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늙은 구렁이가 꿈틀거림 (4)
“…그런 일이 있었다고요.”
이한천의 이야기를 듣는 도명조의 눈빛이 이채를 띄었다.
{내가 이런 꼴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분노에 찬 이한천 의원의 목소리.
그런 그의 반응에 도명조는 삐져나오려는 비웃음을 간신히 참아냈다.
“그럴 리가요. 감히 국회의원에게… 협회가 완전히 겁을 상실했군요.”
그러나 이한천은 오히려 협회를 두둔했다.
{아니야. 협회는 똑같다네. 조금 커다란 미꾸라지 하나가 물을 흐리고 있을 뿐이야. 하지만 협회가 그 미꾸라지를 감당하기엔 힘이 벅차 보이더군.}
이한천은 협회장과 부협회장의 태도를 보고 확신하고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망나니가 협회 안으로 비집고 들어와 물을 흐리고 있을 뿐이라고.
포커스가 완전히 특임반장에게로만 맞춰진 것이 완전히 태운의 계획대로 행동하고 있는 이한천이었다.
“흐음…….”
그러나 도명조는 의심을 쉽게 지울 수 없었다.
‘특임반장의 독단적인 행동이라고? 그 모든 것이?’
물론 최근 협회가 지금까지 취하고 있던 노선과는 다른 방향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은 맞았다.
갑자기 민간인들 사이의 범죄에 개입하질 않나, 최근엔 암암리에 묵인해주던 헌터 범죄를 기어코 수면 위까지 끌어내어 감옥에 처박아버렸으니까.
윗선에서 빠르게 움직여 검열과 단속에 들어갔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국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파장이 일어날 뻔했다.
아무리 퇴출된 헌터들이더라도 헌터는 헌터였으니까.
당시 피해자들에게도 입막음용으로 어마어마한 금액을 쥐어주었다.
그리고 피해자들은 커다란 보상에 대한 놀라움과 함께 무언의 압박감을 느꼈기에 지금까지도 별 소문 없이 잘 지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어쨌든 이러한 행동들이 헌터 사회에서 협회를 고립시키는 일이 될 수 있음을 협회장과 부협회장이 모르지는 않을 터.
곰곰이 생각하던 도명조는 조금이지만 의심의 기색을 지워냈다.
‘하긴 녀석은 S급 헌터급의 실력을 지녔다고 알려진 실력자… 그런 녀석이 작정하고 협박한다면 협회장으로서도 당해낼 수가 없을 수도 있겠지.’
아직 특임반장과 이매탈이 동일 인물임을 모르는 그였지만, 이매탈 건을 제외하더라도 최근 두 번이나 특임반장에 의해 곤욕을 치른 도명조는 이를 으득 갈았다.
“좋습니다. 저희가 맡지요.”
{좋아 좋아. 내 값은 섭섭지 않게 챙겨주겠네. 그럼 얼마나 걸리겠나?}
이한천의 목소리가 만족스럽다는 듯 부드럽게 풀어졌다.
“음…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한동안은 특임반장에게 집중할 수가 없는 상황이거든요.”
{뭐? 왜?}
이한천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바로 일을 시작하지 않는다는 게 불만인 듯했다.
스륵 ―
도명조가 가만히 책상 위에 있던 달력을 넘겼다.
이틀 뒤, 9월 1일이라는 날짜에 빨간색으로 진하게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길드 단체로 어디 좀 다녀와야 해서요.”
씨익 ―
도명조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그려지고 있었다.
* * *
피윳 ― !
촤아아아악 ― !
한반도와 제주도 사이의 남해가 옅게 갈라졌다.
총알보다 빠른 속도로 바다 위를 달리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으니,
쐐애애애애액 ― !
바로 하얀 가면을 쓴 태운이었다.
역중력으로 몸을 가볍게 띄운 태운의 발이 수면을 박차고 쑥쑥 앞으로 나아갔다.
태운은 지금 던전의 마력 측정을 맡은 감마조의 연락을 받고 제주도로 향하는 중이었다.
―트, 특임반장님! 측정 불가 던전이 나왔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측정 불가요? 그럼 최소 S급 던전이라는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 협회장님께 알리고 S급 헌터들을 모으는 것이…….
―아니요, 알리지 마세요. 제가 가겠습니다.
―예? 아,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혼자서…….
―위치 찍으세요. 지금 가겠습니다.
쐐애애애애액 ― !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서울에서 한라산 정상까지 도착한 태운.
