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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읽는 한의사-9화 (9/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9화

요 며칠 명의 한의원에서 환자들이 넘어와 대기 환자가 모처럼 많았던 김 한의원이었다.

단골 환자들도 갑자기 왜 이렇게 대기가 기냐고 한 소리씩 남기고는 했는데, 명의 한의원에서 베드를 들인다면 기존 김 한의원을 찾던 환자들이 또다시 명의 한의원으로 넘어올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네. 원체 오래된 건물에, 오래된 집기들, 오래된 방식들이라서요.”

재마는 이제 시작일 뿐 자신이 손 볼 곳이 많다는 듯, 한의원을 둘러보며 팔을 걷어붙였다.

김 원장은 오늘 명의 한의원을 들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환자가 늘었다고, 가만히 앉아 진료만 봤다가는 10년 만에 호황을 그대로 놓칠 뻔한 상황이었다.

5대가 이어 왔다는 명의 한의원.

젊은 한의사이기는 했지만, 명맥을 잇기 위해 외손주가 세중대 한의학과를 다니고 있는지는 몰랐던 김 원장이었다.

어르신 환자는 명맥으로 사로잡고, 젊은 연령층의 환자들은 깨끗하게 리모델링 된 이미지로 사로잡으려는 재마의 심상이 그려졌다.

‘이대로 놓칠 수는 없지.’

“허허. 젊은 양반이라 역시 혈기가 넘치는군요.”

김 원장은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당장 한의원으로 돌아가 고심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재마는 김 원장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앞으로 잘 지내보자 이야기했다.

김 원장은 다시 한번 재마에게 악수를 청했다.

재마도 자신을 반겨주기 위한 방문이 아닐 것으로 생각했는지 악수를 청한 김 원장의 손을 꽉 쥐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환자 오셨네요.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엄마 손을 붙잡고, 명의 한의원에 들어선 설아는 어제보다 밝은 얼굴이었다.

설아가 재마에게 인사를 하는 모습에, 재마와 인사를 나누고 명의 한의원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왔던 김 원장은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서둘러 명의 한의원을 빠져나갔다.

재마는 오늘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 설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굴색만 봐도 어제 재마가 해준 배 마사지와 약이 나올 때까지 임시로 먹을 수 있는 처방 약이 효과가 좋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유로워진 얼굴뿐 아니라 낯빛 또한 바뀌어 있었다.

재마는 눈높이를 낮춰 설아의 눈과 마주했다.

[동공을 인식합니다.]

동공을 인식한다는 짧은 메시지와 함께 설아의 배에서 뿜어나오던 어두운 섬광이 확연히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설아. 오늘은 기분이 좋구나?”

“네! 오늘 배도 하나도 안 아프고, 밥 먹고 바나나처럼…….”

“설아야…….”

굵고 부드럽게 변을 봤다는 표현을 거침없이 하는 설아의 손을 잡아끌며 설아 엄마는 얼굴을 붉혔다.

설아가 순수하기 때문에 사실적으로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재마와 정 실장, 최 실장도 아빠 미소로 흐뭇하게 설아를 바라봤다.

아침부터 평소와 다르게 볼일을 본 설아의 기분은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다.

회사에 출근한 아빠에게 전화를 해서 알려주기도 했고, 자신이 아플 때 진료를 봐준 한의사 선생님한테도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언제 한의원에 가느냐고 조르기도 했다.

“왜, 엄마. 진짜 나 바나나처럼…….”

“괜찮습니다. 어머니. 설아가 정말 기분이 좋았나 봐요.”

“죄송해요. 설아가 좀 솔직하죠? 어린아이가 창피한 줄도 모르고, 창피한 건 엄마 몫이네요.”

설아와 달리 엄마의 얼굴은 불에 탄 고구마처럼 붉게 변해 있었다.

설아의 환한 미소 앞으로 재마의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처방술 1/100]

[탕약술 1/100]

‘뭐지? 이건?’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난 것이 의아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설아의 밝아진 표정이 더 반가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이에 맞지 않게 시름이 가득한 얼굴이 재마의 마음에 걸렸던 터였다.

