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7화
“소아 변비에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성인일 경우에는 침술도 함께 치료를 병행하겠지만, 일곱 살밖에 되지 않고 한의원에 공포심을 가지고 찾아온 설아에게 침을 놓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간단한 마사지 방법과 약을 조제해 드릴게요.”
“약만 먹으면 괜찮을까요?”
부모로서 아이를 키우며 많은 욕심이 생겨나지만, 그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바람은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가장 기본적인 바람 중 먹고 싸는 것을 어려워하면서 잠도 깊게 들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보냈을 설아와 설아 엄마를 생각하니, 재마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약은 몇 가지가 있어서 설아에게 잘 맞는 약을 찾으면 되지만, 중요한 건 식습관과 배변습관을 들여주셔야 합니다. 약도 수 주 내지, 수 개월간 꾸준한 치료가 필요하고요. 아직 어린 설아에게는 어려운 인내와 노력이 요구돼서 설아 어머니가 힘내셔야 합니다.”
자칫 변비는 별것 아니고 부끄럽다고 생각해서 치료 시기를 놓치기도 하는데 성장 지연과도 연결된 부분이니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네. 선생님.”
설아 엄마는 설아의 눈만 보고도 어디가 아파서 병원을 찾았는지 단박에 찾아낸 재마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변비에 좋다는 유산균과 식품들을 끊임없이 시도했음에도 실패했던 설아의 엄마는 한시름 놓인 기분이었다.
“설아도 잘할 수 있지?”
“네.”
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마의 잘할 수 있냐는 물음에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설아의 의지가 눈에 보였다.
명의 한의원에서 만난 어린 환자의 눈에서 자신과 다른 의지를 마주할 줄은 몰랐던 재마였다.
“나가 계시면 정 실장님이 설명해 주실 겁니다.”
설아와 설아 엄마는 두 손을 꼭 잡고 재마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진료실을 빠져나갔다.
“흠.”
설아가 나간 뒤로 바로 다음 환자가 들어 올 것 같았는데, 좀처럼 정 실장의 노크 소리가 나지 않았다.
왜 환자가 들어오지 않냐고 묻자니 밖에 아직 앉아 있을 할머니들에게 한가한 한의원 원장으로 보일까 봐 그러지도 못하는 재마였다.
똑똑.
그때, 진료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네!”
“원장님. 설아 약이요. 보내주신 것처럼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으로 준비하면 될까요?”
“아, 네.”
정 실장은 재마가 작성한 처방전대로 보중익기탕에 필요한 약재를 물어왔다.
환자가 들어올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던 재마는 환자를 맞이하는 방긋 미소를 지었다가, 뻘쭘한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후. 환자가 없기는 없네.”
정 실장이 나간 뒤로는 책상 위로 손가락을 까딱거리기도 하고, 동기들이 단체 대화를 하는 톡방에도 기웃거렸다.
-우리 수석 재마는 정한 한방병원 입사 안 했다며. 왜 감감무소식이냐.
-여자 친구네 병원 안 들어가고 어디서 뭐 한대?
재마가 정한 한방병원 입사를 고사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고, 그의 행방은 물론 연아와의 관계까지 궁금해하는 동기들의 톡들로 대화방은 들끓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자신이 정한 한방병원의 자리를 뻥 차고, 환자도 드문 명의 한의원 진료실에 앉아 환자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 헛웃음이 나왔다.
자신도 웃음이 터져 나오는 상황에 굳이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한의원을 물려받았다는 것으로 동기들의 안줏거리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재마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톡방을 꺼버렸다.
재마가 단톡방을 기웃거리는 사이 시끌시끌하던 대기실에서 대화 소리가 뚝 끊겼다. 그러고 나서야 재마는 문을 빼꼼 열었다.
“환자분들 다 가셨어요? 진료 대기하시는 줄 알았는데.”
“아, 진갑숙 할머니랑 최옥숙 할머니요? 원래 진료 안 받으셔도 종종 오셔서 대화하시고 가시곤 하세요.”
“아…….”
그래도 한의원 안까지 들어오신 김에 진료라도 보고 가실 줄 알았더니, 재마의 얼굴은 들여다보지도 않고 돌아간 모양이었다.
‘진료도 보지 않을 거면서 한의원에 와서 쌍화차나 축내고 가시는군.’
익히 예상했던 일이지만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마 조금 익숙해지셔야 할 거예요. 동네 분들이 한의원을 사랑방처럼 이용하시고는 해서요.”
정 실장은 자신이 나서서 조금은 설명을 드려야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구 원장이 명의 한의원에 대한 전반적인 일을 정 실장에게 들으라고 하더니, 정말 명의 한의원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얼굴이었다.
“사랑방이요?”
“네. 어르신들이 젊은 사람들처럼 카페에 가서 커피 시키시고 대화하시기도 그렇고…… 한의원 와서 침도 맞고 친구분들도 만나고, 대화도 하고요.”
“아…….”
정말 소문으로만 듣던 사랑방 같은 한의원이 명의 한의원이었다.
재마는 자신이 그런 곳에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휴.”
“이재마 원장님이 보시기에는 조금 답답하시죠?”
정 실장은 재마의 한숨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는 듯,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티가 났습니까?”
“티가 안 났어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한의원을 거쳐 간 젊은 간호 선생님들도 그러셨거든요.”
“간호 선생님들이 다른 분들도 계셨습니까?”
“저도 예전 같지 않아 함께 할 젊은 선생님들을 몇 분 모셨었는데, 다들 적응 못 하고 금방 그만두시더라고요. 결국에 남아 있는 사람은 박 실장님이랑 저예요.”
구 원장이 은퇴한다는 소식에 환자 수가 줄어들었으니 정 실장 혼자 한의원 일을 볼 수 있지만, 재마가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대기 환자가 꽤 되었었다.
