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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읽는 한의사-8화 (8/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8화

“아이고. 김 원장님. 오래간만이에요.”

“오래간만에 오셨군요.”

한의원 개원 이래, 가장 큰 호황을 누리고 있는 김 원장은 어르신들이 문턱이 닳을세라 방문하기에 얼떨떨했다.

“내가 좀 김 한의원에 소원했네.”

개원 이후에 몇 번 치료를 받고는 꾸준히 오시라며 김 원장이 이야기했지만, 한의원 문턱을 나설 때까지만 알겠다고 말을 했지 나가서는 마음이 바뀌었던 어르신들이었다.

해인동에는 오랫동안 터줏대감처럼 지키고 있는 명의 한의원이 있으니 김 원장이 뭐라 불만을 표할 수도 없었다.

한의원이라는 진료과목은 동네에서 자리 잡은 지 오래되고 경력 있는 한의사를 따라가게 마련이었다.

‘명의 한의원에 무슨 일 있나.’

5대째 이어 오는 명의 한의원이 있는 해인동에 호기롭게 개원을 한 제 탓을 할 수밖에 없었던 김 원장은 갑자기 늘어난 환자 수에 명의 한의원의 소식이 궁금했다.

“그런데 명의 한의원에 무슨 일 있어요?”

“아이, 참. 왜 나한테 묻고 그랴.”

진갑순 환자에게 침을 놓으며 김 원장이 슬며시 물었다.

갑순은 왜 자신에게 묻냐며 손사래를 쳤지만, 그냥 넘어갈 그녀가 아니었다.

잠자코 있으면 명의 한의원의 상황을 쫙 브리핑할 그녀였다.

“구 원장님이 은퇴하신댜. 그래서 이번 주부터 새파랗게 젊은 원장이 진료해. 아무리 오래된 한의원이라 해도, 젊은 원장이 잘 보면 얼마나 잘 보겠어. 김 원장이 낫겄지.”

경력을 실력으로 판단하며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어르신들이 서운할 만도 했지만, 그런 서운함은 개원 초기에 이미 해탈해 버렸다.

대놓고 양 한의원을 비교했지만, 그럼 어쩔쏘냐 자신의 처치실 베드에 환자가 누워 있는 것을 속상한 기분은 이미 싹 사라졌다.

기다리다 보면 이렇게 김 한의원에 기회가 오기도 하니까.

그나저나 명의 한의원에 젊은 한의사라니, 대를 이어서 진료를 한다더니 혈혈단신이었던 구 원장을 이어갈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동안 만날 수 있는 환자가 손에 꼽고, 입에 거미줄 치는 것 같았던 자신의 개원 초기가 생각나 씁쓸한 김 원장은, 새로 왔다는 재마도 지금 어떤 기분일지 알 것 같았다.

“어르신, 침 좀 맞으니 괜찮으세요?”

김 원장은 갑순의 허리 통증에 맞는 혈자리에 침을 모두 놓고는 타이머를 맞추며 물었다.

적외선이 나오는 조명까지 갑순의 허리에 맞춰두면 침술은 끝났다.

“아이고. 원장님이 아직 뭘 모르네. 나처럼 늙은이들은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거 싫어. 이름 불러줘야지.”

갑순은 침을 맞고 엎드린 채로 김 원장을 채근했다.

“네?”

“늙은이 보고 어르신이라고 올려 부르면 뭐 할 겨. 내가 어르신이 되기 싫은데. 우리 부모님이 지어주신 좋은 이름 두고 뭐 햐.”

“아. 네. 죄송해요. 제가 잘 몰랐네요. 진…… 갑순 님. 시간 다 되면 간호 선생님이 오셔서 처치해 주실 거예요.”

김 원장은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생각에 뻘쭘해, 처치실을 급하게 나왔다.

한의원 원장이 된 지 15년이 넘어가지만 환자들의 마음을 다 알 수 없는 김 원장은 오늘도 진땀을 뺄 수밖에 없었다.

* * *

“이거 어디로 둘까요. 실장님.”

1톤 트럭에 가득 베드를 싣고 배달을 온 최기훈은 오늘 배달을 받고 고개를 갸웃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배달지는 명의 한의원이었고, 들어 온 물품들은 처치 베드였다.

