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145화 (145/150)

# 145. 눈치싸움 (4)

도쿄 타워 제2 대피실.

“어떻게 됐지?”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바싹 붙어 있었다. 타워에서 미처 도망치지 못해 임시 대피실에 숨은 사람들이었다. 답답한 공기는 불안과 공포로 가득했다.

“이혜성이 이겼겠지?”

“그렇겠지. 아니, 당연히 그래야 하지.”

사람들은 혜성의 얼굴을 떠올리며 수군거렸다.

그들이 본 건 몬스터가 나타나고, 이어서 혜성이 가면을 벗으며 정체를 밝힌 것까지였다. 우당탕하는 싸움 소리, 몬스터의 처참한 울음소리 등이 환청처럼 한참 들리더니, 어느 순간부터 고요해졌다.

사람들은 핸드폰을 꺼냈다. 일본 정보국은 국가안보란 명분하에 긴급 상황에서 전자기기의 사용을 제한하고 있었다. 핸드폰이나 전자기기는 모두 먹통. BJ나 기자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뉴스에 나오는 전투 영상은 모두 정보국의 일차 검열을 받은 것들이었다.

참고로 한국의 혜성이 화제가 된 건 화려한 전투 영상 때문이기도 했다. 한국은 일본과 달리 언론 통제가 그나마 약했고, 덕분에 전투 영상을 거의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었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이제 끝난 건가?”

사람들은 대피소의 강철 문을 열고 하나둘씩 대피소를 나갔다.

도망치느라 엉망이 된 전망대가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깨진 창문 사이로 고층 빌딩 특유의 바람이 칼날처럼 불어닥쳤다.

“와. 이혜성! 이혜성!”

갑자기 타워 아래에서 혜성을 연호하는 함성이 들렸다.

“뭐야?”

사람들은 전망대 난간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타워 아래.

혜성으로 추정되는 한 사내가 얼굴 없는 무사와 삼두 익룡을 밟고 서 있었다. 늠름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함성은 사내를 에워싼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내지른 것이었다.

“이혜성 혼자서 두 놈을 제압한 거야?”

전망대의 사람들도 핸드폰을 꺼내 혜성을 촬영했다.

요즘 핸드폰은 렌즈가 좋아지고 줌 기능도 달려 고성능 카메라 못지않았다. 혜성이 몬스터를 밟고 있는 사진은 그들의 가족, 친구, 그리고 각 언론사로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

도쿄타워 입구.

“저거 뭐야? 운이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안민우는 황당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봤다.

100미터 전방에는 혜성이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안민우는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혜성이 한 일은 없었다. 그가 나서려는 찰나, 하늘과 땅의 몬스터들은 돌연 자기들끼리 피 튀기게 싸움을 벌였다. 치열한 전투 끝에 살아남은 건 삼두 익룡. 하지만 놈도 날개를 다쳐 곧 추락했다.

쾅!

추락의 충격으로 놈의 목이 왼쪽으로 기묘하게 꺾였다.

이어서 구경하던 혜성이 천천히 걸어 나와 삼두 익룡의 머리를 밟고 섰다. 굳이 능력을 쓸 필요도 없었다.

“언론 통제의 결과가 이런 식으로 나타날 줄이야.”

옆에 있던 다른 요원들도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안민우를 바라봤다.

긴급 상황이 해제되고, 숨어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왔다. 그들이 본 건 몬스터를 밟고 있는 혜성뿐.

- 이혜성! 이혜성!

시민들은 혜성의 사진을 찍고 난리가 났다.

“이것 좀 보십시오.”

요원 하나가 다가와서 안민우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방송국에서는 이혜성이 몬스터를 밟고 있는 사진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제보가 빗발치는 상황. 스튜디오의 아나운서가 더 흥분해서 날뛰었다.

“이걸로 이혜성에게 반감을 가졌던 일부 여론은 쏙 들어가겠군.”

안민우는 쓰게 웃으며 혜성에게 다가갔다.