강력피라는 기술을 개발한 이후, 이동시간이 현저하게 줄어든 태운이었다.
투아아아아앙 ― !
인적이 없음을 확인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강력피에 묶여있던 공기를 방출한 태운이 천천히 걸어서 백록담에 올랐다.
“어… 어떻게……?”
한라산, 백록담에서 대기하고 있던 감마조원들이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별안간 정상 조금 밑 부근에서 엄청난 돌풍이 부는가 싶더니, 특임반장이 나타났으니까.
분명 서울에 있었을 양반이 대체 무슨 수로 30분도 지나지 않아서 백록담에 올랐단 말인가?
한라산 밑에서 백록담까지 오르는 것만 해도 30분 이내에 올랐다고 하면 거짓말이라고 할 판에 말이다.
‘제주도에 일이 있으셨던 건가?’
감마조원들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와중에 태운은 그들의 옆에 있던 게이트에 다가갔다.
“이거군요. 마력 측정기 좀 주시겠습니까?”
감마조원에게 측정기를 받아 게이트 안에 찔러보는 태운.
삐빅 ―
ERROR라는 문구가 떠오르는 측정기를 보며 태운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군요. 최소 S급 던전이라…….”
태운의 말에 감마조원 중 하나가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쉽게 볼 일이 아닙니다. 특임반장님.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역대 세 번째 측정 불가 던전이란 말입니다. 당장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다른 나라의 협조를 구해야 합니다.”
2076년, 전 세계에 처음으로 던전이 발생하고 2096년이 된 현재까지, 21년이라는 시간 동안 대한민국엔 여태까지 두 번의 측정 불가 던전이 발생했었다.
첫 번째는 던전이 발생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2084년.
해남 땅끝마을에 측정 불가 던전이 생성된 적이 있었다.
당시 땅끝에서 종말이 시작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해지며 전 국민이 불안에 떨기도 했다.
그땐 아직 세계급 헌터가 없던 시절인데다가 전국은커녕 S급 헌터들이 전 세계적으로도 많지 않던 시절이었기에, 측정 불가 던전이 발생하면 모든 S급 헌터들이 모여 토벌을 진행하곤 했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국내 최초이자 국내 유일한 S급 헌터였던 현무 길드의 마스터 이도천이 레이드에 참여한 바 있었다.
전 세계에서 모인 20명이 조금 넘는 S급 헌터들이 참여한 토벌이었기에 다행히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두 번째는 바로 3년 전, 2093년 울릉도에서 발생한 측정불가 던전이었다.
미국과 일본의 S급 헌터들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토벌한 던전.
한 달이 넘게 이어진 레이드 끝에 가까스로 토벌할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토벌에서 이도천이 사망했다.
그 때문에 S급 헌터들을 모두 두 명씩 보유하고 있었던 4대 길드 중 유일하게 현무 길드만이 한 명을 보유하게 되며, 다른 4대 길드들에 비해 입지가 약해진 바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지금 이곳 한라산 백록담 던전.
사실 천안 브레이크도 최소 S급 이상의 던전이 터진 브레이크 사태였지만, 그 사실은 게이트 안에 직접 들어가 본 태운과 정호백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 공식적으로는 백록담 던전이 세 번째가 맞았다.
하지만 A급 헌터 수준의 마력 수치를 가지고 있을 때도 천안 브레이크를 토벌했던 태운이었다.
설령 백록담 던전이 EX급 던전이더라도 태운은 자신이 있었다.
‘그 괴물만 하겠냐고.’
태운의 머릿속에 과거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휘오오오오오 ― !
콰릉 ― ! 콰르르릉 ― !
번개와 폭풍을 일으키며 나타난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커다란 태산만 한 늑대 괴물.
처음 녀석을 봤을 땐 숨이 멎는 줄만 알았다.
입은 또 어찌나 크게 벌어지던지, 태운이 웨어울프들과 싸우던 갈대밭 전체 범위가 녀석의 한입 크기였다.
‘…대단했지.’
실제로 태운은 한입에 놈의 입속으로 삼켜져 버렸었다.
고동빛깔의 웨어울프를 잡으며 진작에 3차 각성을 이루지 못했다면,
‘난 그때 죽었을 거다.’
주륵 ―
당시의 기억에 태운의 등줄기로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어쨌든 그렇게 무지막지한 괴물도 이겨낸 그였기에, 태운은 그 어떤 던전이 나오더라도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정 너무 강하면… 네 번째 능력도 있고.’
