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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읽는 한의사-6화 (6/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6화

“구 원장님 말씀대로 명의 한의원은 제가 물려받겠습니다.”

구 원장의 원장실로 들어온 재마의 첫 마디였다.

이미 처치실에서 재마의 뜻을 들었던 구 원장은 이미 자신의 짐을 챙기고 있었고, 놀랍지 않은지 반응도 크게 하지 않았다.

“이 한의원은 내 조상님들이 5대째 이어 온 한의원이다. 인술을 펼치는 진료는 한의사로서의 사명이지만 나에게는 그 이상이기도 해.”

명의 한의원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해줄 여유도 없었던 구 원장은 자신을 이어 한의원을 받을 재마에게 지금이 제때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청일 전쟁부터 시작해 나라를 잃은 순간에도 그 뜻을 잃지 않고 이어 온 병원이야.”

구 원장은 자신의 한평생을 한의원에서 지내면서 자신의 운명이라 받아들이고 조상들이 이어 온 뜻을 받는 것이 제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외할아버지의 존재조차 모르고 27년을 살아온 재마에게 하루아침에 조상들의 뜻이라는 것이 와닿지 않았다.

“전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대대로 이어 내려져 온 환자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재마에게 이어졌다고는 하지만 그 능력을 이용하고 명의 한의원의 뜻을 잇는 것은 재마에게 달렸다.

“전 제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능력을 어떻게 한의사로서 이용할지. 앞으로 이 능력은 어떻게 발휘되는지가 중요한 거지 명의 한의원의 명맥 이런 것은 제게 중요치 않습니다.”

재마는 자신에게 명의 한의원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구원자의 말을 딱 잘랐다.

“또 한 가지 제 어머니께서 구 원장님의 존재를 왜 제게 단 한 번도 말씀하시지 않은 건지 궁금합니다.”

“그건…….”

재마는 명의 한의원을 시작하고 지금까지 5대째 이어 온 명맥이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 그녀의 아버지인 구 원장이 어쩌다 30년 가까이 존재도 찾지 않고 지내는 것인지가 중요했다.

“선생님. 말씀하신 대로 약재 준비했습니다.”

구 원장이 떼어지지 않는 입술을 달싹이는 사이, 정 실장이 노크를 하고 원장실로 들어왔다.

김성자 환자의 약재가 준비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탕약은 정 실장이나 박 실장한테 부탁해도 괜찮아. 함께 한 지 20년은 족히 된 사람들이라 실수 없이 해낼 게야.”

굳이 자신이 탕약을 짓겠다 이야기했던 재마에게 구 원장은 자신의 직원들인 정 실장과 박 실장에게 맡길 만하다고 했다.

“아닙니다. 한의원 분위기 파악도 그렇지만 환자들하고 제가 신뢰를 쌓으려면 탕약 짓는 일부터 제가 해야죠. 원장님 은퇴하신다는 소문에 한동안은 바쁠 것 같지도 않은데요.”

정 실장이 들어 온 문 너머로 텅 비어 있는 마당이 재마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명의 한의원은 이어 받되, 제 방식대로 운영할 겁니다.”

“명의 한의원은 이 자리에서 5대 째…….”

“5대를 지나온 것보다 최근 20년 사이에 한국은 더 많이 변했어요. 그리고 앞으로 더 짧은 미래에 더 많이 변할 겁니다. 언제까지 성장하지 않고 제자리에 남아 있는 건 저를 위해서나 명의 한의원을 위해서도 좋지만은 않을 겁니다.”

재마는 자신이 한의원을 물려받기로 한 이상 구 원장님의 신념대로만 한의원을 운영하길 원하지 않았다. 더구나 이곳이 개발 예정지로 지정이 되었기에, 이 자리에서 그대로 이어가기도 쉽지 않았다.

-오빠 지금 제정신이야?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노려보던 연아의 시선과 목소리가 다시금 떠올랐다.

제정신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정신이 아닌 이재마가 어디까지 성공하는지, 명의 한의원이 어떻게 변하는지 보여줄 생각이었다.

* * *

“원장님 은퇴하신다는 말이 사실이여?”

“그라믄 이제 내 목, 어깨, 허리는 누가 책임지는가.”

지난주부터 명의 한의원을 찾는 단골 환자들에게 구 원장이 일선에서 물러날 예정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소식을 들은 환자들의 앓는 소리가 더해졌다.

당장 몇 개월 안에 동네를 비워줘야 한다는 것은 아직 직접적으로 와닿지 않았는데, 구 원장의 은퇴 소식은 단번에 와닿았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원장실을 정리 중인 구 원장.

그리고 아직 이름조차 새겨지지 않은 진료복을 입으며 진료를 준비하는 재마의 귀에도 들어왔다.

“이제 새로운 원장님이 오실 거예요. 젊고 실력 있으신 분이에요.”

“잘 생겼는가?”

정 실장이 환자들의 눈치를 봐가며 새로운 원장인 재마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자, 대뜸 잘 생겼는지 묻는 진갑순 할머니였다.

“잘생긴 건 뭐하러 묻는대? 침만 잘 놓으면 되쟈.”

“구 원장님이 잘생겼잖어. 침이 아파도 원장님 잘 생겨서 참을 수 있었다니까. 나는.”

“허이고. 한의원에 원장님 얼굴 따진다는 소리는 처음 듣네.”

“왜 그려. 요즘 테레비에도 잘생긴 의사들 나와서 노닥거리는 프로그램도 많구먼.”

“그야…….”

새로운 원장에 대해 물으러 왔던 진갑순 할머니와 그녀의 절친한 친구 최옥숙 할머니는 정 실장을 앞에 두고 실랑이를 벌였다.

