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자를 읽는 한의사-1화 (1/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1화

“오빠 지금 제정신이야?”

백화점 명품관을 산책하듯 걷던 연아가 발걸음을 멈춰 섰다.

연애를 하며 이런 일이 많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남자의 예리한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내 연애 인생을 뒤집을 만한 일을 하긴 했군.’

연애뿐 아니라 인생이 뒤집힐 만한 사건의 조건은 충분히 부합할 만한 일이었다.

“제정신이야. 그러니까 이렇게 멀쩡하게 너 만나고 있지.”

“아니야. 내 생각에 오빠 지금 제정신 아니야.”

연아는 쇼핑할 맛이 안 난다는 얼굴로 명품관을 빠져나왔다.

‘큰일이다. 쇼핑을 그만두다니.’

빠른 걸음으로 한참을 앞장서서 걷던 연아가 우뚝 섰다.

“나랑 결혼할 생각이 없는 거지?”

“무슨 소리야. 내가 정한 한방병원에서 근무하는 거랑 명의 한의원에 있는 거랑 뭐가 달라진다고.”

“진짜 몰라서 그래? 그렇게 쥐 콧구멍만 한 한의원에 있는 거랑 우리 큰 아빠 병원이랑 비교가 돼? 거기에다 뉴스도 안 봐? 곧 거기 싹 다 밀어버린다잖아.”

“그래도 원장이잖아.”

“원장? 누가 그렇게 후져 터진 데서 원장 하래? 그냥 정한 한방병원에서 차근차근 페이닥터 생활하면 된다잖아. 적어도 아무 빽 없이 근무하는 일반 한의사들하고는 다르게 봐줄 거 아니야.”

“연아야.”

재마는 연아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말들을 모두 이해해 주고 싶었지만, 자신의 결정을 받아들일 생각조차 하지 않는 그녀와 대화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았다.

“됐어. 내 이름도 부르지 마. 나 여기서 갈 거니까.”

연아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재마의 말을 딱 자르고 퍼스트라운지로 들어갔다.

2년간 연애를 하며 여자친구인 연아에게 모든 것을 맞춰왔던 재마였다.

사람들은 세중대학교 한의학과 수석인 재마를 콕 집어서 소개를 받겠다 했던 연아와 돈도 빽도 없이 내세울 것이라고는 피나는 노력으로 수석 자리를 한 번도 놓치지 않은 재마의 만남이 서로에게 전략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재마는 그렇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오빠. 우리 아빠도 오빠 이야기에 정말 놀랐대. 과외 한번 안 받고, 재수 삼수도 안 하고 단번에 세중대학교 한의대에서 수석만 한다니. 우리 오빠는 삼수 사수를 해도 지방 한의대 근처도 못 갔는데……. 우리 큰 아빠 병원으로 들어가고, 결혼 준비 바로 시작하자.

그의 어려운 환경과 비교되는 집안이었지만, 누구보다도 그의 노력을 인정해 줬던 연아였다.

사랑으로 만났고, 사랑으로 결혼까지 하자고 했는데…….

띠링.

연아가 혼자 퍼스트라운지로 들어가고 5분도 되지 않아 재마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들어왔다.

[우리 관계 다시 생각해 보자.]

재마는 눈에 보이는 메시지가 믿기지 않았다.

* * *

“아이고. 원장님.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래유. 이 동네를 싹 밀어버린다는 소리도 심란헌디…….”

“갑자기는 무슨. 내 나이를 생각하면 진작 이런 결정을 내렸어야 해요.”

“원장님 나이가 어때서요. 내 나이보다 한참 아래로 보이는구만.”

“아닙니다. 한참 아래는 무슨, 진복순 환자랑 같은 연배에요.”

“정말요? 좋은 것을 많이 드셔서 그런가. 안 그래 뵈는데.”

명의 한의원 처치실.

45년간 한 자리에서 쭉 진료를 맡아왔던 구 원장이 이번 주까지만 진료를 보고 은퇴를 한다는 소리에 25년 단골인 진복순 할머니가 볼멘소리를 내었다.

요즘 동네가 개발된다는 소식에 시끄러운 것도 모자라 매일 참새 방앗간처럼 들리던 명의 한의원의 원장이 바뀐다는 소리에 더욱 심란한 복순이었다.

