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검은 절망이 내려앉음 (4)
“……!”
붉은 가면을 쓴 낯선 이가 도시 아래로 내려앉으며 동두천시 전체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착 ―
부드럽게 도로 위에 내려앉은 낯선 이.
슬픔을 삼킨 채 전장을 정리하던 모든 헌터들의 놀란 시선이, 그 낯선 한 사람에게로 집중되었다.
스윽 ―
가만히 전장을 둘러보는 낯선 존재.
새카맣게 타버린 단탈리안의 시체에서 시선을 멈추더니,
“쯧. 혼자서도 가능하다고 군단도 안 데려가더니…….”
대뜸 혀를 찼다.
“역시 하위 대악마 정도로 세계급 둘까지 감당하기에는 힘들었던 건가……?”
“……!”
낯선 존재에게서 흘러나오는 남성의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들은 헌터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구사하는 언어가 외국어였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모두 헌터뿐이었기에 외국어라고 해도 알아듣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다만 헌터들이 놀란 것은 그가 여러 언어를 잡다하게 섞어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음… 아니지. 그래도 한국의 세계급 헌터들은 동급의 헌터들보다 강한 이들이었으니까. 게다가 단탈리안은 양학용 대악마란 말이지? 쯧… 상성이 별로였군.”
남자의 입에서 아랍어, 영어, 한국어, 독일어, 프랑스어, 그리스어, 러시아어 등 갖가지 언어가 뒤섞여 흘러나왔다.
단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그나마 아랍어의 사용 비율이 제일 크다는 것뿐.
실로 기괴한 그의 화법이 듣는 이로 하여금 절로 소름이 돋게 만들고 있었다.
비공식이지만 이 전장의 지휘관 역할을 맡고 있는 동석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그를 마주 보았다.
“…노아즈 아크의 잔당인가.”
“오?”
붉은 악귀 탈을 쓴 남자가 자신을 마주한 동석을 바라보며 반갑다는 듯 입술을 모았다.
“이게 누구신가! 한국 헌터 협회의 협회장님 아니신가?”
“…….”
“이거 반갑군. 참으로 반가워. 그동안 정말 많이 만나고 싶었단 말이지.”
남자의 말에 동석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남자에게서는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그리고 육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이 남자는 그동안 그들이 상대했던 그 누구보다도 강하다는 것을.
주륵 ―
남자와 대치한 동석의 등줄기로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판단이 서질 않았다.
‘싸워야 하나? 아니면 도주?’
일대일은 필패일지 몰라도 다 같이 싸우면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금 이 자리에는 강천과 김천용도 있지 않은가?
조금 지쳐 보이지만 태성, 호성을 비롯한 정호백, 구정태, 박대상도 있다.
사실상 태운을 제외한 모든 최상위 헌터들이 한데 모인 상황.
상대가 태운만 아니라면 그 누구라도 이길 수 있을 전력이었다.
속전속결로 끝낸다면 아무리 지친 상태라도 눈앞의 사내 하나쯤은 감당할 수 있을…….
“흐음~”
동석과 눈을 마주친 사내가 기묘한 콧소리를 흘렸다.
그리고는,
씨익 ―
가소롭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랑 해보려고?”
“……!”
생각을 읽힌 동석이 당황하여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순간,
콰득!
동석의 신형이 사라졌다.
* * *
“어……?”
갑자기 나타난 낯선 사내의 등장에 언제든 바로 전투에 돌입할 수 있도록 본능적으로 온몸에 긴장을 불어넣고 있던 태성.
그는 두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콰득! 으직……!
대체 저건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것이란 말인가.
2m에 달하는 거구인 동석을 통째로 씹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뱀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스스스슷 ―
동석을 통째로 물고는 하늘로 다시 올라가는 뱀.
길게 늘였던 채찍이 손잡이 부분으로 돌아가듯 어느 건물 위로 올라간 뱀은 어느 한 사내의 몸통에 꼬리를 휘감고 있었다.
흔들 ―
마치 반가운 지인이라도 만난 것처럼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는 사내.
