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방주의 방주가 바뀜 (2)
크그그그긍 ― !
화면 속 토끼 탈을 쓴 남자의 몸에서 가공할 정도의 기운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진정해라.}
꾸웅 ― !
악귀탈은 가만히 남자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슈우우우 ―
악귀탈의 손이 남자의 머리에 닿자, 남자의 몸에서 들끓던 기파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후우… 후우……!”
거칠게 숨을 내쉬는 남자, 푸르바.
새로 얻게 된 힘에 의해 크게 흥분한 듯했다.
{후우……! 외람되지만 노아신이시여!}
{말하라.}
{지금 당장… 특임반장을 죽이고 싶습니다……!}
토끼탈 너머 푸르바의 두 눈에는 어느새 토끼눈처럼 새빨갛게 핏줄이 올라와 있었다.
{후우… 후우……!}
커다란 힘을 가지게 된 고양감과 흥분감, 그리고 특임반장에 대한 살의가 뒤엉켜 호흡이 거칠어진 푸르바는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 온몸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허한다.}
악귀탈은 그런 푸르바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울컥 ― !
심히 감정적으로 변한 푸르바는 단번에 무언가 말을 쏟아내려다 간신히 참아냈다.
상대가 그 노아신이었으니까.
십이방주가 모두 달려들어도 당해낼 수 없는 절대강자이자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직접 이 땅에 강림한 선지자.
그런 그를 향해 무례를 범할 수는 없었다.
{…토끼의 방주여. 너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새 화면 속으로 돌아간 악귀탈이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권능은 쉽게 다룰 수 없는 힘이다. 힘이 익숙해질 때까지는 자중할 필요가 있어. 어설픈 권능의 사용은 오히려 너를 약하게 만들 테니. 그런 상태로는 어차피 특임반장에게 가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그래, 우선은 권능에 적응해라. 어차피… 특임반장이라는 놈을 처리하는 데에는 시간이 꽤나 걸릴 듯하니.}
스윽 ―
푸르바를 향해 말을 하던 악귀탈은 시선을 돌려 다시 소 탈을 쓰고 있는 도명조를 바라보았다.
{소의 방주.}
{…예.}
{가진 권한을 이용하여 전 토끼의 방주를 이용한 것에 대해서는 뭐라 하지 않겠다. 나 또한 묵인했던 일이니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녀가 죽었지. 이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있는가?}
{…예, 그렇습니다. 저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좋아.}
악귀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늘부로 소의 방주에게 내려진 아시아 대륙의 씨앗 배분권을 회수하겠다. 이의 있는가?}
{…없습니다.}
{음.}
도명조에게서 씨앗 배분권을 회수한 악귀탈은 잠시 피곤한 듯 가면 뒤로 눈을 문질렀다.
{…모든 방주들은 들어라.}
{신의 말씀을 듣습니다!}
악귀탈의 한마디에 고개를 조아리는 십이지탈을 쓴 방주들.
노아즈 아크라는 단체에서 악귀탈의 권위가 얼마나 강력한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 * *
{…다들 알고 있겠지만, 나는 쉽게 움직일 수 없는 상태다. 게다가 죽은 전 토끼의 방주에게 힘을 빌려주었던 달의 여신이 상처를 입고 명계에서 미쳐 날뛰고 있어. 한동안은 그녀를 달래기 위해 명계에 다녀와야 할 것 같다.}
{……!}
{그, 그러면 정보의 통제는……!}
{그 점은 걱정 마라. 권능체를 남겨두고 갈 것이니.}
권능체.
악귀탈의 기술 중 하나로, 특정 권능만을 부여해 그 기능만을 수행하는 일종의 더미였다.
{…얼마나 걸리실 것 같습니까?}
{그건 모르겠군. 명계와 현세는 시간 배율이 다르니… 아마 최소 반년은 잡아야겠지.}
{…….}
방주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최소 반년.
그 시간 동안 방주들은 그들의 신 없이 노아즈 아크의 대계를 이어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방주들은 복합적인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신의 부재는 노아신을 믿는 그들에게 있어 굉장히 슬픈 일이기도 했지만,
두근 ― 두근 ―
한편으로는 또 설레는 일이기도 했으니까.
방주들을 통제하던 악귀탈이 자리를 비운다는 의미는 최소 반년간 방주들이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악귀탈이 그런 그들을 순순히 자유롭게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너희들은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특임반장을 처리해놔라. 그렇다고 절대 서두르진 말고. 내가 없는 동안 절대 힘의 공백이 생겨서는 안 될 것이야. 최대한 모두가 힘을 합쳐. 나를 상대한다고 생각해라.}
{……!}
{한동안 너희들과 갖는 회의 자리는 이번이 마지막이 되겠군. 그럼… 무운을 빌지.}
치직!
13개로 분할되었던 화면 중 하나가 사라지며 남은 12개의 화면이 조금 커졌다.
특별한 인사 한마디 없이 퇴장한 악귀탈이었지만, 아무도 그의 행동에 불만을 갖는 이는 없었다.
