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147화 (147/150)

# 147. 마지막 선택 (2)

3일 후, 내각정보조사실 본청 제1 회의실.

“놈들이 요구한 대결 장소는 어디야?”

실장은 인상을 쓰고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도쿄만의 인공섬, 오다이바입니다.”

부장 중 하나가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오다이바.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곳이었다. 연인의 필수 데이트 코스로 유명한 관광지였다.

“불필요한 민간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생각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이미 도쿄만 인근에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실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왼쪽을 바라봤다.

다른 부장이 일어나서 브리핑했다.

“일단 오다이바로 향하는 모든 길목에 군경을 배치했습니다.”

우선 위성에서 촬영한 오다이바의 사진이 확대돼 스크린에 나타났다. 상점들은 다 문을 닫았고, 거대 로봇 등 각종 조형물도 대부분 철거된 상태였다. 철거가 어려운 대관람차와 건물들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문제는 놈들이 친 결계입니다.”

그는 리모컨으로 화면을 바꿨다. 반투명한 보라색 기운이 은은하게 빛나며 오다이바를 돔처럼 뒤덮고 있었다.

“뭐야?”

“결전의 영역입니다.”

그는 결전의 영역을 간단히 설명했다.

외부의 간섭이 배제되는 특수한 아공간이었다. 결계의 규모나 강도를 봤을 때, 백도어를 파서 잠입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다만 블랙의 요구사항 가운데 하나가 공개 대전이었다. 일반적인 결전의 영역과 달리, 통신전파는 허용됐다.

“파리 떼가 몰려들었겠군.”

실장은 극성스러운 언론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습니다. 곳곳에 언론사의 드론들이 떠 있고, 각국의 인공위성, 정찰기도 도쿄만 쪽으로 이목이 쏠린 상황입니다.”

“블랙의 의도는 뻔해. 모든 걸 밝히고 자폭하겠다는 거겠지. 한국 쪽 의견은 어때?”

“모르는 게 약이라고 했습니다. 놈들의 폭로를 막기 위해 밤안개가 직접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부장은 박무영과 그의 오른팔인 한수은의 사진을 띄웠다. 둘 다 비밀리에 입국했지만, 일본 정보국을 완벽히 속일 수 없었다. 둘이 호텔에 체크인하는 게 멀리서 촬영돼 있었다.

“좋았어. 놈들은 시작하자마자 바로 진실을 밝히진 않을 거야. 놈들도 능력자. 이혜성과 겨뤄보고 싶은 마음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놈들이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우린…….”

실장은 미리 생각한 구체적인 계획을 지시했다.

***

저녁 8시.

혜성은 혼자 오다이바 섬에 도착했다. 여의도의 절반 크기쯤 되는 인공섬이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게 다 결전의 영역이라고? 차성진의 결계와는 많이 다르군.”

혜성은 여의도에서 있었던 대결을 떠올렸다.

그때는 아무것도 없는 순백의 공간이었다. 반면 지금은 이상한 기운이 감지되는 걸 제외하면 특별할 게 없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영역의 넓이였다.

일반적으로 결계의 넓이는 사용자의 능력에 비례했다. 지난번 차성진이 여의도에 펼쳤던 결계도 크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섬 전체가 결계로 뒤덮일 정도였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차성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자라는 뜻이었다.

- 혜성 씨, 들립니까?

귀에 찬 핸즈프리를 통해 안민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잘 들립니다.”

혜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밤에 형형색색 빛나는 대관람차가 보였다. 화려한 관광지에 혼자 덩그러니 서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폭풍전야의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런 고요함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난 분위기일 뿐이었다. 주위를 통제하고 있는 군경 수천 명, 결계에 들어오지 못하고 대기 중인 능력자 백여 명, 그리고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시선이 거미줄처럼 그를 옭아맸다.

“검은 마스터와 흰 마스터라고 했나?”

혜성은 일본 쪽 자료에서 본 두 명의 마스터들을 떠올렸다.

특히 흰 마스터는 나머지 두 마스터가 협공해도 당해내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능력자라고 했다. 그 외에도 우민창 급의 간부들이 여섯 명. 얼마나 많은 놈이 여기에 숨어있을지 짐작되지 않았다.

그때였다.

삐-익, 펑!