“아이고. 시원타. 앞으로 원장님 안 계시믄 제 허리, 무릎, 팔목은 어쩐대유.”

“앞으로 젊지만 능력 있는 새로운 한의사가 올 거니까. 걱정 마세요.”

“에이. 원장님도. 젊은데 능력이 있겠어요? 원장님이랑 비교도 되지 않을 텐디.”

25년간 구 원장의 침만 믿고 있었던 진복순에게 구 원장의 은퇴 소식은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젊은 원장이 능력이 되겠냐는 복순의 말에 구 원장은 그저 희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50년 가까이 침통을 옆에 끼고 있는 구 원장에게도 첫 시작이 있었다는 걸 환자들은 생각하지 못한다.

누군가에게 모두 처음이 있고, 실수도 하기도 하지만 특히나 한의사에게는 경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항상 환자들에게 단점으로 받아들여졌다.

구 원장이 그런 시간을 버텨냈듯, 앞으로 이 병원을 맡게 될 재마도 견뎌내야 할 시간이었다.

“조심히 들어가시고, 내일모레 한 번 더 오세요.”

“몰라유. 이제 다른 한의원 알아봐야 하나. 한숨이 절로 나와요.”

아쉬운 마음을 모조리 쏟아 놓고 가는 진복순 할머니의 뒷모습을 한참을 지켜본 구 원장은 원장실로 들어갔다.

“1,500원입니다.”

진복순할머니가 나오기를 기다렸던 데스크에 앉아 있는 정 실장이 오늘 그녀의 진료비를 안내했다.

복순은 익숙하듯 주머니에서 동전 주머니를 꺼내 곱게 접어져 있는 천 원짜리와 오백 원짜리 동전 하나를 꺼냈다.

그녀의 동전 지갑은 항상 넉넉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주일에 두세 번, 많게는 다섯 번까지 한의원을 오는 순간은 1,500원의 행복이었다.

그런 행복에는 그에게 꼭 맞는 한의사였던 구 원장이 있었다.

“에이…….”

천오백 원을 건네며 아쉬운 마음에 할머니는 입소리를 내었다.

“많이 아쉬우시죠?”

“아쉽지. 그럼 안 아쉽나. 구 원장님 알고 지낸 게 몇 년인디.”

“진복순 할머니처럼 아쉬워하는 환자분들 많으세요. 다들 적게는 10년 이상씩 저희 원장님한테만 진료 보시던 분들이라.”

“그러니까 말이여. 정 실장이 원장님 설득 좀 해봤어? 아니, 아직 창창한디. 벌써 한의원을 접으신대.”

“워낙 오랫동안 환자분들 만나셔서 이제는 바깥 구경도 하고 싶으신가 봐요.”

“쉬는 날 바깥 구경하면 되지 뭐.”

진복순 할머니 말처럼 평일에 진료를 보고 주말에는 평일에 못 갔던 가고 싶었던 곳을 가고 했으면 좋으련만 반백 년을 환자만 생각했던 구 원장에게는 평일과 주말의 구분이 없었다.

주말에 진료가 끝나도 급한 환자가 있다면 직접 방문을 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진복순 할머니의 마음에 쏙 드는 대답을 해줄 수 없는 정 실장이 그저 미소를 짓자, 진복순 할머니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다음번에 한의원 받아서 하는 한의사는 어뗘? 원장님 말로는 젊다는 디.”

정 실장은 진복순 할머니의 말에 무어라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망설였다.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그가 50년 경력의 한의사가 하는 한의원을 이어받는다는 것을 솔직하게 환자에게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젊으셔도. 실력 있으신 분이에요. 원장님 인연으로 오시는 분인데…….”

“인연이랑 실력이랑 뭔 상관이여. 요즘도 학연 지연 따지나.”

진복순 할머니는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그러냐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손사래를 쳤다.

더 이상 들어봐야 소용없다는 행동이었다.

“난 몰러. 이제 다음 주부터 안 보이면, 저짝 사거리에 김한의원으로 가는 줄 알어.”

“진복순 니임.”

정 실장은 진복순 할머니에게 살가운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직원들끼리는 진복순 할머니라 부를지라도, 환자에게는 꼭 ‘님’자를 붙여 함자를 불러드렸다.

