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 마지막 선택 (4)
청룡의 비늘에서 섬광이 번쩍인 순간이었다.
콰쾅, 하늘에서 때아닌 벼락이 떨어졌다. 일본이 자랑하는 신무기, 천공의 검이 인근의 드론과 통신망을 일제히 파괴하는 소리였다.
퍼펑!
흰 마스터도 사방에서 기습을 받고 비틀거렸다. 다만 그가 받은 기습은 천공의 검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누구냐?”
흰 마스터는 피를 토하며 뒤를 돌아봤다.
코드명 유성, 청풍, 만월로 불리는 일본 쪽 능력자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대단한걸? 전력을 다한 일격이었는데 버티다니.”
“마지막 순간에 방벽을 만든 건가?”
“그래 봤자지. 지금 서 있는 게 전부일걸?”
그들은 비아냥거리듯 말하며 히죽 웃었다.
“네가 왜?”
흰 마스터는 눈을 부릅뜨고 왼쪽을 바라봤다.
세 놈이야 일본 정보국 소속이니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왼쪽에서 등장한 자의 기습은 너무 뜻밖이었다. 사실 그가 받은 충격도 그자의 영향이 가장 컸다.
검은 기모노를 입은 노인. 검은 마스터였다.
“진실을 알리고 자폭하자는 건 네 생각이고.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는데? 난 과거에 얽매이기보다 지금을 즐기고 싶다고.”
검은 마스터는 일본 쪽 능력자들을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놈이.”
흰 마스터는 이를 부득 갈았다.
흰 마스터와 블랙 일부를 넘기는 대신 일정 부분을 보장받는다.
검은 마스터와 일본 정보국 사이의 결탁이 눈에 훤했다.
“내 능력이 뭔지 알지?”
검은 마스터는 두 주먹을 움켜쥐고 하늘을 올려봤다.
눈이 온통 까만색으로 변하면서 검은 기운이 퍼져 나갔다. 광역 디버프. 검은 기운은 그를 중심으로 오다이바 전체를 덮었다. 디버퍼도 유형과 등급이 다양했지만, 놈은 마스터라는 별명답게 그중에서도 최상급이었다.
“안 돼!”
흰 마스터는 급히 에너지를 끌어모았다.
늦었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청룡의 비늘도 빛을 잃고 본래의 형태로 돌아갔다.
전자기기로 비유하자면, 복제 스킬은 막대한 전기가 필요했다. 그런데 검은 마스터가 광역 디버프로 전력을 20%로 줄인 상황이었다. 자체 전력이 일부 남아 있지만, 이래선 에너지 부족 때문에 복제 스킬을 펼칠 수 없었다. 복제 스킬을 펼치기 위해 다시 에너지를 끌어모으려면 적어도 10분은 걸렸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인가?”
흰 마스터는 절망 가득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콰쾅, 일본 쪽 능력자 삼인방과 검은 마스터의 2차 기습이 전후좌우에서 그를 강타했다.
***
“안 돼!”
흰 마스터가 절망의 목소리로 외쳤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공격들이 그를 향해 휘몰아치고 있었다.
혜성은 놈을 향해 움직이려다가 멈칫했다.
그가 여기까지 온 것은 오로지 블랙을 타도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블랙의 목적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었다.
‘어차피 블랙은 끝났다. 한, 일 양국의 정보국이 손을 잡았을 때부터 그들에겐 도망칠 곳이 없었으니까. 문제는 그들이 밝히고자 하는 진실. 그것은 과연 어떤 파문을 몰고 올 것인가?’
혜성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며칠 전부터 계속 고민했지만,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그때였다.
- 혜성 씨. 우리야. 내 말 들려?
반가운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장진우였다.
혜성은 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멀리 3시 방향 지하. 희미한 기척이 느껴졌다. 할 말이 많았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잡담이나 나눌 때가 아니었다.
“잘 들립니다. 지금부터……”
계획 변경. 그는 양팔을 뒤로 하고 오른손 검지로 스마트 워치를 톡톡 두드렸다.