모두의 사고가 지금의 이 상황을 따라잡지 못해 멍하니 있는 그때,
“에휴…….”
붉은 악귀 탈의 남자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안드로말리우스, 내가 겁만 주라고 했잖아.”
“응? 다들 충분히 겁먹은 것 같은데?”
건물 위 커다란 뱀을 몸에 두른 사내가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저 무식한… 내 말은, 방금 네가 삼킨 남자를 겁주란 말…….”
붉은 악귀 탈의 사내가 미간을 찡그리며 대꾸하려 하자,
“소용없다고, 주인. 저 무식한 녀석이 괜히 최하위겠어?”
한 여성이 사내의 뒤에서 귀신처럼 나타났다.
스륵 ―
뜬금없이 나타난, 척 보기에도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
여인은 가만히 악귀 탈 사내의 턱 끝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흘려 보였다.
“주인, 그냥 나한테 맡겨줘. 여긴 내가 혼자 정리할 테니까 바알한테 말 좀 잘해주라. 응?”
“개수작 부리지 마라. 그레모리. 겨우 이것들 정리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칫! 너무 야박한 거 아니야?”
악귀 탈 사내의 단호한 대답에 삐진 듯한 표정을 짓는 여인.
그런 여인에게 갑자기 또 어디선가 나타난 말 한 마리가 머리를 비볐다.
“그레모리. 아무리 주인이라지만 다른 남자한테 그러는 건 좀 질투 나는데.”
“어머, 오로바스! 왜 그래? 아마추어처럼.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내 남친은 너뿐인걸?”
“크, 크히힝!”
여인이 말의 목을 쓰다듬어주자, 말은 기분이 좋은지 콧김을 쉭쉭 뿜어댔다.
한편, 그런 기괴한 모습들을 바라보는 태성을 비롯한 헌터들의 두 눈동자는 사시나무처럼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태성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건물 위의 사내 그리고 악귀 탈 남자의 곁에 나타난 여인과 말을 번갈아보았다.
존재하지 않던 자들이었다.
나타날 것이라면 어디선가 오고 있던 전조 동작이라도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 세 존재는 그야말로 마치 허공에 점을 찍듯이 갑자기 나타났다.
‘게다가 뭐…? 안드로말리우스? 그레모리? 오로바스?’
태성은 눈동자를 넘어 전신을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했다.
제72위계, 안드로말리우스.
제56위계, 그레모리.
제55위계, 오로바스.
그들은 모두 72 대악마에 속하는 존재들이었으니까.
강천과 천용이 기습으로 겨우겨우 잡은 단탈리안은 72 대악마 중 71위계.
지금 이 자리의 모든 헌터를 전멸의 위기로 몰아넣을 정도로 강력했던 그 단탈리안과 비슷하거나 강한 존재가 셋이나 나타난 것이었다.
태성은 자신도 모르게 강천을 돌아보았다.
강천이라면 무언가 방도가 있지 않을까 하는 본능적이고도 나약한 생각이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미 마음이 꺾여버린 지금, 그는 본능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강자를 향해 본인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 것이다.
하지만,
부르르 ―
그가 의지할 곳은 없었다.
강천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에 담긴 감정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동석의 죽음에 대한 분노와 슬픔인지, 아니면 적에 대한 두려움인지.
하지만 일단 확실한 것은,
꽈악 ―
그 강한 강천에게도 그들을 이길 방도 따위는 없다는 것이었다.
의지할 곳을 잃은 태성은 눈을 돌려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저 어둠을 가르며 금빛 번개가 나타날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씨X, 남자가 보고 싶을 줄은 몰랐는데.’
태성은 짧게 기도를 올렸다.
‘코드 제로 대장님아, 빨리 좀 와요.’
그렇게 헌터들의 사고가 마침내 뒤늦게나마 상황을 따라잡고 인지한 그 순간,
“흐아아아아아아아악!”
동석의 죽음을 깨닫고 만 유린의 울분 가득한 비명이 시내 가득히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 *
파지짓!
