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마지막 선택 (1)
자정 무렵, K 호텔.
“오자마자 사건이라니. 이것도 팔자인가?”
혜성은 재킷을 벗어 던지며 침대에 앉았다. 자꾸 쓴웃음이 나왔다.
‘역시 블랙의 견제인가? 그런데 게이트가 왜 두 개나 생성된 거지? 이런 전례가 있었나? 그리고 몬스터끼리 왜 싸운 거야?’
경찰차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오는 내내 고민했지만, 생각할수록 의문이 커졌다.
‘혹시 블랙이 실수한 걸까?’
이런 생각도 했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명색이 국제테러 집단인데, 실수로 몬스터를 둘이나 소환해서 내분을 일으키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됐다.
아무튼 첫날부터 더블 게이트를 겪고 나니 자신이 블랙의 심장부에 온 게 실감 났다. 아마 내일부턴 본격적으로 사건이 펼쳐질 터. 오다가 안민우에게 들으니 일본 정부는 도쿄 봉쇄령 카드까지 만지작거리고 있다고 했다. 물론 경제적 손실 때문에 쉽게 결정하진 못했지만.
‘블랙은 테러리스트들이다. 테러를 통해 무엇을 얻으려는 걸까? 단순히 국가체제를 전복하려는 것? 아니면 뭔가 다른 목표가 있는 걸까?’
그는 팔베개하고 몸을 젖혀 계속 생각했다.
블랙을 뿌리 뽑는 것 못지않게 그들의 목표를 알아내는 것도 중요했다.
“에이 모르겠다. 일단 놈들과 싸우는 것에만 집중하자.”
그는 벌렁 드러누웠다.
이럴 때일수록 목표를 좁힐 필요가 있었다.
“블랙을 완전히 제거한다. 가족들과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간다. 지금은 이 두 가지만 생각하자.”
계속 능력을 갖고 시한폭탄처럼 위태롭게 사느냐, 능력을 포기하고 평범하게 오래 사느냐. 이것도 그다음 문제였다.
그는 머리맡을 더듬거려 리모컨을 들고 TV를 켰다.
TV에서는 아직도 그의 활약상을 집중 조명하고 있었다. 한국의 방송은 건수 하나만 잡으면 온종일 TV에서 같은 걸 내보냈는데, 일본도 별반 다른 것 같지 않았다. 하긴, 특종과 시청률에 목을 매는 건 세계 어느 언론사나 마찬가지겠지만.
“나 하나로 저렇게 온종일 뉴스거리를 뽑아내다니. 이 새끼들도 징글징글하네.”
피식 쓴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그가 아무 생각 없이 채널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저건 또 뭐야?”
혜성은 아나운서의 긴급 뉴스를 보고 멈칫했다.
일본어는 잘 몰랐지만, 핵심 단어는 발음과 분위기, 자막 등을 통해 대충 눈치껏 알아들을 수 있었다. 블랙, 공개, 메시지. 그는 경직된 표정을 지으며 볼륨을 높였다.
***
NHH 방송국, 뉴스 버라이어티 쇼.
스튜디오에서 한창 혜성의 능력을 분석하고 있었다. 이번 대상은 도쿄타워에 나타난 몬스터들. 패널들은 과장된 언행으로 얼굴 없는 무사와 삼두 익룡이 얼마나 위험한 놈들인지 떠들어댔다.
그때였다. PD가 갑자기 난입해서 쪽지를 주며 뭐라고 작게 속삭였다.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던 아나운서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긴급 뉴스입니다. 방금 블랙의 마스터를 자처하는 자에게서 공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아나운서는 떨리는 손으로 쪽지를 읽어 내려갔다. 그의 목소리에는 흥분과 불안 등 다양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 이혜성과 일본 정보국에 제안한다. 세상에 정의가 따로 있는 건 아니다. 강한 자가 곧 힘이요, 정의다. 그러니 능력자들답게 힘 대 힘으로 붙어 누가 정의인지 승부를 보자.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이혜성이 공개적으로 블랙 타도를 선언하고 일본에 건너온 상황이었다. 블랙도 피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 단……
그 뒤 몇 가지 조건이 붙었지만, 패널들이 다들 흥분해서 날뛰는 바람에 아나운서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이혜성 대 블랙의 정면충돌.