처치실도 두 군데이고 모두 환자들이 치료를 받고 있을 때면 정 실장 손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당연했다.
구 원장이 말했던 것처럼 박 실장과 정 실장은 이곳에서만 20년을 함께 한 베테랑 간호사들이었다.
환자들이 새로운 젊은 한의사가 못 미더워 발길은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20년간 한의원을 지켜온 정 실장과의 대화로 어느 정도 위안이 된 재마는 다시 진료실로 들어갔다.
시간도 많은데 앞으로 명의 한의원을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차분하게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 같았다.
* * *
“진 할매. 오늘 명의 한의원 갔었다면서?”
오전부터 명의 한의원을 들렀다가 노인정으로 자리를 옮겨 점심을 해결한 갑순에게 김 할머니가 다가왔다.
“진 할매, 진 할매 할 거여?”
“할매를 할매라 부르지 그럼 뭐라고 그래.”
“할매를 할머니라 부르니까 화나는 거지. 이름 놔두고 뭐 혀. 진갑수니. 이러고 부르면 되지.”
진갑순 할머니는 평소에 자신의 이름이 촌스러워도 불리는 걸 좋아했다.
명의 한의원을 자주 찾는 이유도 거기 있는데, 물론 구 원장이 침도 잘 놓았지만 자신의 마음을 어찌나 쏙 아는지 정 실장은 꼬박꼬박 갑순의 이름을 불러줬다.
“아무튼 새로 온 원장 어뗘. 나 한의원 가서 침 좀 맞고 싶은데 구 원장님이 이제 안 계신다고 해서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여.”
갑순과 옥숙이 명의 한의원을 들렀다는 걸 이미 옥숙에게 들었지만, 솔직하게 믿을 만한 평가를 할 성격은 갑순이기에 그녀에게 다시 묻는 김 할머니였다.
“몰러. 얼굴도 못 보고 왔어.”
“얼굴도 안 보고 그냥 가서 수다만 떨고 온 겨?”
한의원까지 가서 원장 얼굴도 보지 않고 왔다는 이야기에 김 할머니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진갑순답다는 표정이었다.
“아직 실력도 모르는디, 어떻게 내 몸을 맡겨. 이제 나이 먹어서 그렇게 못 해. 그러다 침 잘못 놔서 어디 하나 마비라도 오면 어쩔 껴.”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
갑순이 자기 몸을 사리느라 명의 한의원까지 들어갔다가 마비라도 올까 봐 침도 못 맞았다니 그녀다운 발상이었다.
옥숙은 온 김에 침이라도 맞고 가야 하지 않겠냐 부추겼겠지만, 갑순이 뿌리치고 나왔을 상황이 눈에 훤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할머니도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몸은 소중하니께. 당분간은 명의 한의원 안 가고, 저 짝에 김 한의원 다녀 볼 거야. 김 한의원도 생긴 지 15년은 되었지?”
“그렇지. 젊은 한의사가 동네에 들어왔다. 싶었는데 이제 그 짝도 흰머리가 희끗희끗하던데?”
“그려? 그럼 이제 침 좀 놓겠네.”
한의사의 젊고 나이 듦이 실력의 척도는 결코 될 수 없었지만 할머니들은 다른 모양이었다.
김 한의원이 처음 생겼을 때도 원장이 젊다는 이유로 노인정 할머니들은 명의 한의원과의 의리를 지켜가며 발길을 옮기지 않았다.
김 할머니의 말에 갑순은 김 한의원으로 가기로 맘을 굳혔다는 듯이 말했다.
오래된 명의 한의원과의 의리가 젊은 원장의 등장으로 끊기게 생긴 상황이었다.
“아이고, 왜 그려. 아까 봤잖아. 어린 애 진료실 들어갔다가 나와서 애 엄마가 신기하다고 정 실장한테 덜컥 약 짓고 가는 거.”
“뭐, 애 변비라서 잔뜩 울상으로 들어왔다가 환해져서 나간 애 엄마?”
갑순과 함께 명의 한의원에 갔었던 옥숙은 종이컵에 믹스 커피를 타서 방 안으로 들어오며 아까 본 대로 이야기를 했다.
“애 변비가 뭐 대수라고. 거기에다가 변비인데 한약 지으라는 것 보소. 그게 다 구 원장님이랑 다르게 한의원 운영하려고 하는 거라니까. 동네 장사인데 침으로 병을 다스려야지. 약부터 들이밀어 봐. 우리가 늙어서 아들 용돈 받아 사는 데 약 먹을 돈은 있고?”
갑순은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어린 애가 왔다가 약을 지어갔어?”
김 할머니는 자신이 보지도 듣지도 못한 상황을 갑순의 이야기만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변비라면서 왔는데, 대뜸 약을 지어가더라니까.”
“나도 한의원에 가서 약 지으라는 소리 들으면 곤란한디.”
한의원을 참새 방앗간처럼 들리며 침도 맞고, 부항도 뜨는 것이 일주일 중 가장 중요한 스케줄인 노인정 어르신들은 갑순과 옥숙의 말에 가까이 모여들었다.
진료비가 15,000원이 넘지 않는 경우 본인 부담이 1,500원밖에 되지 않는다. 1,500원으로 만수를 누릴 것 같은 편안함을 느끼는 할머니들에게 약부터 들이민다는 소식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젊은 의사가 별수 있어? 구 원장님처럼 우리 사정 안 봐주고 돈 되는 약부터 지으라 하겠지.”
“명의 한의원 안 되겠네…….”
“그러게. 왜 젊은 선생님으로 골랐대. 이왕이면 실력 있고 경력 있는 원장으로 모셔오지.”
할머니들은 갑순의 이야기만 듣고 투덜거림만 늘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