자신이 아는 명의 한의원은 오래된 한옥이었고, 사람들 말로는 옛날 방식대로 베드 없이 처치실에 누워서 침을 맞는다고 들었다.

젊은 사람들은 불편해하지만, 그곳을 찾는 어르신 환자들은 그 매력에서 못 헤어나와 그곳을 더 찾는다고 했다.

그런 명의 한의원에 베드 배달이라니.

“어머. 베드. 저희 한의원에 배달 오신 거예요?”

정 실장은 갑자기 쳐들어오듯 들어온 베드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실장님 제가 주문했습니다.”

“원장님이요?”

밖에서 배달기사의 목소리를 들은 재마가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어?”

구 원장과 안면이 있는 최기훈은 뜻밖의 인물에 놀란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의원에 들어섰을 때 보통 같았으면 마당을 가득 채웠을 어르신들이 안 계신다 싶었는데, 원장이 바뀐 모양이었다.

그제야 기훈은 베드를 주문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한눈에 봐도 젊어 보이는 젊은 원장이니, 맨바닥에서 침술을 하는 것보다 베드에서 침술을 하는 것이 훨씬 편할 터였다.

병원 물품들을 전문으로 배송하는 사업소를 운영하는 기철은 종종 한의원을 찾고는 했는데, 동네에서 명의 한의원이 실력으로 이름이 났다고 해도 맨바닥에서 침을 맞는 건 꺼려져 한 번도 찾지 않았었다.

‘이제 명의 한의원도 올 만하겠는데?’

기철은 이제 환자들이 입바르게 칭찬을 하는 명의 한의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희 새로 오신 원장님이세요.”

정 실장은 얼떨떨한 상황이었지만, 재마를 소개했다.

“베드는 이쪽으로, 이쪽 방에 놔주시겠어요?

처치실로 사용하는 방이 두 군데 있었는데 재마는 그중에 뒤쪽에 있는 처치실을 가리켰다.

마음 같아서는 첫 번째 처치실에도 베드를 두고 싶었지만 모든 것을 한꺼번에 바꾸기에는 단골 환자들의 마음을 다 돌릴 수 없었다.

“안쪽 방이요?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기훈은 보조와 함께 안쪽 처치실로 침대를 하나씩 옮겼다.

“원장님, 그런데 갑자기 웬 베드를 구매하셨어요?”

아무런 언질도 없이 베드부터 구매를 한 재마의 모습에 정 실장이 물어왔다.

동네가 곧 개발되네, 어쩌네, 떠들썩한데 새로운 집기를 들여놓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나씩 하나씩 바꿔가려는데 젊은 환자의 눈으로 병원을 바라보니 가장 불편한 게 처치실일 것 같더라고요.”

명의 한의원은 단골 환자들인 어르신들에게 초점이 맞춰져도 너무 맞춰져 있었다.

지난번, 정 실장이 젊은 간호 선생님이 출근을 했다가도 금세 그만둬 버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재마는 곰곰이 생각해 봤을 때 가장 시급한 것이 병원의 현대화였다.

유서가 깊은 건,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명의 한의원을 찾는 연령대를 다양하게 하려면 젊은 환자에게도 맞춤이 필요했다.

특히 지금처럼 단골이라 칭하며 오랫동안 병원을 장악했던 어르신들이 한의원에 발길을 끊었을 때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를 꾀할 요량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가장 앞쪽 처치실에 베드를 놓고 싶지만, 그러면 어르신 환자들이 싫어하실 것 같고요.”

나름 고민을 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재마의 모습에 정 실장은 그 맘 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된 명의 한의원에 새로운 바람이 정 실장은 싫지만은 않은 얼굴이었다.

“이게 다 뭐래유.”

정 실장과 재마가 이야기를 하는 사이 한의원 문을 떡하니 막고 있는 베드들 사이로 최 실장이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의 어깨에는 재마가 처음 봤을 때부터 약재를 짊어지고 있었다.

정 실장은 명의 한의원 안살림을 맡고 있다면, 체력이 좋은 최 실장은 전국 약재시장을 돌며 좋은 약재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구매하고 있었다.