정부나 정보국의 반응은 뒷전이 됐다. 언론으로서는 역사에 남을 최고의 화제. 이런 핫이슈를 놓칠 수는 없었다.
같은 시각,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 중국, 러시아, 미국 등 주요 국가의 모든 언론사에서도 동일한 내용이 쏟아지고 있었다.
***
도쿄 S 호텔 VIP 룸.
박무영은 소파에 앉아 팔짱을 끼고 TV를 보고 있었다.
- 이혜성과 일본 정보국에게……
TV에서는 아나운서가 상기된 표정으로 블랙의 성명을 전하고 있었다.
“이 새끼들. 뜻하지 않게 정면돌파라니. 이거 제대로 한 방 먹었는데?”
박무영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블랙의 제안은 모든 언론사를 통해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퍼졌다. 이제 모두가 도쿄만 바라보고 있는 상황. 정부 차원에서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버렸다.
“갑자기 왜 행동을 바꾼 겁니까? 혹시 아까 있었던 더블 게이트 때문입니까?”
옆에 앉은 한수은도 심각한 표정을 하고 TV를 바라봤다.
“뭐. 그런 이유도 있을 거야.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현 상황이 놈들의 예상과 대응 범위를 벗어났다는 거지. 혹시 고르디우스의 매듭이라고 들어봤나?”
“고르디우스의 매듭? 알렉산더의 일화 말입니까?”
한수은은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그래.”
박무영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프리기아의 수도 고르디움을 지날 때였다. 그곳에는 끝을 찾을 수 없게 복잡하게 얽혀 있는 매듭이 있었는데, 누구든 그 매듭을 풀면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세계제패를 노리고 있던 알렉산더가 이 전설을 듣고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그는 칼을 뽑아들고 단숨에 그 매듭을 잘라 버렸다. 이후 알렉산더는 소아시아를 제패하고 인도까지 진격했지만, 매듭을 칼로 자른 탓인지 그가 죽고 왕국은 여럿으로 분열됐다.
“블랙 놈들, 난감했을 거야. 우리 외에 여러 기관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니까. 놈들 입장에서 보면 사방에서 적이 몰려드는 상황. 어떻게 풀어야 할지 답이 보이지 않았겠지.”
“그래서 아예 공개적인 단판 승부를 제시한 겁니까? 알렉산더가 매듭을 자른 것처럼.”
“그렇지. 그리고 하나 더. 아무래도 놈들이 마음을 굳힌 것 같아.”
박무영은 착잡한 듯 잠시 말을 멈췄다.
“무슨 마음 말입니까?”
한수은은 그의 눈치를 보며 다시 넌지시 물었다.
“놈들의 최종 목표. 이 세상에 진실을 알리고 복수하는 것.”
박무영은 신음을 삼키며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우린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한수은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당연히 그들을 막고 진실을 덮어야지. 때론 아는 게 병, 모르는 게 약이 될 수도 있으니까.”
박무영은 재차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
K 호텔.
“공개 대전이라고? 이 미친놈들. 이게 무슨 게임인 줄 아나? 나보다 더한 또라이들이군.”
혜성은 방금 안민우가 통역해준 블랙의 제안을 떠올렸다. 미친놈들이란 말이 절로 나왔다.
방에는 그 혼자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갑자기 목이 탔다. 혜성은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몇 방울이 목을 타고 흘러내려 셔츠를 적셨다. 그래도 한 병을 다 비우니 속이 어느 정도 진정됐다.
“한, 일 정보국에선 어떤 결정을 내릴까?”
그는 다른 생수를 꺼내 들고 방 좌우를 돌아봤다.
