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눈치싸움 (3)
저녁 8시 무렵.
혜성은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일행들과 도쿄타워 전망대에 올라갔다. 블랙이다 몬스터다. 뒤숭숭한 세상이어서 관광산업이 크게 위축됐지만, 여전히 즐길 사람은 즐기고 있었다. 젊은 연인들과 가족단위 관람객으로 제법 붐볐다.
“한국과 일본. 흔히 애증의 관계라고 하는데,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하네요.”
혜성은 타워를 천천히 둘러보며 웃었다.
문득 63스퀘어가 떠올랐다. 휘황찬란한 야경, 붐비는 관광객, 아기자기하고 다양한 볼거리 등. 전체적인 분위기는 한국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음식과 문화, 기후 등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으니까요. 역사적으로도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고 말입니다. 실제로 옛날 일본어에는 한국어와 비슷한 단어가 많습니다.”
안민우가 옆에 붙어서 이것저것 설명해줬다.
경호원들은 약간 거리를 두고 둘을 뒤따랐다. 옷을 평범한 관광객처럼 입고 있었지만, 건장한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니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저기 보이는 건……”
혜성이 멀리 남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는 도중이었다.
- 꺄아아!
어디선가 여자의 높고 긴 비명이 들렸다. 타워 아래쪽. 처음엔 한 명이었지만, 곧 여럿의 비명과 고함으로 변했다.
“뭐야?”
타워에 있는 다른 이들도 당황하는 가운데, 핸드폰과 스마트 워치가 일제히 울어댔다.
“몬스터?”
혜성도 스마트 워치를 확인하곤 이내 놀란 표정이 돼 안민우를 바라봤다.
A급 게이트.
도쿄타워 근처에 변종 게이트가 나타났다는 긴급 재난문자였다.
“젠장! 뭐가 이렇게 빨리 열려?”
혜성은 급히 타워 난간 쪽으로 달려갔다. 안민우와 경호원들이 급히 뒤따랐다.
탑이 워낙 높아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유심히 바라보니 과연 타워 남쪽에 보라색 게이트가 보였다. 벌써 반쯤 열린 상태. 중세 일본 스타일의 갑옷이 게이트 너머로 언뜻 보였다.
혼비백산, 울부짖으며 달아나는 사람들. 급히 출동한 군경들. 거기에 경적을 울리는 차들까지. 일대는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변했다.
위잉, 다시 핸드폰과 스마트 워치가 울어댔다. 몬스터에 대한 추가 정보의 알람이었다.
“얼굴 없는 무사?”
혜성은 알람을 확인하곤 비명처럼 외쳤다.
A급 몬스터 얼굴 없는 무사.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해골병사처럼 검을 들고 갑옷을 입은 놈들이었는데, 몽달귀신처럼 이목구비가 없는 놈들이었다. 키는 약 3미터 이상. 덩치가 크고 무기까지 들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최악의 몬스터였다.
“안 되겠습니다. 일단 우리가……”
혜성은 스마트 워치의 알람을 끄고 안민우를 돌아봤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알람을 확인하고 껐는데, 스마트 워치는 계속 진동했다.
“왜 이러……”
혜성은 무심코 스마트 워치를 다시 확인했다가 멈칫했다.
너무 황당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새로운 긴급 재난문자가 와 있었다.
A급 몬스터 삼두 익룡.
그 이름처럼 머리가 셋 달린 비행형 몬스터였다. 드래곤의 아류라는 말도 있었지만, 비행형이기 때문에 능력자들도 상대하기가 꽤 까다로웠다.
“게이트 2건이 동시에 터졌다고?”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안민우를 바라봤다.
게이트는 차원 간 에너지 중첩으로 인해 벌어지는 이상 현상. 게이트 두 개가 동일 좌표에서 동시에 터진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안민우와 일본 쪽 능력자들도 황당한 표정으로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혜성은 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하늘과 땅, 두 곳에 동시에 나타난 몬스터. 전망대는 서로 먼저 도망치려고 밀치는 사람들 때문에 난리였다. 질서의 일본인이라더니. 목숨이 오가는 긴급 상황에서는 역시나 예외인 것 같았다.
‘일단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게 먼저다.’
혜성은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몰린 엘리베이터 쪽으로 달려갔다. 경호원들이 뭐라고 외치며 따라왔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진정하십시오. NSA 이혜성입니다!”