신의 행동은 언제나 옳았으니까.
* * *
{…신께서 임무를 남겨주셨다. 이제 그 임무에 대해 이야기해 보지.}
악귀탈이 퇴장하고도 아무도 말을 하지 않자, 도명조가 먼저 나서서 이야기를 꺼냈다.
{…닥쳐라, 소. 네가 지금 이야기를 꺼낼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나?}
도명조가 회의를 주도하려 하자 범 탈을 쓴 범의 방주가 으르렁거렸다.
{…이미 신께서 마무리하신 일이다. 노아신님의 결정에 따르지 않겠다는 거냐?}
그러나 도명조도 지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 죽이지도 못하는 놈이.’
노아신께서 자신이 없는 동안 힘의 공백이 있어선 안 된다고 미리 못 박아둔 상황.
아무리 방주들 중 그보다 강한 방주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젠 어떤 갈등이 빚어진다고 생겨도 한 방주가 다른 방주를 죽일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에 갇힌 호랑이 따윈 무섭지 않지.’
도명조가 범의 방주를 바라보며 눈을 흘겼다.
그리고 소 탈 너머 도명조의 눈빛을 확인한 범의 방주는,
{…너 지금 그 눈깔 뭐야?}
이성의 끈을 놓기 직전의 상태였다.
그리고 이 둘의 신경전을 중재한 것이 바로,
{그만해. 신께서 물러나시자마자 이게 무슨 추태냐.}
실질적 십이방주 중 최강자, 용의 방주였다.
범의 방주 또한 용의 방주와 양대 산맥으로 여겨지고는 있었지만, 사실 모든 방주들은 용의 방주가 반수 정도 앞선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사실상 그를 방주들의 리더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범의 방주도 인지하고 있었기에,
{소…! 너 조심해라……!}
못 이기는 척 자존심을 세우며 슬쩍 물러났다.
싸아아아 ―
신경전은 끝났지만, 순식간에 험악해진 분위기.
스윽 ―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던 양의 방주가 손을 들며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특임반장은 누가 처리하나요?}
{신께서 힘을 합치라고 말씀하셨다. 단독 행동은 하지 않아.}
용의 방주의 말에,
{그렇다고 방주가 둘이나 움직이는 것도 자존심 상하지. 이쪽은 권능까지 있는데.}
범의 방주가 삐딱한 자세로 답했다.
꿈틀.
삐딱한 범의 방주의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용의 방주의 목소리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신의 말씀이다. 이견은 받지 않아.}
{콰아아아앙!}
범의 방주가 있던 화면이 크게 흔들렸다.
그가 컴퓨터가 놓여있는 책상을 거세게 친 것이다.
{어이, 용…! 네놈이 대장인 것처럼 굴지 말라고.}
용의 방주에게 이빨을 드러내는 범의 방주.
하지만 용의 방주는 흥분한 범의 방주에게 휘둘리지 않고 여전히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신의 말씀을 따르자고 했을…….}
{신께선 최.대.한 합치라고 하셨지, 반드시 합치라고 하시진 않았다.}
범의 방주가 두 눈을 번뜩였다.
{여기 있는 녀석들은 아무리 못나도 결국 나와 같은 방주다. 나와 동격인 녀석들이 한 놈 잡겠다고 둘씩이나 몰려가는 건 내가 용납 못 해!}
그 누구보다도 자존심이 강한 범의 방주였다.
그런 그의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특임반장은 강하다.}
용의 방주는 그런 범의 방주의 투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암흑룡의 던전까지 삼킨 토끼의 방주가 당했어. 특히 암흑룡이라면 전설형 몬스터 중에서도 최상위의 존재. 그런 녀석까지 흡수한 토끼의 힘은 너와 나에게 필적한다. 그건 너도 알고 있지 않나?}
{그건 우리가 권능만 사용했을 때의 이야기지!}
범의 방주의 두 눈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물론 권능이 본래 능력보다 강한 건 맞지만, 고유능력을 사용하지 않은 내 전력은 실제 전력의 7할에 불과해! 그러니까 특임반장도 결국 기껏해야 내 7~8할 정도의 힘이라는 소리지!}
{그럼 네가 가겠다는 거냐?}
용의 방주는 눈을 가늘게 뜨며 범의 방주를 노려보았다.
{아니! 싫다! 머저리 같은 소 새끼 뒤치다꺼리를 내가 왜 해야 하는데?!}
범의 방주의 어린아이 같은 막무가내 투정에 용의 방주도 더 이상 침착함을 유지하기가 힘든 듯 머리를 감싸쥐었다.
{이… 그럼 대체 어쩌라는……!}
그때,
{제가 갈게요!}
가만히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여인이 손을 들었다.
{…뱀의 방주?}
싱긋 ―
뱀 탈을 쓴 여인, 뱀의 방주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올리고 있었다.
{혼자 가겠다는 건가?}
{네!}
용의 미심쩍은 물음에도 해맑은 미소를 짓고만 있는 뱀의 방주.