***

빌딩 사이 그늘.

2남 1녀가 난감한 표정으로 혜성을 보고 있었다. 안민우 등 정보국 요원들이 있는 곳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운이 좋은 놈이군. 하필 그 타이밍에 블랙의 몬스터가 나타나다니.”

“운도 실력이다. 게다가 영웅은 하늘이 내린다고 하지 않았나?”

“뭐야? 그럼 저놈이 타고난 영웅이라는 거야?”

그들은 허탈한 웃음을 삼키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아무튼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실장님께서 내리신 지령도 있으니까.”

가운데 선 여자, 만월은 실장을 짧게 언급했다.

그의 목표는 블랙의 타도만이 아니었다. 이혜성을 일본 쪽으로 전향시키거나 굴복시키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같은 시각.

300미터 떨어진 맞은편 골목 어귀.

장진우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그들을 향해 귀를 쫑긋거리고 있었다. 공간을 뛰어넘어 소리를 감지하는 스킬이었다.

“뭐라고 합니까?”

막내가 초조한 듯 물었다.

쉿, 장진우는 검지를 입술에 붙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잘 모르겠군.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일본어를 배워두는 건데.”

이윽고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막내와 한수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관광하는 것은 별로 문제될 게 없었다. 영어와 짧은 일본어를 섞어 쓰면 됐으니까. 하지만 지금처럼 중요한 정보를 파악해야 할 때는 불편했다. 몇 가지 인상적인 단어를 들었으니, 숙소에 가면 기억을 더듬으며 인터넷을 검색해야 할 것 같았다.

“어쩌죠?”

한수호는 고개를 슬쩍 내밀어 놈들을 살폈다. 놈들은 볼일이 끝났는지 어디론가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일단 저들을 미행하자.”

“어설프게 미행하면 눈치챌 수 있을 겁니다.”

이번엔 막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업그레이드된 공간 탐지술이 있으니까. 너무 가까이 접근할 필요는 없어. 놈들의 반경 3km 안에만 있으면 돼.”

장진우는 막내와 한수호를 재차 돌아보며 시선을 교환했다. 막내와 한수호도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오늘 밤엔 상당히 많은 일이 벌어질 것 같군.”

그는 다른 곳에서 대기하고 있는 두꺼비 연구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곤 놈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장진우와 막내, 한수호는 알지 못했다. 그때 멀리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눈이 있었음을.

서쪽으로 2km쯤 떨어진 고층 빌딩 옥상.

“저놈들 맞지? 한국에서 온 요원들. 제로 프로젝트의 진실을 찾는다는 놈들 말이야.”

가죽 재킷을 입은 남자가 망원경으로 장진우를 클로즈업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마스크 때문에 얼굴은 안 보입니다만, 체형을 보니 맞는 것 같습니다. 셋이 몰려다니는 것도 그렇고요. 두꺼비처럼 생긴 놈은 전투 요원이 아니니까 가까운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겁니다.”

회색 조끼를 입은 남자가 마찬가지로 망원경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죽 재킷을 입고 있는 남자의 오른손 중지가 얼핏 보였다. 망원경을 들고 있는 손이었다. 그의 중지 첫 마디에는 작은 네잎클로버 문신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어디를 가는 거지? 누구를 미행하는 건가?”

재킷을 입은 남자는 그들이 걷고 있는 방향으로 망원경을 옮겼다.

2남 1녀가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며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일본 정보국의 요원들입니다. 인상착의를 보니 각각 만월, 유성, 청풍인 것 같습니다. 한국의 요원들이 미행하는 걸 아직 모르는 것 같습니다.”

조끼를 입은 남자가 놈들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한국의 요원들은 분명 자신들과 만나기로 한 상태였다. 그런데 왜 뜬금없이 일본의 요원들을 쫓고 있을까? 둘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장진우는 공간 능력자라고 했어. 그가 고유 스킬로 일본 쪽 요원들에게서 뭔가 발견한 게 아닐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보는 것하고 가까이서 보는 것은 다를 테니까요.”