***
검은 마스터와 일본이 자랑하는 차세대 에이스들의 연합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기습으로 상대에게 큰 데미지를 줬고, 광역 디버프도 걸어둔 상태였다. 아무리 흰 마스터라도 그들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크윽.”
흰 마스터는 피투성이가 돼 비틀거렸다. 이를 악물고 신음을 삼켰지만, 충격이 상당히 커 보였다.
만월이 일본어로 뭐라고 외치며 주먹을 든 순간이었다.
“누구 맘대로?”
일본 쪽 삼인방을 향해 아래에서 그림자 셋이 튀어나왔다. 장진우와 막내, 한수호였다.
“흥!”
만월은 재킷에서 단검을 꺼내 장진우를 향해 검기를 날렸다. S급의 날카로운 기운. 공기가 비명을 질렀다.
“팀장님……!”
혜성이 당황해 외치려는 찰나였다.
장진우는 혜성을 힐끔 돌아본 뒤, 오른손을 슬쩍 들었다. 혜성이 알고 있던 장진우가 아니었다. 놈의 공격을 순간이동으로 피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맨손으로 놈의 공격을 받아냈다. 동시에 왼 주먹으로 강기를 날려 오히려 만월이 몇 걸음 물러섰다.
다른 곳의 상황도 비슷했다. 청풍에겐 막내가, 유성에겐 한수호가 달려들어 비슷한 장면을 연출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새 또 레벨 업한 건가?”
모두가 크게 놀랐지만, 역시 제일 크게 놀란 건 혜성이었다. 장진우의 자신만만한 말에 어느 정도 기대하긴 했지만, 이건 생각 이상이었다.
“멈춰! 그들은 일본 정보국 소속이다! 적이 아니다!”
검은 마스터가 장진우를 향해 한국어로 외쳤다. 일본 쪽 능력자들도 재킷에서 신분증을 꺼내 보였다.
장진우와 막내, 한수호 등은 잠깐 움찔했다.
“알아. 하지만 오는 길에 많은 걸 들었거든. 예를 들어 너희와 우리 정부가 그토록 감추고 싶어 하는 것 말이야.”
막내는 놈을 향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 우린 정부가 아니라 국민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다.”
한수호가 결연한 표정으로 거들었다.
사실 그는 블러디 클로버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밝혀낸 여러 파편적인 정보를 조합해본 결과, 그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한국과 일본뿐만이 아니라 세계 모든 정부가 감추고 싶어 하는 추악한 진실. 형의 말대로 그건 모두가 알아야 한다.’
막내는 혜성을 돌아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결국 다 같이 피를 보겠다는 건가?”
검은 마스터가 험악한 표정으로 한참 중얼거리는 도중이었다.
“맞아. 피를 봐야지. 네놈의 드래곤에 큰 빚을 졌거든. 다른 놈은 몰라도 네놈만은 꼭 죽인다.”
이번엔 오른쪽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또 누구지?’
혜성은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그대로 굳어졌다.
회색 생활 한복을 입은 노인.
회색 마스터가 왼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지하 마켓에서 용케 살아남았지만,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놈은 왼쪽 다리와 왼팔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래도 능력치 자체에는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았다.
“그래. 네 녀석이 그렇게 쉽게 죽었을 리가 없지. 안 그래도 네놈을 내가 직접 죽이지 못해 섭섭하던 참이었다.”
검은 마스터도 회색 마스터를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역시 살아 있었군.”
혜성도 회색 마스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막연하게 놈이 살아 있을 거라고 짐작하던 터였다. 놈의 귀환이 별로 놀랍지 않았다.
“이제 우리의 인연을 눈치챘나?”
회색 마스터는 혜성을 슬쩍 돌아봤다.
“그래. 당신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능력자지. 그리고 난 당신과 비슷한 능력을 지녔고. 그럼 나도 당신처럼 만들어졌다는 뜻이 아닌가?”