혜성은 가면을 벗어 던지며 큰 소리로 외쳤다.
물론 한국어였다. 일본 사람이 알아들을 리 없었다. 하지만 굳이 이름을 밝힐 필요는 없었다. 혜성의 얼굴은 온종일 TV와 인터넷에 도배된 상태였다. 그의 얼굴이 곧 신분증이자 안전의 상징이었다.
- 이혜성, 이혜성이다!
사람들은 모두 그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했다. 몇몇은 눈물을 글썽이며 혜성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혜성은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했다.
“역시 이혜성. 저게 영웅의 힘인가?”
안민우는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영웅은 난세에 나온다는 말을 알 것도 같았다.
“이혜성 혼자서는 무리입니다.”
“우리도 나서겠습니다.”
일본 쪽 요원들도 팔을 걷어붙이고 혜성에게 다가가려 했다.
“아니. 이번엔 이혜성에게 모든 걸 맡긴다.”
안민우는 팔을 뻗어 요원들을 막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차라리 잘 됐다. 하늘과 땅, 양쪽 모두에 몬스터가 나타난 상태. 이혜성이 이걸 어떻게 처리할지 보고 싶군.”
그는 기대에 찬 눈으로 혜성을 바라봤다.
대의를 위해선 약간의 희생이 따를 수도 있다. 이럴 때 보면 안민우는 뼛속까지 일본인이었다.
***
도쿄 타워 아래.
“저거 뭐야?”
마스크를 쓴 여자가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코드명 만월. 일본 정보국의 차세대 에이스 중 하나로 거론되는 능력자였다.
“네가 소환한 거 아니었어?”
왼쪽에 있던 사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눈이 가로로 길게 찢어진 자였다.
“맞아. 이혜성을 시험해 보겠다고 했잖아.”
오른쪽에 있던 사내도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왁스로 헤어스타일에 잔뜩 힘을 준 자였다.
둘의 코드명은 각각 청풍과 유성. 만월과 함께 떠오르는 차세대 주자들이었다.
“무슨 소리야? 난 얼굴 없는 무사만 소환했다고.”
만월은 황당한 표정으로 멀리 1시 방향을 돌아봤다.
변종 게이트가 2/3쯤 열린 상태였다. 안에서 뿜어지는 몬스터의 기운이 더욱 강해졌다.
“그럼 뭐야? 우연히 다른 게이트가 같은 곳에서 터졌다?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돼?”
“당연히 말이 안 되지. 복권 1등에 연속 10번 당첨되는 게 더 빠를걸?”
청풍과 유성은 만월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적어도 둘이 아는 한, 게이트가 중첩해서 열린 건 이번이 최초였다.
“혹시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변종 게이트를 연 건가?”
만월은 하늘의 게이트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삼두 익룡도 머리를 반쯤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몬스터 모두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난 게 아니었다.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소환한 몬스터였다. 두 놈은 곧 서로를 감지하고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혹시 블랙이……?”
만월은 뒤늦게 뭔가를 떠올렸다.
몬스터를 이용한 테러. 블랙의 전형적인 수법 중 하나였다.
“어쩌지? 이대로 이혜성을 공격할 거야?”
다시 청풍이 다급하게 물었다.
“아니. 그건 불가능해.”
그녀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덧붙였다.
“내가 소환한 놈들은 진짜 몬스터가 아니야. 연구소에서 만들어진 놈들이거든. 그리고 놈들은 진짜 몬스터를 만나면 무조건적으로 공격하도록 세팅됐다고.”
그녀의 말대로였다.
- 크아아아!
얼굴 없는 무사는 하늘을 올려보며 수중의 대검을 수직으로 크게 휘둘렀다. 잔뜩 화가 난 눈치. 그리고 그 분노와 살기는 하늘의 삼두 익룡을 향하고 있었다.
***
도쿄타워 남쪽 I 빌딩 옥상.
“씨팔. 저거 뭐야?”
흰 마스터는 난간에 기대 타워 쪽을 바라보며 욕설을 퍼부었다. 너무 흥분한 탓에 오랜만에 한국식 욕이 나왔다.
“저놈이 저기서 왜 나오지?”