“음.”

재킷을 입은 사내는 잠시 고민했다.

이건 계획에 없었던 일. 그렇다고 상부에 보고하고 행동하자니, 한국 쪽 요원들을 놓칠 것 같았다.

“한국 쪽 요원들을 좀 더 지켜보자.”

재킷을 입은 사내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곤 다른 곳에서 대기하고 있는 기술팀에게 전화했다.

“나야. 위성 해킹 가능하지? 지금부터……”

음모를 꾸미는 자들. 미행하는 자들. 그 미행하는 자들을 또 미행하는 자들. 상황은 점점 이상하게 돌아갔다.

***

L 호텔 VIP 룸.

흰 마스터는 신경질적으로 재킷을 집어 던지고 소파에 앉았다. 기껏 기습을 준비했는데, 결과적으로 혜성만 도와준 셈이었다.

검은 마스터는 방에 들어서며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뭐?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그의 목소리가 크고 높아졌다.

흰 마스터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는 흰 마스터의 눈치를 보며 전화를 끊었다.

“일이 꼬였습니다. 일본 정보국과 이혜성만으로도 벅찬데, 누군가 우리 쪽 데이터에 접근한 흔적을 찾았습니다.”

검은 마스터가 흰 마스터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어떻게? 누가?”

흰 마스터는 화보다 의문이 먼저 치밀었다.

그들의 데이터는 몇 겹으로 암호화돼 있었다. 그가 컴퓨터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었지만, 데이터의 보안은 일본의 정보국도 뚫을 수 없다고 했다.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건 아닙니다. 구체적인 증거도 남지 않았으니까요. 다만 여러 정황으로 추측해 보건대, 블러디 클로버라는 조직이 다녀간 것 같습니다.”

“블러디 뭐?”

“해커 집단에서 출발한 조직인데…….”

검은 마스터는 블러디 클로버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정보의 공개를 주장하는 자들. 블랙처럼 점조직으로 운영되는 반정부 조직이었지만, 추구하는 방향은 정반대였다.

“…… 이상입니다. 놈들은 정부의 제로 프로젝트도 오래 전부터 팠던 거 같습니다. 이번에 우리 쪽 데이터에 접근한 것도 그 제로 프로젝트 때문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검은 마스터는 난감한 듯 한숨을 내쉬며 말을 맺었다.

“이혜성. 한국 NSA. 일본 내각정보조사실. 거기에 CIA 등 다른 나라의 정보국들까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흰 마스터는 검지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눈을 감았다.

혜성을 중심으로 각국의 정보국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들의 눈과 귀는 자연스럽게 블랙으로 향할 터. 모든 걸 버리고 지하로 숨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차라리 잘됐군. 블러디 클로버를 이번 일에 끌어들인다.”

이윽고 흰 마스터가 감았던 눈을 뜨며 말했다.

“네?”

검은 마스터는 눈을 크게 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잊었나?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테러에 집착했는지? 애초에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뭉쳤는지 말이야.”

흰 마스터는 착잡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모든 것의 시작은 제로 프로젝트. 이 지긋지긋한 악연을 이젠 끊을 때가 됐다.

“불필요하게 오래 끌 필요 없어. 계획을 변경한다.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빨리 우리의 목표를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르지.”

흰 마스터는 목소리를 낮춰 뭔가를 길게 설명했다. 결심하는 것이 어려웠지, 일단 결심하니 그다음은 의외로 쉬웠다.

“알겠습니다.”

검은 마스터는 언제나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테이블 아래, 그는 주먹을 살짝 움켜쥐고 있었다.

‘인제 와서 모든 걸 버리자고?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누구 맘대로?’

검은 마스터는 어금니를 깨물며 감정을 삭였다.

일단은 흰 마스터가 수장. 하지만 그는 수장의 말을 따를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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