거대한 불덩어리가 솟아올랐다가 화려하게 퍼져나갔다. 처음에는 대관람차 근처에서 하나만 터졌지만, 이내 인공섬 전역에서 불꽃이 터졌다. 대전을 알리는 성대한 불꽃놀이였다.

***

멀리 오다이바가 보이는 골목.

“젠장. 쉽지 않겠군. 저길 어떻게 들어가지?”

장진우는 주위를 둘러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일대는 군경이 쫙 깔려 있었다. 그들이 쫓고 있는 능력자 삼인방은 군경에게 신분증을 보여준 뒤 통제선 안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놈들은 아무래도 일본 정보국 소속 능력자인 거 같은데요.”

“블러디 클로버가 일본 정보국과 연결됐거나, 우리가 헛다리를 짚은 것 같습니다.”

옆에 있던 막내와 한수호도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삐-익, 퍼펑!

오다이바에서는 한창 불꽃놀이가 펼쳐지고 있었다. 관광객을 환영하는 행사는 아닐 터. 안에서 뭔가가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장진우가 한창 말하는 도중이었다.

“누구냐?”

장진우는 인기척을 감지하고 뒤를 돌아봤다.

한수호가 반사적으로 공격하려는 찰나, 막내가 급히 녀석의 팔을 잡았다.

“걱정하지 마. 적은 아니니까.”

가죽 재킷을 입은 사내가 골목 저편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회색 조끼를 입은 사내가 뒤따랐다.

‘누구지?’

장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놈들을 유심히 살폈다.

이렇게 지척에 접근할 때까지 눈치를 못 채다니. 정체는 모르겠지만, 보통 능력자가 아닌 것 같았다.

“너흰 누구냐?”

막내가 주위를 경계하며 물었다.

혹시 다른 놈들이 더 숨어 있을 수도 있었다. 그의 신경은 온통 놈들의 뒤에 쏠려 있었다.

“당신들이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제부터 계속 당신들을 지켜봤습니다.”

이번엔 회색 조끼를 입은 사내가 말했다.

다소 공손한 어투였다. 말을 들어보니 가죽 재킷 쪽이 상관인 것 같았다.

“우린 이런 사람들이야.”

가죽 재킷을 입은 사내가 오른손을 슬쩍 들어 보였다. 중지 마디에 작은 클로버 문신이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몇 마디 복잡한 숫자를 중얼거리듯 말했다. 장진우 등과 최초로 접촉하기로 한 좌표였다.

“아.”

장진우는 주먹을 풀었다.

물론 경계를 완전히 누그러뜨리진 않았다. 언제든 다시 나설 수 있게 암암리에 준비했다.

“보아하니 당신들은 저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맞나?”

“그렇다.”

“그럼 우리가 안내해 주겠다. 마침 우리도 그쪽으로 가는 길이니까. 피차 묻고 싶은 게 많을 테니, 대화는 가면서 하지.”

가죽 재킷의 사내가 오다이바를 턱으로 가리키며 히죽 웃었다.

“저길 어떻게 들어가겠다는 거지?”

이번엔 한수호가 잔뜩 경계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몰랐어? 저긴 애초에 관광지로 조성된 곳이 아니라는 거.”

“그게 무슨 말이냐?”

“원래 오다이바는 19세기 말에 미국 함대를 막기 위해 설치한 포대였어. 그 후 철거와 육지로 매립되는 과정을 거쳤다가, 1980년대에 포대 전체가 매립되고 신도시가 건설된 거지.”

가죽 재킷을 입은 사내는 오다이바의 역사를 간단히 설명했다.

“우린 저곳의 역사 따위엔 관심이 없다. 그것과 저기로 잠입하는 게 무슨 관계지?”

“쯧쯧. 뭘 모르는군. 방어 시설에는 유사시 대피로를 만들어놓는 게 기본 아닌가? 비록 몇 번의 난개발을 거치면서 애초의 모습과 크게 달라졌지만, 지하에는 아직도 그때의 통로가 남아 있단 말이지.”

가죽 재킷의 사내는 검지를 좌우로 까딱였다.

“근데 그걸 어떻게 알았지?”

장진우가 여전히 그들을 경계하며 물었다.

