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 마지막 선택 (3)
오다이바 대관람차 아래.
혜성은 주먹을 가볍게 말아 쥐고 상대를 노려봤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간부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의 시선은 약 20미터 전방, 흰 정장을 입은 노인에게 고정돼 있었다.
“피차 자기소개는 생략하지. 괜히 쓸데없는 대사만 장황하게 늘어놓는 건 질색이거든.”
흰 마스터는 주위를 슬쩍 돌아본 뒤 쓰게 웃었다.
일본 정보국의 안민우처럼 한, 일 혼혈이나 재일교포인 것 같았다. 놈의 한국어에는 일본어 특유의 억양이 남아 있었다.
“그것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차성진이나 우민창은 너무 말이 많았거든. 다만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다.”
혜성은 감정을 삭이며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뭐? 왜 테러를 하느냐고?”
흰 마스터는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웃었다. 마치 혜성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혜성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능력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메시지 전달이라는 테러의 목적 중 하나를 위해서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내 결론은 둘 다인 것 같단 말이지.”
“예리하군. 단순히 능력만 강한 게 아니야.”
흰 마스터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뜻은 명확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거냐?”
“성격이 급하군. 그 전에 내 말을 들을 자격이 있는지, 어디 한번 봐야 하지 않겠어?”
흰 마스터는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단검이었다.
“청룡의 비늘?”
혜성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청룡의 비늘.
인천대교에서 그가 손에 넣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웠던 아이템이었다.
“역시 모든 일의 배후에는 블랙이 있었나?”
혜성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
혜성은 분노했지만 흥분하진 않았다. 2차 각성 특유의 전투본능에 불타고 있었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애써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스터들은 뭔가 독특한 능력을 지니고 있을 거다.’
혜성은 회색 마스터를 떠올렸다.
회색 마스터는 혜성처럼 상대의 스킬을 카피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그 위력은 회색 마스터 본래의 능력에 의해 결정되는 고정형이었다. 반면 혜성은 상대의 위력을 베이스로 증폭의 정도가 일정 배율로 증가하는 변동형. 강자한테 강하고, 약자한테 약한 형태였다.
‘그럼 놈의 스킬은?’
그가 흰 마스터를 노려보며 한창 고민하는 도중이었다.
“생각이 많은 것 같군. 하긴, 난 너에 대해 잘 알고 있는데, 넌 나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지. 서로 대등한 상태로 싸워도 네게 승산이 없는 상황인데, 내가 지닌 패까지 모르니 더 당혹스럽겠지.”
흰 마스터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혜성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아까부터 계속 놈에게 생각을 읽힌 기분이었다.
“힌트를 주지. 내 스킬은 소환이다. 회색 여우, 너희 코드명으론 회색 마스터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스킬이지.”
“소환? 몬스터를 소환한다는 뜻이냐?”
혜성은 고개를 갸웃하며 놈을 유심히 살폈다.
소환술사 특유의 사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소환에 필요한 특수 아이템을 갖고 온 것 같지도 않았다.
‘대체 뭘, 어떻게 소환한다는 거지?’
그의 의문이 더 커진 찰나였다.
파팟, 흰 마스터의 신형이 돌연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위?”
혜성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흰 마스터는 대관람차를 등지고 높이 떠올라 있었다. 오른손에 청룡의 비늘을 든 채. 다만 청룡의 비늘에는 능력자 특유의 검기가 맺혀 있지 않았다.
혜성은 무형검을 날리기 위해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때였다.
“크아아!”
흰 마스터는 입을 크게 벌리며 사자후처럼 포효했다.
아무리 무형검이 빨라도 소리보다는 느렸다.
“제길!”
혜성은 급히 양손을 거둬들이고 물러났다. 양팔을 교차시켜 겨우 놈의 공격을 막았지만, 내상을 입었는지 코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뭘 한 거냐?”
혜성은 눈을 크게 뜨고 놈을 쳐다봤다.
흰 마스터는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조금 전의 공격은 그저 인사 대신. 진짜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는 듯 여유로웠다.
