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마지막 선택 (5)
3일 후, A 신문사.
“하아. 미치겠네.”
김유진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delete 키를 눌렀다. 책상에 앉은 지 세 시간째. 몇 번이나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다른 신문사들은 어때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옆을 바라봤다. 나이 지긋한 기자가 그녀처럼 난감한 표정으로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슷합니다. 그날 사람들에게 보인 게 과연 진실인가? 이혜성은 어디에 있는가? 대충 이런 내용입니다.”
기자는 인스턴트커피를 홀짝이며 쓰게 웃었다.
혜성의 마지막 사건이 있고 사흘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신문은 그때의 일로 도배되고 있었다.
“제로 프로젝트라니.”
그녀는 사흘 전에 밤하늘을 수놓았던 거대한 입체 영상을 떠올렸다.
제로 프로젝트의 시작은 우연히 S급 몬스터를 살아 있는 상태로 포획하면서부터였다. 정부의 연구원들은 흥분해서 몬스터의 뇌를 정밀하게 조사했고, 그 과정에서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됐다.
이계를 떠도는 등급 측정 불가의 괴물. 죽은 능력자를 몬스터로 부활시켜 부리는 스킬 등. 뇌파를 이미지로 구현해 보면서도 황당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걸 알게 된 정부는 엉뚱한 생각을 품게 됐다.
- 우리도 몬스터와 각성자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통제할 수 있지 않을까?
총과 칼 등 기존의 무기는 무의미해진 세상. 각성자가 곧 국력인 시대였다. 게다가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 유럽 등 다른 국가들에서도 비슷한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한국 정부로서는 이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프로젝트를 실행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각성자가 영문도 모르고 끌려갔다. 일본의 731부대를 연상케 하는 비윤리적인 실험들이 자행됐고, 그 과정에서 수백 명이 죽어갔다.
그러던 중 사고가 발생했다. 초기 완성형으로 평가받던 세 명이 연구소를 탈출한 것이다. 그들의 코드명은 블랙. 그들은 해외로 도주한 뒤, 비슷한 실험을 받고 있던 일본의 능력자들을 하나둘씩 구출해 포섭했다.
목표는 죽어간 동지들의 복수. 그리고 자신들이 당한 부당한 실험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일개 조직이 아니라 국가, 그 자체였다. 그들만으로는 복수에 한계가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능력자에 의한 세상의 지배를 명분으로 내세웠고, 다른 능력자들을 끌어들여 조직을 확대했다.
“블랙도 무고한 이들을 많이 죽였지만, 따지고 보면 그들의 행위는 처절한 복수에서 출발한 것이었어. 물론 어떤 경우에도 피를 동반한 복수는 정당화될 수 없겠지만, 과연 그들의 행위가 그저 나쁘기만 한 것이었을까?”
김유진은 팔짱을 끼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문득 선과 악의 구분이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정부와 블랙은 그저 각자의 입장에 충실했을 뿐. 무수한 각성자가 실험에 희생됐지만, 그것 또한 출발은 국가안보라는 선의였다.
“그나저나 혜성 씨는 어떻게 됐을까?”
김유진은 혜성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
NSA 국장실.
“……이상이 그날 제가 보고 들은 모든 것입니다.”
장진우는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힐러의 치료를 받긴 했지만, 아직 몸이 성한 데가 없었다. 눈이 퉁퉁 부어오른 가운데, 머리와 가슴에 붕대를 미라처럼 두르고 있었다.
그가 싸웠던 상대는 유수혁을 능가하는 차세대 능력자들. 불과 10분 남짓이었지만, 싸움은 처절할 정도로 치열했다. 물론 그와 맞선 일본 쪽 능력자들도 지금 비슷한 몰골이 돼 병원에 누워 있었다.
“황당하군. NSA나 CIC도 모르는 비밀 프로젝트가 있었다니.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가 뒤집어졌어.”
