 젊었을 때처럼 치료 안 받아도 시간 지나면 싹 낫는 줄 알어?”

말은 저렇게 해도 모두 갑순을 생각하는 마음이었다.

“됐어. 됐어. 죽은 잘 먹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그려. 또 힘든가 보고만. 나는 갈 테니께 몸 챙기고.”

옥숙은 예민해지기 시작한 갑순에게 몸을 잘 챙기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체기랑 짜증이랑 무슨 상관이라고. 그리고 내가 짜증은 무슨.”

갑순은 입으로는 옥숙이 했던 젊은 원장의 말을 부정했지만,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옥숙이 했던 말도, 젊은 원장이 했던 말도 모두 사실이었다.

항상 속이 불편하고, 툭 하면 두통이 밀려오는 상황이라 오래 차를 타고 어디를 가지도 못했다.

막내아들이 지방으로 발령을 받아 자리 잡은 지 수년이 지나,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지만 멀미가 심하다는 이유로 한 번도 찾아가지 못했다.

‘이런 것도 체기랑 연관이 있나.’

아프니까 제 자식들이 더욱 생각이 났지만, 아프다는 소리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타지에 살면서 혼자 사는 애미 걱정이라도 할까 봐…….

예민하다는 말에 버럭 했지만 젊은 원장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치료를 받아도 그때뿐이었던 갑순은 다시 한의원을 찾아오라던 젊은 원장의 한 마디에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고칠 수만 있다면 고쳐서 더 나이를 먹기 전에 어디든 다니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았다.

아들들의 집도 가보고, 갑순의 고향도 가보고 꽃놀이며 단풍놀이며 오랜 시간 즐기지 못한 시간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 오래간만에 드는 갑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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