오늘도 아침부터 제천 약재시장에 간다는 보고를 들었는데, 벌써 약재를 모두 사서 한의원으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환자들도 급격하게 줄어든 상황에 어수선한 한의원의 모습을 본 최 실장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오랫동안 믿고 따랐던 구 원장님이 은퇴를 선언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한의원 살림을 바꾸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안쪽 처치실에 둘 베드들입니다.”

“베드요?”

“네. 언제까지고 바닥에서 침술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새로운 간호 선생님들도 모시려면 그편이 좋을 것 같아 결정했습니다.”

“아니, 맨바닥에서 지지면서 침 맞는 게 좋다는 환자들이 대다수인디, 이게 다 필요한 거예유?”

약재들을 여전히 어깨에 짊어진 최 실장은 도통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을 했다.

새로운 간호사 선생님들이 더 들어와 정 실장을 돕는 건, 꼭 필요한 일이었지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천천히 나중에 바꿔도 늦지 않을 텐데 더구나 개발이 되면 어쩌려고 새 집기를 들이는가 싶었다.

“최 실장님, 원장님이 그래서 앞쪽 처치실은 그대로……”

“아니, 원장님. 집 나간 환자들을 다시 돌아오게 맹글어야지. 이 오래된 골목에서 은제 새로운 환자들을 모은 대유? 그리고 환자들도 없는 상황에 돈부터 쓰셔도 괜찮아유? 혹시 원장님 명의 한의원이 개발된다니까 보상금 받아서 다른 곳으로 삐까뻔쩍하게 차려 나갈 생각만 하고 있는 건 아니에유?”

최 실장은 자신보다 한참 젊은 재마의 결정이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푹푹 쉬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신의 속마음에 있었던 말까지 툭하고 튀어나왔다.

정 실장은 최 실장의 팔을 툭툭 치며 그만하라는 듯 제스처를 했다.

“새로운 원장님이 오셨다더니, 명의 한의원에도 새로운 기운이 드나 봅니다.”

최 실장과 재마의 팽팽한 신경전이 이는 사이, 그 들의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재마는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젊은 원장님이 새로 오셨다더니, 정말 젊으시네요.”

“누구…….”

얼굴은 젊어 보이는 동안이었지만, 머리가 희끗희끗한 것으로 보아 일부러 새치 염색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남자가 한의원 문을 넘어섰다.

그리고 그는 곧장 재마 앞으로 다가섰다.

“반갑습니다. 옆 골목 김 한의원 김철수올시다.”

감색 개량 한복을 빳빳하게 다려 입은 사내는 손을 내밀어 자신을 소개했다.

“아, 네.”

김철수를 처음 보는 재마는 그의 악수를 받으며 최 실장과 정 실장의 눈치를 살폈다.

“원장님이 새로 오셨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나요.”

김 원장은 자신의 한 손에 들렸던 분홍색 꽃이 핀 난을 재마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한 동네에 같은 과목 병원이 있다는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때로는 든든하기도 하고 정도 가고 합니다. 초반에만 부담스러워요.”

김 원장은 나이가 한참 어려 보이는 재마에게 자신을 부담스러워하지 말라는 듯 이야기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베드는 왜…….”

명의 한의원 처치실에는 베드가 없다는 걸 김 원장도 잘 알고 있었다.

나이대가 지긋한 어르신들은 아궁이에 몸을 지지던 때가 생각나신다며 명의 한의원 방식의 처치실을 선호했지만, 젊은 연령층에는 다른 말이었다.

넓은 방 안에 커튼이 있기는 했지만 그저 허울뿐일 뿐 옆자리에 누워 있는 할머니들의 담소 소리가 그대로 넘어왔다.

그뿐이랴,

-아이고 젊은 처자가 왜 허리가 아프대?

-젊을 때 몸 관리 잘해야 하는 거여.

-무릎은 괜찮지?

침을 맞는 치료시간 내내 할머니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아야 한다며 다시는 명의 한의원에 못 갈 것 같다던 젊은 여성 환자가 김 한의원으로 오고는 했다.

“처치실이 두 곳인데 한 곳은 기존대로, 한 곳은 현대화로 리모델링 할 예정입니다.”

“리모델링이요?”

같은 과의 병원이지만 부담스러워 말라던 김 원장의 얼굴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당장 개발이 언제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요?”

김 원장은 다 쓰러져 가는 한의원에 뭘 새로운 물건을 들이냐는 듯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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