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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읽는 한의사-10화 (10/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10화

“아이고, 원장님 오셨네. 이리 들어오셔유. 여기예유.”

명의 한의원에서 5분 남짓 떨어진 시장 골목 안쪽 오래된 꼬마 건물 1층에 위치한 노인정.

과일가게 윤 사장의 안내에 얼떨결에 따라온 재마는 자신을 알아보는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노인정까지 오는 길에 자신이 오는 것이 정말 맞는 것일까, 의문을 품었지만 의외의 반응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환대를 받은 적이 없었던 재마는 모든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노인정 안쪽에 있는 방에 누워 있는 진갑순 할머니가 눈에 보였다.

무엇을 잘못 드신 건지, 진 할머니는 사색이 되어 누워 있었다.

재마는 갑순의 왼 손목을 들어 진맥을 했다.

재마의 손에 들린 갑순의 손이 얼음장처럼 식어 있었다.

“언제부터 이러셨어요?”

“그게…… 점심에 족발을 사다 먹었걸랑요. 진 할매가 족발을 좋아혀. 그래서 사왔지.”

언제부터 아프시기 시작했냐고 묻자, 기다렸다는 듯 인파를 뚫고 나온 할머니 한 분이 상황 설명을 시작했다.

언제부터 아팠냐 물었더니 한참을 설명할 모양이었다.

막상 진갑순 환자를 보니 마음이 다급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할머니의 말을 듣는 재마였다.

“좋아하는 족발을 보더니, 눈이 해까닥 돌아서…… 족발을 뜯더라고. 그러더니 잘 먹고 치우고 놨는데 갑자기 토하고 난리 부르스가 난 겨. 아주 이 방바닥을 기어 댕기다 싶이 했당께.”

할머니는 두 손을 어쩔 줄 몰라 하며 방과 화장실을 번갈아 가며 괴로워했던 진 할머니의 상황을 실감 나게 표현했다.

“한참을 그러더니 풀이 죽듯이 푹 쓰러져서 저러고 앓기만 하는 겨. 우리가 손도 따보려고 했는데, 사실 내가 체했을 때 손을 기가 막히게 따거든. 한방만 똭 놔도 꺼억 하고 뜨름을 내고. 근디, 진 할매가 지 몸 애낀다고. 아무한테나 손도 못 따게 혀. 그래서 저렇게 혼자 앓아누웠는데 나이 먹은 늙은이 저렇게 혼자 앓다가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자녀. 아이고.”

할머니의 설명에 뒤에 서서 계시던 어르신들도 그 과정을 다 지켜봐 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평소에도 자주 소화가 안 된다고 하셨나요?”

“원체 예민혀. 아주 요즘 말로 예민, 그 뭐냐. 예민…… 그려, 예민 보스!”

평소 갑순이 얼마나 예민한지 모두 웃음을 참는 표정이었다.

“근디. 원장님. 침은 놓을 수 있는 거제?”

과일가게 윤 사장이 명의 한의원으로 원장님을 모시러 간 건 알았지만, 구 원장이 아닌 이재마가 노인정으로 들어온 탓에 살짝 의심을 가진 할머니는 제 앞에 있는 재마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민하기로 둘째라면 서러운 갑순이 정신을 차리고 나면 무엇이라 호통을 칠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몸을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겠다고 명의 한의원을 가서도 진료도 하지 않던 그녀였다.

“저도 한의사 맞습니다. 수련도 했고, 한의사로 공보의도 다녀왔고요.”

“공보의가 뭐여?”

재마가 답답한 마음에 할머니에게 툭 내던진 말이었지만, 공보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할머니는 뒤에 서 있는 할머니한테 물었다.

몇몇의 할머니가 저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거 있자녀. 군대 대신에 다녀오는 거. 의사 선생님들이.”

“아, 한의사도 그런 거 가는가?”

“그런가 보지 뭐. 한의사 슨생님이 그렇다 하면 그런 거지.”

지금 상황에 믿을 사람이 재마밖에 없는 상황이라 할머니들은 그렇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르신들. 제가 진료를 좀 해야 하니 진정 좀 해주세요.”

