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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읽는 한의사-4화 (4/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4화

“오빠 지금 제정신이야?”

백화점 명품관을 산책하듯 걷던 연아가 발걸음을 멈춰 섰다.

조금 전 재마는 정한 한방병원 합격 소식을 다른 사람보다 먼저 듣고, 이야기를 전한 여자 친구 연아에게 외할아버지의 한의원을 물려받겠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요 며칠 제정신으로 지낼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할아버지의 등장, 그리고 가업을 이으라는 통보.

그뿐이 아니라 사람들과 눈만 마주칠 때마다

[홍채를 인식하세요.]

라는 메시지와 함께,

[위기에 빠진 명의 한의원을 구하라.]

지속해서 명의 한의원 부임을 종용하는 듯한 미션.

두 가지 메시지가 차례로 뜨면서, 결코 이 상황을 무시하고 가볍게 넘길 수는 없었다.

한의사라면 진맥도 잡아보지 않고 눈만 보고도 환자의 병을 아는 것은 하늘이 주신 능력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한의사로서 마주한 사람이 아닐 때는…….

“아니야. 내 생각에 오빠 지금 제정신 아니야.”

정한 한방병원 입사를 반려하겠다는 말에 게거품이라도 물듯 화를 토해내는 연아의 얼굴을 보면서도

[홍채를 인식하세요.]

라는 메시지를 마주해야 했다.

그리고 또…….

구 원장의 복부에서 뿜어 나온 섬광의 정체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원장? 누가 그렇게 후져 터진 곳 원장 하래? 그냥 정한 한방병원에서 차근차근 페이 닥터 생활하면 된다잖아. 우리 큰아빠가 내 남자친구인데, 나랑 결혼할 사람인데 모른 체하겠어? 적어도 아무 빽 없이 근무하는 일반 한의사들하고는 다를 거 아니야.”

재마의 한의학과 동기들 모두 그의 여자 친구의 집안에서 운영하고 있는 정한 한방병원에 재마가 입사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재마의 올 수석이라는 타이틀은 물론, 박연아까지.

그가 정한 한방병원을 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재마가 선택하겠다는 ‘명의 한의원’에 대해 단 한 번도 관심을 가져 본 적도, 알아보려고 한 적도 없었던 연아의 입에서 ‘후져 터진’이라는 말이 나오자 재마는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어. 내 이름도 부르지 마. 나 여기서 갈 거니까.”

연아는 더 이상 재마와 할 말이 없다는 듯, 퍼스트 라운지로 들어가 버렸다.

이렇게 될 것이라 며칠 동안 고민하며 수 없이 예상했음에도 쓰라린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띠링.

연아가 혼자 퍼스트라운지로 들어가고 5분도 되지 않아 재마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들어왔다.

-우리 관계 다시 생각해 보자.

남들은 목적 있는 연애라고 이야기할 줄 몰라도 연아만은 믿었던 재마는 눈에 보이는 메시지가 믿기지 않았다.

* * *

“사장님, 여기 소주 한 병 더요.”

재마는 포장마차에서 꼼장어 하나, 우동 한 그릇을 시켜놓고 소주 두 병을 비워냈다.

평소에 술은 마셔도 한 병 반 이상 마셔 본 적이 없었던 그였지만, 첫 여자 친구와의 첫 이별에는 술이 달게만 느껴졌다.

“총각. 술 잘 못 마시지? 그만 마셔. 무슨 일이 있는 줄 모르겠지만.”

사장님은 재마가 가져다 달라는 소주는 가져오지 않고, 청양고추와 소금을 뿌려 맵고, 짭조름하게 무친 오이무침을 가져왔다.

“이건 서비스. 시원해서 아마 술 좀 깰 거야. 집에는 가야지.”

“서비스 없어도 돼요. 술 주세요. 술.”

사장님이 가져다주신 오이무침을 밀어내며 재마는 손을 쭉 뻗었다.

“그만 마시라니까아. 나 술 이제 더 이상 안 팔아. 알았어?”

소주 한 병 더 달라고 손을 들고 흔들어대던 재마는 정도껏 술을 파는 것이 장사의 모토라고 이야기 하는 사장님에게 더 이상 조를 수 없었다.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난 재마는 계산을 하고 휘적휘적 포차를 빠져나왔다.

“아우 씨. 오늘 같은 날 많이 먹을 수 있는데.”

평소에 동기들이 부어라 마셔라 할 때는 알콜 향이 진하게 느껴졌다. 평소의 재마라면 더 이상 마실 수 없을 정도로 마셨는데, 오늘은 소주가 단 걸 보니 술이 받는 날이었다.

생전 이런 날이 없었으니, 오늘은 취해도 됐다.

아니, 취해야 했다.

집을 못 찾아갈까 봐 걱정이 안 되냐고? 그 정도는 걱정이 되지 않았다.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될지가 막막했다.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능력을 갖추면 뭐하나.

대한민국에서는 빽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었다.

구철원 원장을 봐도 그랬다.

제아무리 동네에서 명의라고 소문난 명의 한의원을 5대째 운영해 왔지만, 동네에서만 유명했다.