“이제 내 능력을 알겠나? 어디선가 접한 적이 있을 텐데? 그새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놈이 놀리듯 빙글거리며 물었다.
“설마……? 시 서펀트?”
혜성은 인천대교에서의 전투를 떠올렸다.
고주파의 음파 공격. 형태는 조금 달랐지만, 그 안에 담긴 에너지는 시 서펀트의 것과 똑같았다.
“이제 내 능력을 이해했나?”
흰 마스터는 혜성을 향해 단검을 들었다. 단검 주위에서 부웅 하고 진동음이 은은하게 들렸다. 이번엔 혜성이 DDP에서 상대했던 해골 병사의 스킬이었다.
“초진동 블레이드?”
혜성의 눈이 더 커졌다.
***
내각정보조사실 본청 임시 상황실.
실장과 모든 간부는 한자리에 모여서 정면의 대형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백여 명이 있었지만,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다들 잔뜩 긴장해서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모니터에서는 혜성과 흰 마스터가 거리를 두고 대치 중이었다.
몇 분 정도 대화가 오간 뒤, 흰 마스터가 높이 뛰어올라 기습했다. 혜성은 반격하려다가 깜짝 놀라 물러섰다. 조금 전까지 혜성이 서 있던 곳이 폭탄을 맞은 듯 움푹 파였다.
“방금 흰 마스터가 말했지? 소환이라고. 그게 뭐야? 몬스터의 소환은 아닌 거 같은데.”
“그보다 어떻게 놈이 몬스터의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거지?”
“카피인가? 하지만 여기엔 시 서펀트가 없잖아?”
다들 당황해서 수군거렸다.
지금까지 흰 마스터 같은 유형의 각성자는 보고된 바가 없었다.
“기가 막히는군. 카피하지도 않고 몬스터의 스킬을 사용하다니.”
실장도 인상을 찌푸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사이에도 전투는 계속됐다. 둘은 별다른 대화 없이 치열하게 치고받았다.
혜성은 불, 얼음, 물, 번개, 땅, 바람 등 자연계 속성의 강기와 무형검을 사용해 공격했다.
문제는 흰 마스터. 놈은 지금까지 보고된 모든 몬스터의 스킬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마치 그 스킬이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절대적인 능력치는 혜성이 강한 것 같았지만, 흰 마스터의 다양한 스킬에 고전했다.
“에너지 수치는?”
실장은 모니터 왼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니터에는 둘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분석한 수치가 나오고 있었다. 둘 다 측정 한계치를 뛰어넘은 상태. 모든 항목이 999,999,999였다.
실장은 다시 흰 마스터의 움직임을 보다가 뒤늦게 뭔가를 떠올렸다.
“설마…… 놈이 말한 소환이란 몬스터의 스킬을 소환하는 건가?”
다른 간부들도 모두 표정이 굳어졌다. 실장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지금 흰 마스터는 걸어 다니는 몬스터 도감인 셈이었다.
“한국 정보국으로부턴 별말이 없나? 마스터들은 제로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부산물들. 한국 정보국이라면 뭔가를 알 수도 있을 텐데.”
실장은 국제부를 담당하는 부장을 신경질적으로 돌아봤다.
“특별한 정보는 없습니다. 한국에서도 제로 프로젝트는 최고 등급의 기밀로 다루고 있습니다.”
부장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젠장. 놈이 입을 열 경우에 대한 대책은?”
“현재 천공의 검을 준비 중입니다. 놈이 진실을 밝히는 순간, 천공의 검을 작동시켜 일대의 모든 통신망을 파괴할 겁니다.”
“좋았어.”
모처럼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 실장은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다시 모니터의 혜성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혜성. 넌 놈을 어떻게 공략할 테냐?”
임무는 잠시 뒷전.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전투에 빠져들었다.
***
오다이바 대관람차 근처.
“제길. 공략법이 안 보이는군.”
혜성은 스피드를 살려 놈의 주위를 빠르게 맴돌았다.