4차 각성을 이루며 얻게 된 네 번째 능력.
아직 실전에서 사용한 적은 없었지만, 이미 구상과 검증까지 끝난 태운이 가진 비기 중의 비기였다.
그 밖에도 전과는 달리 청뢰 이상의 기술들을 잔뜩 장착한 태운이었기에,
“괜찮습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오래 걸리거나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나와서 연락을 드릴 테니 일단은 협회장님께만 말씀드리고 비밀에 붙여주시죠.”
“그… 후우…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태운을 말리려던 감마조원들이 한숨을 쉬며 출입 금지 라인을 다시 한번 손보고 뒤로 물러났다.
태운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알았으니까.
‘협회장님께서 알아서 잘 판단하시겠지.’
나머지는 협회장에게 맡기기로 하며 한라산을 하산하는 감마조원들.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태운은 살짝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다 여러분들 챙겨주려고 이러는 것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직원들 보너스를 챙겨주려면 벌 수 있을 때 많이 벌어두기도 해야 했으니까.
앞으로 더욱 바빠지면 대리 토벌도 못 뛸 텐데, 가끔씩이라도 이런 던전 하나 잡아서 대량으로 벌어둘 수 있을 때 벌어둬야 했다.
“자, 그럼 가볼까?”
태운은 꽤 오랜만에 두근대는 마음을 가지고 던전 안으로 들어섰다.
* * *
슈우우우우 ―
같은 시각, 일본 영공.
한국에서 날아온 비행기 하나가 일본 신치토세 공항에 착륙했다.
“도착한 건가?”
“응.”
도명조의 혼잣말에 길드원들 앞이라 도도한 컨셉을 유지하고 있는 이화연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마스터, 이제부터 자율행동입니까?”
길드원 중 하나가 짐을 챙기며 상기된 표정으로 히죽거렸다.
“그래, 대신 사고 치면 진짜로 죽여버린다. 여기는 한국 아니고, 일본이야. 다들 알아들어?”
흠칫!
도명조의 살벌한 미소를 보며 길드원들은 벌벌 떨면서도 설레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좋아. 숙소 위치는 찍어줄 테니까 너무 늦지 않게 알아서들 오시고… 해산! 재밌게 놀다 와라! 돈은 마음껏 써! 나중에 후급 처리해 줄 테니까.”
“와아아아아!”
마치 수학여행 온 고등학생들처럼 히히덕거리며 비행기에서 내리는 주작길드의 길드원들.
도명조는 이화연과 함께 그들을 바라보다 앞에서 다른 길드원들과 대화하며 킥킥대고 웃고 있는 적갈색 머리의 남자를 불러세웠다.
“정원준.”
“크핫! 그렇다니까… 예? 부르셨습니까?”
적갈색 머리의 남자, 정원준이 도명조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
빤히 그를 바라보는 도명조.
번뜩!
그러고는 으름장을 놓았다.
“여기서는 봐주는 거 없다. 조금이라도 소란 일으키면 바로… 알고 있겠지?”
꿀꺽 ―
눈을 부릅뜬 도명조의 으름장에 정원준은 마른침을 삼키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 알겠습니다. 얌전히 놀 테니 걱정 마십쇼.”
“가봐.”
도명조의 턱짓에 정원준은 살짝 기가 죽은 채 비행기를 빠져나갔다.
모든 길드원이 빠져나가고, 가장 뒤쪽에 단둘이 남은 도명조와 이화연.
폭 ―
이화연이 도명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이제 우린 어디 가?”
“일본까지 왔는데 온천이나 갈까?”
“너무 좋아!”
이화연을 품에 안은 도명조가 그녀 몰래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스윽 ―
시계는 정확히 10시 4분을 지나고 있었다.
‘12시까지 1시간 56분… 조금 빠듯하군.’
“얼른 가자. 점심도 온천 안에서 먹자고.”
“그럴 수가 있어? 사람들 있는데?”
“무슨 소리야? 당연히 우리 둘만 있지. 내가 다 전세 내놨어.”
“역시 우리 오빠, 센스 미쳤어!”
“하하하하하.”
이화연을 매단 채 비행기에서 내리는 도명조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약 두 시간 후, 12시.
두 사람이 벗어놓은 옷가지가 든 캐비넷 속에서,
삐이익! 삐이익!
재난 문자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협회 직원이 너무 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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