경호원들은 그의 방을 중심으로 왼쪽 방에서 누군가와 회의 중이었다. 안민우도 일본 쪽 요원들과 오른쪽 방에서 회의 중이었다. 각자 소속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황. 작전을 새로 짜기 전에 우선 각자의 입장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마음에 걸리는 건 그들이 대결에 덧붙인 조건 중 하나였다.
- 모든 것은 승패와 상관없이 언론에 투명하게 공개한다.
각국 정보국이 긴급회의를 벌이는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인 것 같았다.
사실 정부 입장에서는 대전 시간이나 장소, 방법 등을 조율할 수 없었다. 놈들의 메시지는 제안이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였으니까.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정부의 선택지는 단 두 개였다.
그렇다고 놈들의 메시지를 단칼에 거절할 수도 없었다. 12시간 안에 답변이 없거나 거절할 경우, 블랙은 도쿄는 물론이고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한꺼번에 폭탄을 터뜨리겠다고 예고한 상태였다.
물론 각국 정보국은 군경과 요원을 총동원해서 주요 거점을 지킬 터. 하지만 경계를 강화해도 모든 테러를 막는 건 무리였다. 열 장정이 도둑 한 놈을 못 막는다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결국 벼랑 끝 대결을 벌이자는 건데. 과연 각국 정부가 이들의 제안에 응할까?”
혜성은 쓰게 웃으며 TV를 바라봤다.
TV에서도 각계의 전문가들이 이에 대해 한창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떠들어 대던 혜성의 오늘 활약상은 금세 뒷전으로 밀려났다.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전대미문의 공개 대결에 잔뜩 흥분한 눈치였다.
그는 소파에 앉으며 테러의 목적을 떠올렸다.
테러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였다. 뭔가 이익을 보거나 자신의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달하는 것.
“이놈들. 결과야 어찌 됐건, 일단 언론의 주목을 끄는 건 성공했군.”
혜성은 쓰게 웃으며 다시 생수를 한 모금 들이켰다.
각종 테러와 위법행위, 몬스터의 힘을 이용한 강화, 나아가 그들이 주장하는 힘에 의한 지배까지. 차성진의 테러도 그랬지만, 블랙의 최종 목적은 초지일관 두 번째였다.
“블랙은 왜 그렇게 언론에 집착할까? 대체 뭘 알리려는 걸까?”
그는 문득 신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솔직히 자신도 아직 그게 진실인지 헷갈렸다. 신이 정신병원에 있었던 걸 생각하면, 그냥 미친놈의 헛소리일 가능성이 더 높았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신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블랙도 그걸 알고 있었다면? 그리고 블랙의 최종 목표는 대결의 승패와 상관없이 그걸 세상에 알리려는 것이라면?’
지나친 비약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혜성은 갑자기 등줄기가 서늘해지며 소름이 돋았다.
- 진실은 모두에게 알려져야 한다.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오로지 본인의 몫. 소수의 몇몇 지도층이 자의적으로 판단해서 결정할 일이 아니다.
- 아니다. 그건 너무 무책임한 말이다. 모든 이가 성숙한 의식을 가진 건 아닌바. 때론 모르는 게 좋은 것도 있다.
둘 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어느 것을 선택해도 나머지 하나가 아쉬웠다.
‘언론의 역할은 어디까지인가? 진실은 어디까지 공개해야 하나?’
그는 김유진을 떠올렸다. 그가 만나본 소수의 참 언론인 중 하나였다.
‘그녀라면 이에 대한 답을 알고 있을까? 이 상황에서 어떤 대답을 해줄까?’
혜성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혼란만 가중될 뿐. 역시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무튼 놈들은 나를 지목했다. 내가 만약 선택해야 한다면, 난 어떤 걸 선택해야 하나?”
그는 팔베개하고 눈을 감았다. 피곤했지만, 정신은 갈수록 또렷해졌다.
그때였다. 부웅, 바지 주머니에서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그의 핸드폰이었다. 발신자는 한진영 국장. 번호를 보니 긴급회선이었다.
“네. 국장님. 이혜성입니다. …… 네?”
그는 국장의 흥분된 목소리를 듣고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