옆에 있던 검은 마스터도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들이 부른 건 삼두 익룡뿐이었다. 얼굴 없는 무사는 계산에 없던 몬스터였다.
얼굴 없는 무사는 우리 쪽에서 소환할 수 있는 게 아닌데? 그렇다고 자연발생적으로 생겼을 리도 없고. 대체 누가 소환한 거지? 어떻게? 여러 의문이 둘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혜성이 데려온 경호원의 짓인가?”
흰 마스터는 검은 마스터를 향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한국 쪽 정보에 따르면, 이혜성의 경호원은 모두 물리 계통의 능력자입니다.”
검은 마스터는 대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게다가 한국 쪽 연구소는 이제 막 게이트 오프너를 개발한 상태였다. 몬스터를 소환해 수하처럼 부리는 단계까지 가려면 적어도 이삼 년은 필요했다.
“혹시 내각정보조사실 소속의 능력자가 아닐까요? 코드명 만월이라고 했나? 그들의 능력자 중에 제법 뛰어난 소환술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검은 마스터는 일본 정보국 쪽의 자료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정보국에서 혜성을 보조하기 위해 뛰어난 능력자 세 명을 파견했다는 첩보가 있었다.
“만월? 그년이?”
그제야 흰 마스터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이혜성이 우리의 기습을 예측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응하기 위해 근처에 만월을 대기시켜 놓은 것이죠. 이것 외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겠지.”
“만월 외에 다른 능력자들도 근처에 깔렸을 겁니다. 더는 무리입니다.”
검은 마스터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할 수 없지. 근처에 대기하고 있는 애들한테 전해. 도쿄타워는 내버려 두고, 지상의 몬스터를 먼저 공격하라고.”
“알겠습니다.”
검은 마스터는 고개를 끄덕인 뒤 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혜성이 나타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면 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옥상이 분주해졌다.
“역시 이혜성. 막무가내로 덤빌 줄 알았는데. 이젠 지모까지 갖춘 건가?”
흰 마스터는 혜성의 얼굴을 떠올렸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혼자 영웅인 척 다 했지만, 속엔 능구렁이가 들어 있는 놈이었다. 지금도 도쿄 어딘가의 호텔에 편히 앉아서 이 사태를 구경하고 있을 터.
“이혜성.”
그는 혜성의 이름을 되뇌며 부득 이를 갈았다.
전초전으로 혜성을 견제하려는 계획은 전면 취소. 작전을 처음부터 재검토해야 할 것 같았다.
***
도쿄타워 아래.
“와, 기가 막히는군. 혜성이 형은 인제 여기까지 와서도 사건을 끌어들이는 건가? 이런 데서 만나니까 반갑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좀 복잡하네요.”
막내는 걸음을 멈추고 황당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서로 밀치며 도망치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이혜성 어쩌고’ 하는 말이 언뜻 들렸다.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도쿄타워에 혜성이 나타났다는 건 대충 감으로 때려 맞힐 수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니. 소설도 이런 식으로 전개하면 욕먹습니다. 이쯤 되면 혜성 선배님이 악당이라고 합리적으로 의심해 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한수호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마냥 농담이 아니었다.
“이제 어쩌죠? 우리가 온 건 형한테도 비밀이잖아요.”
막내는 난감한 표정으로 장진우를 돌아봤다.
“글쎄. 우린……”
장진우는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다가 멈칫했다.
우측 30미터 거리. 수상한 삼인조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들 도망가기 바쁜데 그들 셋만 비교적 침착했다.
“어? 저놈들 뭐죠?”
“능력자인 것 같습니다.”
막내와 한수호도 곧 그들을 발견했다.
삼인방의 신경은 온통 하늘과 지상의 몬스터에만 쏠려 있었다. 누군가가 멀리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이어서 가운데 선 여자가 손을 휘저으며 뭐라고 웅얼거렸다.
- 크아아아!
그녀의 손짓에 따라 얼굴 없는 무사의 괴성이 커졌다. 어떤 스킬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한 능력자가 분명했다.
“혹시 저들이 블러디 클로버가 아닐까?”
도쿄타워. 정체불명의 능력자. 앞뒤가 대충 맞아떨어졌다.
“일단 저들을 지켜보자.”
장진우는 놈들을 힐끔거린 뒤, 근처에 있던 빌딩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