한진영은 눈을 감으며 검지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임시 국회 소집, 청문회, 정부 질문, 언론사들의 빗발치는 문의, 국정감사 등. 현장에서 뛰어다니는 요원들의 일은 끝났지만, 국장과 간부들의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막내하고 수호는 어떻게 됐지?”
한진영은 눈을 감은 채 장진우의 보고를 되새기며 물었다.
“둘은 그 일로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휴직계를 내고, 당분간 공기 좋은 곳에서 몸을 추스르겠다고 했습니다.”
“마스터들은?”
“우선 검은 마스터와 회색 마스터의 대결은 무승부였습니다. 처음엔 검은 마스터가 유리한 것 같았습니다만, 회색 마스터가 마지막 순간에 놈을 끌어안고 자폭했습니다.”
“흰 마스터는?”
“그 또한 부상이 큰 상태에서 무리하게 스킬을 사용하고 산화했습니다.”
장진우는 보고서 파일에서 사진 몇 장을 꺼내 내밀었다. 시커멓게 그을린 시체 세 구의 사진이었다.
“밤안개는?”
다른 경로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박무영은 각성자이면서 당시 정부의 편에서 실험에 관여한 자였다.
블랙이 복수를 위해 테러를 자행한 뒤, 박무영은 테러에 희생당한 자들의 가족 중 능력자들을 규합해 비밀 조직을 결성했다. 바로 SJ 기획이었다. 그의 조직원 중에는 청와대의 고위 관계자도 있었던바, 그는 VIP한테도 접근해 세력을 키웠다.
마침 VIP도 NSA와 CIC를 견제하고, 테러에 대응하기 위한 비밀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NSA에서 전설로 통하는 전직 요원의 접근을 거부할 수 없었다.
장진우는 다른 사진을 내밀었다. 마스터들과 반대로 하얗게 재가 된 시체였다.
“흰 마스터의 영상이 공개된 후, 밤안개는 분노로 폭주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또한 제로 프로젝트의 실험 과정에서 몬스터의 힘을 흡수한 상태였더군요. 강한 정신력으로 부작용을 누르고 있었습니다만, 영상이 공개된 후 이성을 잃은 것 같았습니다.”
장진우는 혜성 대 박무영의 대결을 간단히 설명했다.
혜성은 리제너레이션으로 능력을 최대 여덟 개까지 카피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는 밤안개의 다양한 능력을 모두 카피하고 증폭해 단숨에 끝장냈다.
끝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았다.
“이혜성은? 정말 시체도 안 남았나?”
한진영은 격정을 애써 삭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눈꺼풀 안에 맺힌 눈물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었다.
“그렇습니다.”
장진우는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순간, 박무영이 모든 에너지를 끌어올려 자폭했습니다. 그대로 두면 도쿄가 날아갈 위력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설명은 여기까지. 그는 차마 그다음을 말할 수 없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아직도 혜성이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알았네. 수고했어.”
한진영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사건 종결.
만약 일본에서 있었던 일이 한 편의 영화였다면, 이번 영화는 주인공의 죽음으로 끝나는 비극이었다.
***
제주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녹색 언덕 위.
모자를 푹 눌러쓴 남녀가 편하게 앉아 있었다. 석양을 등지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얼굴과 몸의 윤곽이 길고 훤칠했다. 혜성과 강지영이었다.
“언젠가 태호 녀석이 제게 이런 말을 했죠. 다 때려치우고 제주도에 내려가서 평범하게 살자고. 그런데 정말 녀석의 말대로 되다니.”
혜성은 박무영이 자폭하던 순간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박무영의 단전에서 태양처럼 눈부신 빛이 뿜어지고 있었다. 혜성이 반사적으로 놈의 몸을 덮쳤지만, 솔직히 그것만으로 놈의 자폭을 막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강지영이 나타난 건 바로 그때였다. 디버프 스킬로 자폭의 위력을 축소하고, 혜성의 시체를 대신할 더미를 놓고, 끝으로 혜성을 데리고 오다이바를 빠져나갈 때까지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뭐가요?”