“괜찮습니다. 아이잖아요. 설아, 선생님이 준 약 잘 먹었구나?”

“조금 쓰기는 한데……. 그래도 배 안 아파서 좋아요.”

아무래도 아이에게 쓰는 약은 쓴맛을 경감시키기 위해 단맛을 내는 약재를 추가하기도 하는데, 인공적으로 맛을 내는 것은 재마는 반대하는 편이라 설아가 먹기에는 조금 힘들 수 있었다.

아이로서는 쓴 약을 먹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 잘 먹고 효과도 좋았으니 재마로서는 고마울 따름이었다.

거기에다 설아 덕에 처방술과 탕약술이 미미하지만 1개씩 카운팅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와. 설아 칭찬해 줘야겠는데! 쓴 한약도 잘 먹고.”

재마가 설아와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정 실장은 어제 재마가 처방하고 직접 탕약실에서 달인 탕약을 가지고 나왔다.

“설아 어머니, 원장님이 직접 지으신 탕약이에요.”

“어머, 원장님께서 직접이요?”

진맥은 원장이 하더라도 탕약 정도는 당연히 직원들이 할 것으로 생각했던 설아 엄마는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설아가 힘들 걸 생각하니 직접 신경 써서 하시겠다고 하셔서요.”

“원장님. 감사합니다.”

설아 엄마는 단박에 효과를 본 것도 감사한 데, 어린 설아에게 한 번이라도 더 신경을 써준 재마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결혼을 하고 이 동네에 자리 잡고, 설아를 낳았지만 한의원을 찾을 일이 없어 한의원을 고르는 것부터 고심했던 설아 엄마는 명의 한의원을 찾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색을 했을 때, 해인동에서 가장 후기가 좋은 한의원을 찾아왔는데 바이럴 마케팅에 당하지 않고 친절하고 환자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한의원을 찾은 기분이었다.

“설아, 약이 써도 잘 먹을 수 있지?”

“네! 그럼 바나나…… ㄸ.”

“설아야.”

설아 엄마는 설아의 솔직한 표현을 이번에도 막아섰다.

“아마 이번 탕약을 먹을 때까지는 장내 환경을 정상으로 돌려놓는 데 효과가 좋을 겁니다. 이번 약이 효과가 좋다고 한 번의 처방으로 온전하게 돌리기는 무리가 있을 거예요. 전에 말씀드렸듯이 설아보다도 어머니께서 인내심을 가지고 도와주셔야 합니다.”

“원장님만 잘 이끌어 주신다면 시간쯤이야 문제 되지 않아요.”

재마에게 신뢰가 단번에 쌓인 설아 엄마는 고개를 연달아 끄덕이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이야기했다.

“그럼 제가 알려드린 마사지는 매일 밤 해주시고요.”

설아의 쾌변을 위해 장 마사지 방법을 알려준 대로 매일 저녁마다 정성껏 해주는 설아 엄마였다.

“설아, 약 잘 먹고 다음에 또 보자.”

“네. 선생님!”

설아는 두 손을 불끈 쥐고, 탕약을 불만 없이 먹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직원들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베드부터 새로 들인 재마의 행동에 불만을 품은 최 실장은 데스크에서 설아와 재마를 보며 여전히 씩씩거렸다.

제천까지 가서 구매해 온 약재들을 정리하고 나왔지만, 아직도 재마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최 실장님, 화 좀 푸시죠?”

“정 실장님은 이해가 되십니까?”

“어쩌겠어요. 새로운 우리 새로 오신 원장님이시잖아요.”

정 실장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도 별수 없다는 듯 이야기했다.

“구 원장님은 아무리 우리랑 오래 일하셨어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일을 벌이지는 않으셨어요. 40년을 한의원을 해 오신 구 원장님도 한의원에 작은 규칙을 바꾸려고 하셔도 저희의 의견을 구하셨어요.”