“진갑순 님, 최옥숙 님. 여기 서서 이러시지 마시고 쌍화탕 한잔 드릴 테니까 여기 앉아서 천천히 이야기하세요.”

정 실장은 두 할머니의 실랑이가 익숙한지, 당황하지 않고 두 할머니를 평상으로 안내했다.

진료복을 입고 바깥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듣는 재마는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 안에는 재마의 모습에는 낯선 눈동자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메시지를 보기 시작하면서부터 한쪽 눈동자의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너에게 주어진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너에게 달렸다. 그 능력을 키우는 것도 네 몫이야.

홍채만 보고도 환자를 파악할 수 있는 초능력과도 같은 능력을 가지고도 이 정도밖에 한의원을 운영하지 못했다니.

재마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래된 집기들과 오래된 인테리어.

이제 자신이 운영하기로 했으니 하나씩 바꿔 갈 생각이었다.

“차라리 잘 됐군. 개발돼서 싹 밀려 버리면 보상금으로 강남 언저리라도 자리를 구하면 될 거야.”

위기에 빠진 명의 한의원을 구하라는 두루뭉술한 메시지였으니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구하든 재마에게 달렸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다 쓰러져 가는 개발 예정지의 한옥 한의원보다는, 규모가 작더라도 삐까뻔쩍한 새 건물에 있는 한의원이 환자의 호감은 더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옛말이 있겠어. 다 보기 좋아야 환자도 의사에게도 좋다는 거야…….”

재마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가운 매무새를 다듬었다.

재마가 이번에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침이 아파도 원장님 잘 생겨서 참을 수 있었다니까.

조금 전 바깥에서 환자가 했던 말을 떠 올렸다.

모두 옛말에 일맥상통한 이야기였다.

“이 정도면 할머니들이 좋아하시려나.”

머리를 내리는 것이 좋을지, 올리는 게 좋을지.

할머니들의 취향을 생각해서 이리저리 머리를 매만지던 재마는 새로운 메시지가 뜬 걸 깨달았다.

[첫 진료 성공.]

[홍채 인식 진료를 통해 단골 환자를 확보하세요.]

지금까지 홍채 인식을 하라던 메시지만 확인할 수 있었던 재마는 거울 앞에서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뭐야. 이거.”

아른거리는 새 메시지를 지워 보려고 손을 휘적거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단골 환자? 여기 명의 한의원이야. 아무리 구 원장님이 은퇴하신다고 해도 손가락만 빨게 되지는 않을 거라고.”

환자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기는 했지만, 새로운 원장이 왔다는 사실에 호기심을 가지고 찾아오는 환자들도 있을 터였다.

다행인 건, 구 원장이 자신의 손주라는 사실을 김성자 환자에게 알렸으니 다른 환자들 사이에도 소문이 날 수 있었다.

“원장님. 진료 시작하겠습니다.”

재마가 진료 준비를 하는 사이, 정 실장이 노크를 하고 진료 시작을 알렸다.

“네. 들어오시라고 해요.”

재마는 머리를 다시 한번 쓸어 넘기며 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정 실장이 나간 뒤로 조금 전까지 구 원장의 외모를 이야기했던 할머니들이 들어 올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부끄러워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는 어린 여자아이와 어머니가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이른 아침부터 어린아이의 손을 붙잡고 한의원을 찾은 어머니의 얼굴은 어두웠다.

“어디가 아파서 왔을까.”

“제가요…….”

의자에 앉아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긴장이 되는 모양이었다.

재마는 아이의 손을 잡고 진맥을 짚으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이 맞춰 볼까?”

“정말요? 어디가 아픈지 말 안 해도 아실 수 있어요?”

“그럼. 자, 선생님 한번 바라볼까?”

재마는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아이의 눈을 바라봤다.

[홍채를 인식합니다.]

환자명 : 유설아

나이 : 7세

이번에도 역시 아이의 배 쪽에서 섬광이 나왔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두운 불빛이었다.

마치 무엇인가 정체되어 있는 듯한…….

재마는 설아의 왼쪽 손을 들어 손목에 자신의 손가락을 얹었다.

“화장실을 가기 힘들어서 왔구나? 밥은 잘 먹어? 입맛도 없지?”

재마가 예상했던 것처럼 진맥을 통해 설아가 변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재마는 긴장을 한 설아에게 별일 아니라는 듯, 아이의 상태를 물었다.

“어머. 선생님. 바로 아시네요. 얘가 어릴 때부터 변비를 앓더니 요새는 밥도 잘 안 먹고…….”

어두웠던 설아의 어머니는 재마의 속 시원한 한 마디에 얼굴색이 변하며 설아의 상태를 설명했다.

“소아 변비는 흔한 질병이에요. 이유식이나 대변 가리기 시작하면서 심리적, 신체적으로 장애를 일으키기 시작하기도 하고요.”

“관장을 하면 좋다고 해서 관장도 몇 번 해봤는데 나아지기는커녕 애가 자지러지기만 해서요.”

재마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설아의 배를 이리저리 꾹꾹 눌렀다.

“서…… 선생님. 아파요.”

“아이고. 설아가 아프구나. 미안해. 선생님이 아프게 누르지 않는다고 했는데 아프게 했네.”

아이의 배에서 어두운 불빛이 뿜어 나오는 만큼 배가 굳어 딱딱히 굳어 재마의 손이 닿을 때마다 통증이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관장은 아이가 관장에 의지하게 되면 변비가 더 악화돼요. 지금도 배 속이 딱딱하게 굳어서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럼 어떡하죠. 선생님?”

설아의 엄마는 자신의 딸 아이의 배가 딱딱하게 굳었다는 말에 얼굴이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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