“우린 블러디 클로버. 세상에 모르는 게 없는 사람들이니까.”

가죽 재킷을 입은 사내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겁니까? 우리와 같이 갈 겁니까? 아니면 이대로 돌아갈 겁니까? 시간이 별로 없으니 빨리 선택하는 게 좋을 겁니다.”

회색 조끼의 사내가 대답을 재촉했다. 상대가 어떤 선택을 해도 자신들에게는 별로 타격이 없다는 투였다.

“접근한다 해도 결계가 있을 텐데. 그건 또 어떻게 할 생각이지?”

장진우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되물었다.

“그것도 다 생각이 있지. 놈들의 결계야 뻔하거든. 공개 대결을 요청했으니 아마 결전의 영역을 펼쳤을 거야.”

가죽 재킷의 사내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막내와 한수호, 장진우는 잠깐 서로를 바라보고 시선을 교환했다. 사실 여기까지 온 이상 그들에겐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좋아. 같이 가지. 단, 쓸데없이 위험한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이윽고 장진우는 굳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퍼퍼펑.

사방에서 요란한 폭발음이 들렸다. 검은 복면을 쓴 능력자 여섯 명이 혜성의 주위를 빠르게 움직이며 강기를 날렸다.

불, 얼음, 물, 번개, 땅, 바람 등 자연계의 속성들이었다. 개개인의 위력은 우민창보다 조금 약한 것 같았지만, 오랫동안 손발을 맞춘 듯 치고 빠지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제길! 일단 간부들로 몸을 풀자는 건가?’

혜성은 이를 악물고 놈들의 공격을 받아냈다.

그의 생각대로 놈들의 공격은 일종의 준비운동이었다. 강하고 화려한 공격이었지만, 그를 죽일 만큼은 아니었다. 딱 2차 각성을 유도할 정도.

“이 새끼들. 그렇게 원한다면 보여주지.”

어느 순간, 혜성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의 내면에 잠재돼 있던 전투 본능이 깨어났다. 은은한 서기와 황금빛 눈동자로 대표되는 2차 각성의 징후였다. 동시에 허리에서도 여덟 개의 영롱한 빛이 둥실 떠올랐다.

혜성은 가운데 우뚝 서서 양팔을 크게 휘둘렀다.

퍼엉, 자신을 둘러싼 그림자들을 향해 여섯 개의 강기가 동시에 뿜어졌다. 놈들이 쏜 것보다 훨씬 빠르고 강한 강기였다. 언뜻 보면 마구잡이로 휘두른 것 같았지만, 그는 속성 간의 상성을 잊지 않았다.

불과 얼음, 물과 번개, 땅과 바람. 각각의 속성에게 서로 상극인 속성이 날아갔다.

블랙의 간부들은 뭐라고 외치며 급히 물러났다. 복면 때문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허둥대는 폼을 보니 무척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러나 놈들이 물러서는 순간이 바로 혜성의 노림수였다.

혜성의 마지막 상대는 유수혁. 그리고 그 후 그는 다른 적을 상대한 적이 없었다. 얼굴 없는 무사와 삼두 익룡의 습격이 있었지만, 놈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는 통에 그가 나설 필요는 없었다. 따라서 그의 카피캣에 마지막으로 저장된 아이템은 바로 유수혁의 무형검이었다.

‘걸렸다!’

혜성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양팔을 좌우로 크게 벌렸다.

파팟,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무형검이 빛살처럼 뻗어 나갔다. 놈들은 혜성의 강기를 피해 뒤쪽으로 떠오른 상태. 파공음을 통해 무형검이 날아오는 걸 감지했지만, 피하거나 막을 방법이 없었다.

“크악!”

쿵, 긴 비명과 함께 여섯 명은 동시에 땅에 떨어졌다. 그들의 가슴과 배 등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사방에 흩뿌려졌다.

혜성은 확실한 마무리를 위해 다시 손을 들었다. 그때였다.

“역시 이혜성. 전보다 훨씬 강해졌군. 처음 각성하고 불과 3개월밖에 안 된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이렇게 빨리 성장할 수 있는 거지?”

우측에서 누군가가 뒷짐을 지고 천천히 나타났다.

그늘에 가려 얼굴은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혜성은 은연중에 뿜어지는 기척만으로 상대가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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