“한수은 씨요. 박무영은 두 분께 스승 같은 존재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그녀는 왜 스승의 말을 어기고 제 말대로 멈췄을까요?”
혜성은 한수은의 울먹이던 표정을 떠올렸다.
그 후 그녀의 소식은 듣지 못했다. 다만 그녀의 놀라운 신법을 봤을 때, 박무영이 자폭하던 순간에 어디론가 도망쳤을 거라고 막연히 추측했다.
“그녀는 박무영과 오랫동안 함께했죠. 박무영이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건 진즉 눈치챘을 거예요. 제가 박무영에게도 알리지 않고 접근해서 혜성 씨를 빼돌린 것도 그 때문이었으니까.”
강지영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블랙의 테러로 가족을 모두 잃은 뒤, 그녀와 한수은의 관계는 친자매 이상이었다.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그나저나 아쉽지 않아요?”
그녀는 억지로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뭐가요?”
“박무영과의 싸움에서 리제너레이션의 한계치 이상으로 힘을 쓴 거 말이에요. 그 때문에 혜성 씨는 모든 능력을 잃었잖아요.”
“괜찮습니다. 박무영은 한계치 이상의 힘을 쓰지 않으면 쓰러뜨릴 수 없는 강적이었으니까요.”
혜성은 쓰게 웃은 뒤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시지 않습니까? 능력은 내겐 생명을 갉아먹는 버거운 짐이었다는 걸. 오히려 덕분에 이제 남들처럼 살 수 있게 됐습니다. 아주 오래오래,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 겁니다.”
혜성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잠깐 떠올렸다.
돈 걱정은 없었다. 각계의 성금이 끊이지 않았으니까. 부모님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나중에 상황이 진정되면 동남아에서 만날 수 있었다. 물론 로드리게스 같은 제3국의 위조 여권을 써야겠지만.
“저도 궁금한 게 있어요.”
이번엔 강지영이 물었다.
“뭔데요?”
“왜 마지막에 진실을 공개하는 쪽을 선택한 거죠?”
혜성은 고개를 들어 멀리 바다를 응시했다. 그리곤 혼잣말처럼 낮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흰 마스터와 싸울 때까지도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확신이 안 섰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옳다, 그르다는 누가 판단하는 거지? 옳다, 그르다의 기준은 뭘까? 내 판단이 정말 옳은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라고요.”
“…….”
“선악은 제가 자의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국익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게 옳은 일인가, 아닌가는 모든 이가 판단할 몫인 거죠. 청문회 등 공개된 방법을 통해서요. 그래서 흰 마스터를 도와 진실을 공개하는 걸 택했습니다.”
물론 그 파문은 컸다. 비윤리적인 실험은 한국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국가에서 자행됐으니까. 언론에서도 연일 그 뉴스만 다뤘고, 이에 대한 시위도 세계 곳곳에서 끊이지 않았다.
“악마처럼 강한 이계의 괴물은 어떻게 될까요?”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누군가가 제게 말하더군요. ‘인간의 역사는 인간에게, 신들의 역사는 신들에게 맡겨라.’라고. 악마를 막는 건 신이 할 일입니다.”
“신이요?”
강지영은 조금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혜성을 바라봤다.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왕과 드래곤, 마법사, 절세미녀, 드워프를 거느린 절대적인 존재가.”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사람들 말인가요?”
“맞습니다. 아참, 신이 제게 하나 재미있는 걸 말해줬습니다. 신이 우리 인간을 만든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혜성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뭔데요?”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건…….”
혜성이 잠깐 뜸을 들였다가 대답하려는 찰나였다.
멀리서 누군가가 둘을 향해 손짓하며 달려왔다. 막내와 한수호였다. 태호와 김연우도 조금 뒤처져서 따라오고 있었다.
“몇 년 만에 미녀와 단둘이 대화하는 건데. 저 새끼들은 여기까지 따라와서 산통을 깨네.”
혜성은 쓰게 웃으며 손을 털고 일어났다. 강지영도 따라서 일어나며 자연스럽게 그와 팔짱을 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