“그려그려. 늙은이들은 조용히 해야지. 다들 조용히 좀 햐.”

진갑순 할머니의 절친인 최옥숙 할머니가 다들 조용히 좀 하라며 소리를 쳤다.

재마를 기다리던 어르신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늘어놓느라 노인정은 아수라장과도 같았다.

진료실이 아닌 이렇게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진료를 보는 것이 처음인 재마는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어버버거렸다.

‘정신 차리자. 이재마. 여기는 호랑이 굴이야.’

그렇지 않아도 동네에서 터줏대감이던 명의 한의원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으로 시끌시끌했을 노인정인데 재마의 등장으로 더욱 시끄러워졌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옛말에도 있듯이 백 마디 말보다 한번 보여주는 것이 제일이었다.

갑순의 괴로워하는 얼굴을 보자 조금은 미웠던 감정도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으로 환자를 가려 받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이번이 재마에게 기회일 수도 있었다.

텅 비어버린 한의원의 앞마당이 재마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노인정에는 이렇게 사람이 미어터지는데, 명의 한의원에는 다들 안 온다고?

이번 진료 한 번으로 이 많은 어르신들이 명의 한의원의 문이 닳도록 찾아오게 할 수 있었다.

‘아자아자! 이재마!’

재마는 온 신경을 집중했다.

재마는 그제야 진갑순 할머니의 손목을 다시 집고 맥진을 시작했다.

눈만 보고도 환자의 상태를 알 수 있었지만, 이미 할머니들의 설명했듯 온 기력을 다 쓴 탓인지 자신을 찾아온 재마도 쳐다보지 못하고 눈을 감고 앓는 소리만 내고 있는 진갑순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손목에서 중긴활(中緊滑: 요골동맥이 중간 깊이에서 혈관이 긴장되고 꽉 찬 느낌) 상태로 재마의 손끝으로 느껴졌다.

분명 갑순의 눈과 마주했다면 명치 쪽에서 검붉은 섬광이 뿜어져 나왔을 것이었다.

“진갑순 님, 눈 좀 떠 보시겠어요?”

체증의 맥을 확인하긴 했지만, 할머니의 상태를 더 정확히 알고 침을 놓아야 했다.

“으…… 으.”

진갑순 할머니는 재마의 목소리에 어렵사리 두 눈을 떴다.

여러 갈래로 주름진 눈이 힘겹게 떠졌다.

[홍채를 인식합니다.]

환자명 : 진갑순

나이 : 82세

어렵사리 갑순과 눈을 마주하자, 재마의 예상처럼 검붉은 섬광이 꽉 막혀 정체된 모습이 눈에 보였다.

‘요골동맥 중간 깊이에서 혈관이 가늘어져 긴장되어 있어. 그로 인해 혈액이 속에서 막혀 돌고 있고.’

검붉은 섬광은 혈액이 막혀서 정체되어 있는 상태로 보였다.

상황 설명을 자세히 해준 할머니 말로는 진갑순 할머니가 좋아하는 족발을 급하게 먹느라 체기가 생겼다고 했지만, 평소에도 소화기관 혈의 부족으로 체기가 잦고 소화 기능이 저하된 상태였다.

체증이 오랜 시간 방치되어 소화가 되지 않고, 가슴이 답답하니 배는 차갑고 머리도 아파 짜증이 잦고 예민한 성격을 갖게 되었을 터였다.

할머니의 말처럼 아무에게나 손을 내지 않는 성격이라던 진 할머니의 성격에는 이유가 다 있었던 것이다.

재마는 자신과 함께 노인정에 온 정 실장이 들고 있던 가방에서 침통을 꺼냈다.

급체의 혈자리는 정혈과 십선혈이었다.

보통 체 했을 때 정혈은 민간요법으로 정혈자리를 바늘로 따기도 할 정도로 잘 알려진 혈자리였다.

재마가 정혈 자리에 침을 놓고 반 바퀴 빙글 돌려 손을 놓았을 때, 진갑순 할머니의 미간이 움찔했다.

기가 꽉 막혀 혈자리에 통증이 크게 밀려온 모양이었다.