그것이 환자들에게 하는 최선의 대우였다.

정 실장과도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진복순 할머니였기에 살가움이 동한 건지, 한의원을 나서는 진복순 할머니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나도 모르겄다. 다음번 한의사가 나랑 잘 맞을는지.”

할머니는 습관적으로 무릎을 집고, 문턱을 넘어섰다.

* * *

2주 전.

“이재마 군 한의사의 역할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정한 한방병원 마지막 임원면접

정한 한방병원을 이끌어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임원 세 명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들은 맞은 편에서 면접을 보고 있는 재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의사는 환자에게 침을 놓는다거나 약을 조제하는 것뿐 아니라 그 들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침을 놓기 전, 약 처방을 내리기 전, 그들의 체질뿐 아니라 요즘 환자가 겪고 있는 기분, 식습관, 운동 여부까지 충분한 대화를 통해 처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의사와 환자 관계가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써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면접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에 재마의 평가를 써내려 갔다.

“요즘 한방병원도 프랜차이즈라고 해야 할까요. 지역별 지점이 많은 한방병원들이 많은데, 그중에서 정한 한방병원을 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TV 아침방송에 자주 출연하는 정한 한방병원의 장영원 원장이 마지막 질문을 건넸다.

“이유가 뭐겠습니까. ‘정한 한방병원’ 하면 대한민국 최고의 한방병원입니다. 전문직도 전문직 나름, 시장 골목 코딱지만 한 한의원보다는 젊을 때 기업 사이즈가 큰 곳에서 경험치를 쌓아야지”

장원영 원장에 물어볼 걸 물어보라는 듯, 강순겸 원장이 피식 웃었다.

재마는 현실적인 속마음은 마음속에 꾹 담아 두고 준비해 온 답변을 시작했다.

연아가 몇 번이고 연습을 시켰던 문제였다.

“정한 한방병원의 창립이념인 긍휼지심(矜恤之心)은 제가 한의사가 되겠다고 다짐한 이유와 일맥상통합니다. 약자에 대한 연민과 의술(醫術)보다는 인술(仁術)을 펼쳐야 한다는 마음은 제가 마음에 품은 한의사의 역할과도 같습니다. 다른 병원을 고민할 이유도 없이 정한 한방병원을 선택한 이유입니다.”

정한 한방병원의 설립한 박준식 선생의 선친인 박현표 선생의 이념을 그대로 인용한 답변이었다.

설립자의 아들이자 정한 한방병원대표 원장을 맡고 있는 박상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 모든 것은 박상도의 조카이자, 재마의 여자친구인 박연아에게 얻은 정보였다.

‘오빠, 내가 큰 아빠한테 다 말해놨으니까 면접은 걱정하지마. 큰 아빠도 오빠 성적 보고 미소 지으신 것 보면 맘에 드셨을 거야.’

연아의 말대로 가장 중요한 면접관인 박상도의 눈에는 확실히 든 것 같았다.

재마 또한 박상도를 따라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무리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정한 한방병원이라지만 세중대학교 한의학과에서 장학금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는 나를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세중대학교 한의학과에 당당하게 입학해, 졸업까지 단 한 번도 장학금을 놓친 적이 없었던 그였다.

한의학과에 입학한 것도 어머니의 자랑이었지만, 학비 걱정 한번 시키지 않고 한의학과를 졸업한다는 것은 어머니에게 더 큰 자랑이자 재마에게는 자부심이었다.

“좋았어요. 좋은 기회가 있길 바랍니다.”

박상도 대표원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면접을 끝낸 재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재마는 긴장한 탓에 손에 땀이 흥건했다.

재빠르게 정장 바지에 손을 닦고 박상도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중장년인 원장들에게는 귀여워 보였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면접관들에게 사회초년생의 긴장감과 어설픈 모습을 보였다면 재마는 성공적이었다 생각했다.

성공적으로 면접을 봤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운 재마는 평소에 타지 않는 택시도 잡아탔다.

“정한 한방병원 들어가게 될 텐데 택시쯤은 타도 되지.”

부득이한 상황으로 택시를 타야 할 때도 항상 주머니 사정에 불편한 마음이었던 재마였지만 오늘은 기분이 좋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