{이야기는 듣고 있었던 거겠지? 놈은 전력의 토끼를 이긴…….}
{그러면 힘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뱀의 방주가 두 눈을 반짝였다.
{결국 특임반장도 남자잖아요? 그럼 제 능력으로 싸우지 않고도 처리할 수 있을지 몰라요!}
{……!}
뱀의 방주의 말에 모든 방주들이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확실히…….}
{뱀의 방주의 능력이라면 정말 가능할 수도……?}
용의 방주마저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뱀의 방주를 바라보았다.
{뱀, 정말 괜찮겠나? 자칫하면 토끼처럼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야.}
용의 방주의 우려에도 뱀의 방주는 오히려 더욱더 눈빛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곧바로 해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사전조사로 놈의 취향을 미리 잘 파악하고 시간만 충분히 두고 천천히 접근한다면 가능성은 9할이 넘는다고 생각해요!}
뱀의 방주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범의 방주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도 당할 뻔했으니까.}
{어머? 범의 방주님, 혹시 그때가 그리우신가요?}
뱀의 방주가 교태가 잔뜩 섞인 목소리로 범의 방주를 부르자,
{크, 크흠! 뭐 어쨌든 결정은 난 것 같으니 난 이만 가보겠어.}
뱀의 방주의 시선에 뭔가 당황한 듯한 범의 방주가 서둘러 회의를 나가버렸다.
{…어머?}
뱀의 방주의 요사스런 눈빛이 다른 이들을 향하자,
{크흠… 저도 나가보겠습니다.}
{저, 저도 이만…….}
{수, 수고해요, 뱀의 방주!}
다른 방주들도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얼른 회의를 나갔다.
순식간에 사라진 화면들.
결국 화면 속엔 단 4개의 화면만이 남아있었다.
{…처리하시는 데에 얼마나 걸리실 것 같습니까.}
쿠마리의 자리를 이어받은 푸르바가 토끼 탈을 쓴 채 뱀의 방주에게 물었다.
{글쎄요… 최대한 가능성을 높이려면 시간을 오래 가질수록 좋겠죠. 그의 신뢰를 얻어야 하니까요. 사전조사도 필요하니 신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적어도 반년은 걸리지 않을까요?}
{그 전에 제가 힘에 적응한다면 일을 감행하실 때 저를 불러주실 수 있겠습니까? 놈은… 꼭 제가 직접 처단하고 싶습니다.}
{어머, 도와주신다고요? 그럼 저야 감사하죠. 부디 반년 안에 권능에 적응하시길 바랄게요. 근데 범의 방주가 가만히 있으려나……?}
{…제가 막무가내로 끼어든 걸로 하겠습니다.}
싱긋 ―
푸르바의 말에 뱀의 방주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범의 방주가 달려들어도 뭐, 토끼의 방주님이라면 도망치실 수 있으실 테니까.}
{…감사합니다. 그럼 저도 이만.}
뚝 ―
마지막까지 남은 3개의 화면.
뱀을 제외하고 남은 유일한 방주인 도명조를 용의 방주가 노려보았다.
{소. 너는 최대한 뱀에게 정보를 넘겨줘라. 협회에 관한 정보도 전부.}
{…알았다. 그런데… 정말 너나 범이 나설 수는 없는 건가?}
뱀의 방주만으로는 아무래도 불안했던 도명조가 은근슬쩍 용을 떠보았다.
방주 중 최강자인 그가 직접 나서 준다면 아무리 특임반장이라도 당해낼 수 없을 것이 확실했으니까.
그러나,
{내가 떠먹여 준 권한도 멍청하게 도로 잃은 주제에 감히 누굴 떠보는 거냐?}
용의 방주는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미안하다.}
{당장 꺼져. 네놈은 꼴도 보기 싫으니까.}
으득 ―
도명조는 탈 뒤에서 이를 갈았다.
평소라면 용이라 해도 어떻게든 들이받았겠지만,
{…곧 연락하지. 수고를 끼쳐서 미안하다, 뱀.}
용의 방주 덕분에 얻은 씨앗 배분권마저 잃은 도명조는 할 말이 없었다.
{네, 연락주세요.}
뱀의 방주가 싱긋 웃으며 도명조를 배웅했다.
뚝 ―
이윽고 둘만 남게 된 화면.
“하아… 하아…….”
화면 속의 용 탈을 쓴 남자를 바라보는 뱀의 방주의 호흡이 희미하게 거칠어졌다.
그러나 화면 너머까지 소리가 들리지는 않은 듯 용의 방주는 평범하게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럼 뱀의 방주, 고생해라. 먼저 나서줘서 고맙군.}
“…용의 방주님께 힘이 될 수 있어서 오히려 제가 기쁜걸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럼 다음에 보지.}
“네! 안녕히 가세요!”
툭 ―
그렇게 모든 방주가 화상 회의방에서 나갔다.
그리고,
“하아……! 용의 방주님… 너무 멋있어……!”
뱀 탈을 벗어 던진 여인, 올리비아가 책상에 엎드린 채 거친 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협회 직원이 너무 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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