“맞아.”
회색 마스터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이게 어떻게 돼 가는 겁니까?”
한수호가 당황해 눈을 끔뻑거리며 물었다.
상황이 이상해졌다. 일본 쪽 능력자 삼인방과 검은 마스터가 오른쪽에 섰다. 그리고 장진우와 막내, 한수호는 놈들의 반대편에 섰고, 회색 마스터도 검은 마스터를 노려보며 슬그머니 한수호의 옆으로 다가왔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우린 혜성 씨를 돕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니까. 혜성 씨의 결정에 따르자고.”
장진우는 좌우를 돌아보며 쓰게 웃었다.
사 대 사의 전투.
팀 구성이 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쉽게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대등한 전력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당신이 온 걸 알고 있어. 불필요하게 시간 끌지 말자. 올 사람은 다 왔으니 당신도 이제 나오는 게 어때?”
혜성은 대관람차 쪽을 바라보며 크게 외쳤다.
“또 누가?”
모두가 당황해 두리번거리는 가운데, 이어서 대관람차 위에서 일남일녀가 천천히 내려왔다. 박무영과 한수은이었다.
***
“밤안개?”
흰 마스터는 험한 표정이 돼 박무영을 노려봤다. 움켜쥔 두 주먹이 분노와 격정 때문에 부르르 떨렸다.
“너도 많이 변했군. 난 아직 그대로인데 말이야.”
박무영은 웃으며 비아냥거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대화는 나중에 하지. 일단은……”
박무영은 흰 마스터를 향해 다가가다가 멈췄다. 어느새 혜성이 그와 흰 마스터의 사이를 막아서고 있었다.
“왜 그러지? 블랙 타도는 자네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닌가?”
박무영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맞아. 그랬지.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혜성은 박무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문득 피식 실소가 나왔다. 박무영에게 반말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내가 누군가한테서 들은 비밀이 있거든. 그런데 당신들이 이렇게까지 나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 비밀이 진실인 거 같아. 그래서 나도 마음을 바꿨어. 그 진실을 들어보자고.”
“날 상대로 싸울 셈인가?”
“필요하다면.”
“자신 있나?”
“물론이지. 상대가 강할수록 나도 강해진다. 내 2차 각성을 잊은 건가?”
혜성과 박무영은 엷은 미소를 지은 채 대화를 주고받았다. 겉으로는 화기애애했지만,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처음 만났을 땐 일 분도 못 버티더니. 강해졌군.”
“다 당신 덕분이지. 사실 당신도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지 않았나?”
혜성은 신에게서 들은 말과 조금 전 회색 마스터가 한 말을 떠올렸다.
박무영이 처음에 그를 주목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제로 프로젝트는 어린 각성자에게 다양한 능력의 씨앗을 심어두는 형태로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하급 각성자 혜성. 물론 대부분은 그 씨앗이 싹을 틔우지 못했지만, 혜성은 체내의 에너지가 불안정한 불치병 때문인지 씨앗이 발아에 성공했다.
“왜 우리를 막으려는 거죠?”
한수은이 당황한 표정으로 끼어들어 물었다. 그녀는 박무영의 뒤에 서서 안절부절못했다.
“미안하지만 우리의 동행은 여기까지인 것 같군요. 그동안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혜성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째서…….”
그녀가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그는 못 들은 척하고 흰 마스터를 돌아보며 외쳤다.
“뭐 해? 언제까지 구경만 할 거야?”
그 말이 신호였다.
좌우에 마주 보고 있던 능력자들이 일제히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동시에 박무영도 양손에 번개와 물의 기운을 맺고 혜성을 향해 돌진했다. 혜성 또한 흰 마스터를 힐끔 돌아본 뒤 박무영을 향해 에너지를 집중했다.
남은 변수는 한수은. 그녀는 아까부터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막아!”
“놔둬!”
박무영과 혜성은 동시에 한수은을 힐끔 쳐다보며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