“구 원장님은 우리가 오기 20년 전부터, 한의원을 꾸려 오시면서 직원들과 잘 지내는 방법을 터득하셨으니까요. 이 원장님은 모든 게 처음이시잖아요. 우리가 조금 이해하고 이 원장님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방법을 터득하시길 기다리는 게 맞지 않을까요?”

새로 온 젊은 원장인 재마의 편을 들지도, 최 실장의 편도 들지 않는 중립인 정 실장의 말에 최 실장은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정 실장은 중립을 유지할 사람이었다.

“전 모르겠네요. 하루아침에 이 원장이라는 사람을 원장으로 들인 구 원장님도. 직원들의 동의도 없이 한의원을 싹 바꿀 얼굴을 하고 이리저리 둘러보는 이 원장도.”

최 실장은 지금도 뒷짐을 지고 한의원을 둘러보는 재마를 가리켰다.

“아이고. 아이고! 원장님. 원장님!”

덩치에 맞지 않게 뾰루퉁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최 실장이 자신이 정리할 처방전들을 손에 들고 자리를 일어섰을 때, 급하게 명의 한의원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설아를 보내고 진료실에서 새롭게 떠오른 메시지들을 생각하며 한의원을 서성이던 재마도 화들짝 놀랐다.

건너편 과일가게 윤 사장이 헐레벌떡 명의 한의원에 들어와 구 원장의 진료실 문을 두드렸다.

“구 원장님 안 계십니까?”

“원장님은 지금, 부재중이신데…… 이 원장님께 말씀하시면 돼요.”

정 실장은 구 원장을 찾는 윤 사장에게 구 원장이 지금 자리에 없음을 알렸다.

할머니들 사이에서는 구 원장님의 은퇴 소식이 전해졌지만, 아직 윤 사장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노인정에서 진갑순 할머니가 급체를 하셨나 봐요. 점심 드시기 전까지 괜찮으셨는데, 지금…….”

윤 사장에게 노인정이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정 실장은 데스크 아래 있었던 묵직한 가방을 꺼내 들었다.

“급체하셨는데 환자는요? 환자를 데려오셔야죠.”

재마는 환자는 데려오지 않고, 허겁지겁 달려온 윤 사장을 보며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이미 그녀에게는 익숙한 상황인 모양이었다.

“원장님. 노인정에 가셔야겠는데요?”

정 실장의 말에 상황파악이 되지 않는 재마는 얼떨떨한 얼굴로 무엇이라 말도 꺼내지 못했다.

“제가요? 아니, 한의원을 비우고 제가 어디를 갑니까?”

재마는 황당에서 어이가 없었다.

진료가 끝난 시간도 아니고 한창 진료시간인데 한의사를 부르기 위해 혼자 당당하게 뛰어온 사람하며, 그 사람을 보고 미리 챙겨두기라도 한 듯 왕진 가방을 꺼내는 정 실장하며.

“그럼 환자가 있다는 데 안 가유?”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되냐는 듯한 최 실장의 한마디까지.

‘더구나 진갑순 환자라면 매일같이 한의원은 오지만 한의원의 원장은 얼굴도 보지 않고 돌아가는 할머니 아니야?’

재마는 자신에게 진료도 거부하고 있는 진갑순 환자를 찾아 직접 간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급한 환자를 직접 찾아가 치료하라.]

그때 재마의 눈앞에 또다시 메시지가 떠올랐다.

설아의 진료 후 떠올랐던 보상의 메시지는 반가웠지만 재마를 종용하는 듯한 메시지는 결코 달갑지 않았다.

‘내가 진료를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재마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싫어하는 환자는 굳이 찾아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뿜어져 나왔다.

[미션 미수행 시 페널티 가능.]

“뭐야, 이거.”

재마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뭐기는 유. 어서 가요. 어서 가야쥬.”

최 실장은 잠자코 서 있는 재마의 등을 떠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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