언뜻 보면 흰 마스터가 중앙에 서 있고, 혜성 십여 명이 시계방향으로 놈의 주위를 도는 것 같았다. 콘크리트 바닥이며 주위의 시설들이 폭죽처럼 터지는 가운데, 대관람차가 대결의 충격파 때문에 서서히 뒤로 기울어졌다.
놈은 회색 마스터보다 훨씬 까다로웠다. 회색 마스터의 능력은 카피이기 때문에 스킬의 숫자가 제한적이었다. 정확히 알진 못했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카피한 스킬이 사라지는 유형 같았다.
하지만 눈앞의 흰 마스터는 사용할 수 있는 스킬에 제한이 없었다. 스킬 하나하나의 위력은 회색 마스터보다 조금 낮았지만, 현존하는 모든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것 같았다.
- 승패는 수치화된 능력치로 결정되는 게 아니다. 수치나 등급은 그저 참고사항일 뿐. 중요한 건 상대의 속성과 약점을 공략하는 것이다.
혜성은 전투의 기본 명제를 새삼 실감했다.
문득 어렸을 때 즐겼던 전략, 전술 게임이 떠올랐다. 게임으로 치면 혜성이 사용할 수 있는 패는 자연계 속성 여섯 개와 무형검이 전부였다. 반면 상대는 거의 무제한의 패를 사용할 수 있었다. 이래선 상성과 공략법에서 그가 절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흰 마스터가 돌연 벼락같이 달려들며 단검을 내밀었다. 혜성은 물러서며 에너지의 방벽을 만들었다. 부웅, 놈의 단검이 부르르 떨리자 방벽은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겼다.
“젠장.”
혜성은 이를 악물며 오른손에 에너지를 집중했다.
‘어차피 놈을 상대로 피를 보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줄 건 주자.’
놈의 단검에 왼쪽 어깨를 내 주고, 대신 오른손으로 뇌전의 강기를 날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흰 마스터는 돌연 단검을 거두고 물러섰다.
“벌써 이렇게 됐나? 아쉽군.”
놈은 엉망이 된 주위를 둘러보며 쓰게 웃었다.
‘뭐가 됐다는 거지?’
혜성은 정체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분명 놈이 승기를 잡은 상황이었다.
“청룡의 비늘은 단순히 상대에게 환각을 보여주는 게 아니다. 정확히는 사용자가 생각하거나 상상한 것을 상대에게 보여주는 거지. 그리고 몬스터의 스킬 중에는 일루전이나 분신 등 복제 계통의 스킬도 있지.”
놈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설명하듯 말했다.
‘복제 스킬?’
혜성은 놈이 말한 스킬을 떠올렸다.
듀플리케이션, 미러링 등. 그 종류는 한둘이 아니었다. 다만 이런 유형의 복제 스킬은 숫자가 늘어나고 영역이 넓어질수록 준비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일종의 쿨타임이었다.
‘이제까지 대결은 그저 시간을 끌기 위한 것이었나?’
혜성은 문득 등골이 서늘해졌다.
“맞아. 네 생각대로야. 이미지를 구체화하는 청룡의 비늘. 그리고 똑같은 것을 곳곳에 퍼트릴 수 있는 복제 스킬. 이 둘이 결합하면 어떻게 될까?”
흰 마스터는 하늘의 드론들을 힐끔 쳐다봤다.
일본이나 한국 쪽 정보국의 속셈은 뻔했다. 그가 진실을 공개하는 순간, 정보국은 비난을 무릅쓰고 통신망을 파괴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방식을 선택했다. 청룡의 비늘로 자신의 생각을 구체화하고, 일루전과 복제 스킬로 구체화된 영상을 세계 곳곳에 뿌리는 것이었다.
“인간들이여, 똑똑히 봐라. 이것이 그대들이 알고 싶어 하는 진실이다.”
파앗, 놈의 손에 들린 청룡의 비늘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졌다.
오다이바뿐만이 아니었다. 미국, 중국, 일본, 한국 등 세계 주요 도시의 하늘에도 같은 환상이 거대한 아지랑이처럼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