“아이고. 이제 살았네. 진 할매 이제 살았어.”

“아유. 진 할매라고 하지 마. 이제 침 맞으면 살아날 텐디. 할매라고 했다고 또 호통칠라.”

지켜보고 있던 할머니들도 진갑순 할머니의 미간이 움찔거림에 한마디씩 했다.

십선혈에 침이 들어가자 이번에는 꺽 소리를 내며 트름을 하는 진갑순 할머니였다.

“아이고. 선생님. 원장님. 감사합니다.”

“에휴. 다행이야. 나는 진짜 큰일 나는 줄 알았어.”

“말도 못 하게 아프다가 트름하면 끝났지 뭐.”

할머니들은 박수까지 쳐가며 재마의 침술을 관람하듯 바라봤다.

트름 소리 하나에 이런 열광적인 반응을 보일 줄은 재마도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진료부터 침술을 한 적은 없었던 재마였지만, 혈자리에 침을 모두 놓고 나니 이런 반응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을 모두 놓은 재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최옥숙 할머니를 바라봤다.

“할머니. 여기 매실 있죠?”

“있지, 그럼.”

재마가 공보의를 하는 동안에 서울에서 멀지 않은 지방의 보건소에서 지내 왔는데 여름이 지나면 할머니 환자들이 너도나도 매실액을 한 통씩 가져오셨었다.

음식에도 넣어 먹고, 체기가 있을 때 먹으면 직빵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우던 할머니들은 어느 집에나 일 년 먹을 매실은 필수품이라고 했다.

어르신들이 계시는 노인정이니 매실액이 분명히 있을 터였다.

“15분 침 다 맞고 나면 정 실장님이 침 빼 주실 거예요. 아마 그때쯤이면 진갑순 님 손끝 발끝까지는 혈액이 돌아 따뜻해지겠지만, 배는 차가우실 거예요. 매실액은 체기도 내려주고 앓이도 없애 주니까 따뜻하게 한잔 드시게 하세요.”

“네네. 그렇게 할게요.”

최옥숙 할머니는 재마의 이야기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새겨들었다는 듯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왔던 정 실장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진갑순 할머니가 아마 평소에도 체기가 있으셔서 두통도 잦으실 거예요.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짜증도 많이 내시고 예민도 하시고.”

재마는 오늘 처음 갑순을 진맥했지만 자신의 실력에서 알 수 있는 정도를 이야기했다.

“오마, 원장님 귀신이네. 귀신이야. 진 할매가 한 예민하자녀.”

“할매라 하지 말라니까. 이제 곧 일어날 텐데 또 일어나서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듣고 있던 할머니들이 이번에도 박수까지 쳐가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신 게 다 몸이 좋지 않아서 그러신 거니까. 오늘 한 번 침 맞으셔서 나으셨다고 안 오시지 말고 내일 꼭 저희 한의원으로 오시라고 하세요.”

“내일?”

“네. 오늘 침 맞으셨던 곳 몇 번은 더 맞으셔야 할 거라고요.”

“그랴. 그랴. 전해줄게요.”

최옥숙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화 기능이 이미 떨어진 상태라 꽤 오랜 시간 치료를 받아야 정상으로 돌릴 수 있었다.

연세도 있는 상황이라 치료의 효과는 미미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냥 둘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점점 더 소화 기능이 떨어진다면 두통뿐 아니라 기력까지 떨어져 연세가 많은 어르신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었다.

“아이고. 슨생님. 감사합니다.”

할머니들은 재마가 노인정을 빠져나가기 위해 신발을 찾아 신는 곳까지 따라 나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나이도 많아지고, 자신들의 이야기도 들어 주는 사람이 점점 사라질 때.

많이 말을 하지 않아도 제 상황을 정확히 짚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렇게 고마울 수 없는 거였다.

할머니들은 자신이 아픈 건 아니었지만 매일같이 얼굴을 보는 동고동락 하는 진갑순 할머니의 아픔에 함께 아팠다.

그런 진갑순 할머니를 몇 마디 하지 않아도 혈자리를 콕 집어 침술을 해준 재마를 제 몸을 고쳐준 것처럼 감사해하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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