그렇게 지키고 싶은 한의원을 지키기도 못하고 결국에는 생전 본 적도 없는 외손주를 찾아 한의원을 넘기는 상황이었다.

재마가 바라던 미래는 동네 한의원에서 평생을 썩는 것이 아니었다.

더더욱 자신은 히어로처럼 위기에서 한의원을 구해 낼 수 없었다.

“후…… 여기가 어디더라.”

포차에서 나온 재마는 정신을 차리려고 다리에 힘을 줬다.

“아, 여기 해인동이구나. 해인동. 우리 엄마가 태어난 동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재마에게 해인동이란 의미 없는 그저 옆 동네였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제 연아와도 헤어질 상황이니 곧 죽어도 이 자리에서 성공을 할 수밖에 없었다.

휘적휘적 어디론가 걷던 재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앞에 보이는 광경에 손을 번쩍 들었다.

“거기. 거기 아줌마!”

“아악! 깜짝이야. 뭐예요?”

“왜 한의원 앞에 쓰레기를 버려요. 쓰레기를!”

“지금 문 닫았는데, 쓰레기 좀 버리면 어때요. 여기가 쓰레기 버리는 자리인데.”

명의 한의원에서 5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전봇대 앞.

골목에서 쓰레기 봉지를 들고나온 아줌마 말고도 이미 몇 개의 쓰레기봉투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왜 여기가 쓰레기 버리는 자리냐고요. 저 앞 전봇대도 있고. 저 뒤쪽에도 있는데.”

술에 취한 재마는 명의 한의원 앞 말고도 쓰레기를 놓을 만한 자리를 손가락질하며 가리켰다.

“아우. 왜 나한테 그래요. 사람들이 여기다가 다 버리는데, 하루아침에 결정된 것도 아니고 10년 살면서 이런 일 처음 겪네? 그나저나 청년, 청년이 무슨 상관이에요?”

나이도 어려 보이는 재마가 왜 한의원 앞에 쓰레기를 두냐며 이래라저래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아주머니는 술에 취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재마의 얼굴을 보려고 애썼다.

“내가 누구냐면요!”

재마는 고개를 팍 쳐들며 눈을 부릅떴다.

“동네 시끄럽게 밖에서 떠들지 말고 안으로 들어와라.”

재마가 아주머니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톡톡히 알려주려고 하는 타이밍에 명의 한의원의 대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제가요!”

“안으로 들어오래도!”

구 원장은 안으로 들어오라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가려는 재마에게 호통을 쳤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 말해보겠습니다.”

구 원장은 한의원 옆 골목 주민인 아주머니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를 했다.

“아니에요. 원장님. 원장님이 죄송하실 건 없죠.”

구 원장과 재마를 번갈아가며 바라본 아주머니는 두 사람의 관계가 궁금한 듯했지만 재마가 구 원장의 호통대로 한의원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들어가세요.”

“네. 원장님도 들어가세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구 원장과 똑같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아주머니도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왜 아무 말도 못 하게 하시는 겁니까? 한의원 앞이 쓰레기 무덤도 아니고.”

“지난 수십 년간 주민들이 그 자리에 쓰레기봉투를 버려왔어. 아파트도 아니고 이런 골목 상권에서는 내 집 앞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 싫다고 거부할 수 없어.”

“그래도. 싫다는 티는 낼 수 있지 않습니까. 원장님 한의원 이미지를 생각해서라도요.”

“한의원 이미지를 생각한다는 녀석이, 다 저녁에 목소리를 높여 주민들과 실랑이를 하는 거냐?”

구 의원은 조금 전 재마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콕 집었다.

“네가 선택을 받아 능력을 물려받기로 된 이상 앞으로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할 주민들이다. 환자들도 중요하지만 주민들과 어우러지는 것도 그만큼 중요해.”

구 원장은 재마가 명의 한의원을 이어받기로 결정이라도 된 것처럼 이야기했다.

“요즘 세상에 그런 게 어딨습니까. 환자는 환자고, 의사는 의사지.”

구 원장의 말에 재마는 콧방귀를 꼈다.

“그럼 주민들과 잘 어울려 지내신 분이 지키고 싶은 한의원은 신출내기인 제게 넘기고 왜 그만두신다는 겁니까?”

이미 구 원장의 홍채를 바라봤던 그 순간.

구 원장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은 재마였지만 아직까지 구 원장의 입으로 구 원장의 상태를 직접 듣지 못했다.

“네 눈에서는 내가 이미 한의원을 운영하지 못할 상황이라는 걸 알아챈 것 같지만 아직 아는 체는 안 하고 싶나 보구나.”

구 원장은 이미 재마의 눈에서 알 수 없는 메시지를 읽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알고 계셨어요?”

“그럼 내가 모르고 너한테 이 한의원을 넘길 것 같았니. 너 아니면 이 한의원을 이어 갈 사람이 없단다.”

재마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며칠 전부터 눈앞에 아른거리는 메시지들의 정체가 명의 한의원을 이어받는, 선택받은 한의사에게 주어진 능력이라는 것을.

자신이 아무리 원하지 않더라도 명의 한의원을 구해내기 위해 앞으로 뜻하지 않은 일들이 펼쳐지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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