아시아의 성층권에 한 줄기 황금빛 선이 그어졌다.
[뇌신화(雷神化) ― 금뢰 ver]
전세기가 중국 상공을 지날 때쯤 겨우 마력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었던 태운.
마력을 모두 채우자마자 비행기를 강제로 지면에 안착시킨 태운은 곧바로 뇌신화를 전개하여 한국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제발… 제발……!’
벌써 한국 시간으로는 저녁이 다 된 시간이었다.
연락이 두절된 지도 벌써 거의 하루가 다 되어가고 있었던 것.
그동안 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지, 태운은 자꾸만 안 좋은 쪽으로 향하는 생각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우며 속도를 높였다.
번쩍!
불과 몇 초 만에 그의 신형이 한반도에 도달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잔뜩 긴장한 태운의 심장이 그의 귓가를 박동 소리로 가득히 메울 정도로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키잉 ―
[자기중력장(磁氣重力場)]
남한 전체가 태운의 권역하에 들어왔다.
무고한 시민들이 마력 감염증에 걸릴 수도 있었지만, 한국인들은 리바이브를 예방 접종처럼 정기적으로 맞고 있었기에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지지징 ―
수많은 기척과 움직임이 태운의 감각도에 잡히기 시작했다.
“……!”
중부와 남부는 걱정이 없었다.
문제는 북부, 즉 수도권이었다.
말이 안 될 정도로 기척이 텅 비어 있는 수도권과 강원도 북부.
그리고 그런 와중에 묘하게 강한 기척들이 상당수 모여 있는 장소가 그의 감각도에 느껴졌다.
‘여기면… 동두천시인가?’
자기중력장을 이용한 감각도만으로 어떤 존재들이 어느 곳에 있는지 파악해내는 태운.
세세한 쪽이라면 몰라도 감지 자체는 장지희의 천리안 이상의 능력을 보여주는 태운이었다.
파지지직!
태운의 신형이 밤하늘에 금빛 실금을 그리며 동두천시로 날아갔다.
번쩍!
순식간에 동두천시에 도달한 태운.
마침내 한국 최후의 전장에 도달한 태운의 두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화르르륵 ― !
시뻘겋게 불타고 있는 도시와,
“캬아아아아악!”
기괴하게 생긴 검은 악마들이었다.
“이, 이게 무슨……?”
태운의 두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 다른 헌터들은?’
도시가 이런 상태라면 이 사태를 막기 위해 헌터 협회와 길드 헌터들이 출동했을 터였다.
태운의 시선이 재빨리 도시 전체를 훑으며 도시 어딘가에 있을 한국 헌터들을 찾았다.
다행히 한국 헌터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
태운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동두천 시내 한복판.
검은 철로 만들어진 키가 큰 십자가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 두 십자가에 고개를 축 늘어뜨린 채 매달려 있는 두 남녀.
그리고 그 두 남녀의 팔과 다리에는 커다란 대못이 박혀 있었다.
“으으으으…….”
은빛 머리칼의 남자가 전신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신음을 함께 흘렸다.
끔뻑… 끔뻑…….
겨우 조금 정신이 들었는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리는 남자.
고개를 들어 올린 남자와 태운의 시선이 허공에서 자연스레 맞부딪쳤다.
끔뻑…….
남자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인지 헷갈린다는 듯 두 눈을 계속해서 천천히 끔뻑였다.
그리고는,
“와… 갑자기 형이 다 보이네에…….”
피 묻은 이를 드러내며 힘없이 웃었다.
“강천……!”
태운의 턱이 덜덜 떨렸다.
“그럼 옆에는……!”
검은 융단 같은 고운 머릿결을 바닥에 늘어뜨리고 있는 여인.
그런 그녀의 머리칼이 목 아래로 늘어지며,
스륵 ―
그녀의 수수하고 심플한 디자인의 얇은 목걸이가 드러났다.
그리고 태운은,
“아… 아아아……!”
그 목걸이를 단번에 알아보고야 말았다.
그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유린아아아아아!”
협회 직원이 너무 강함
— 글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