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순직이 힘들다-143화 (143/150)

# 143. 눈치싸움 (2)

일본 L 호텔 VIP 룸.

- 이상 NHH……

벽에 걸린 TV에서는 기자가 공항의 상황을 전하고 있었다. 혜성이 경호원들과 함께 뒷문으로 빠져나갔다는 소식이었다. 기자들이 전하는 현장의 분위기는 허무함이 가득했다.

“이상하군요. 기자들이 이렇게 많이 몰려들다니. 정보국 놈들. 너무 공개적으로 나서는 것 아닙니까?”

검은 마스터는 TV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모든 채널에서 이혜성의 뉴스만 반복해서 내보내고 있었다.

“정부 기관의 단점 중 하나는 너무 비대하고 절차를 따진다는 거지. 아무리 비밀을 지키려 해도 이혜성이 일본에 오는 걸 숨길 수 없었을 거야. 그러니 차라리 공개적으로 전환한 거지. 게다가 공개적으로 나서면 우리의 행동도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흰 마스터는 리모컨으로 TV를 끄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곤 소파에 몸을 파묻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스폰한 놈들 반응은?”

“정부의 일이니 함부로 나설 수 없다고 발을 빼는 분위기입니다. 일부는 아예 우리를 공공연히 비난하고 있고요. 여론 때문에라도 상당히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입니다.”

“영악한 새끼들. 그저 돈을 받아 처먹을 줄만 알지. 정보국이 이번 프로젝트를 공개한 이유 중 하나도 그들 내부에 있는 우리의 눈과 귀를 막으려는 의도였을 거야.”

흰 마스터는 나직이 욕설을 퍼부었다. 정보조사실의 회의를 직접 본 것처럼 정확했다.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하급 능력자들 일부가 벌써 동요하는 눈치입니다.”

“놈들이 우리의 사업체를 급습한다는 정보가 있어. 일단 몸 사리고, 사업체의 경계를 강화해. 여차하면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사업체를 폐쇄하고.”

흰 마스터는 검지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반체제 테러 조직이라고 무조건 힘만 내세우는 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역시 자금. 하다못해 지하 마켓에서 폭탄이나 아이템 하나를 구하려고 해도 그게 다 돈이었다.

“알겠습니다.”

검은 마스터도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조직 운영의 전반을 담당하는 건 흰 마스터였지만, 사업체는 그와 회색 마스터의 몫이었다. 이제 회색 마스터가 없으니 그의 역할이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여긴 우리 홈그라운드. 물러설 수 없지. 이혜성에게 인사도 할 겸, 화려한 불꽃놀이 한번 해주는 게 어떨까?”

이윽고 흰 마스터가 감았던 눈을 뜨며 물었다.

조직 대 조직의 싸움은 기세가 중요했다. 그들은 상대가 일본 정보국이라 해도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 이혜성이 와 봤자 소용없다.

성대한 불꽃놀이는 이걸 강조하는 일종의 무력시위였다.

“최근 도쿄의 치안이 대폭 강화됐습니다. 쉽지 않을 텐데, 어디가 적당하겠습니까?”

검은 마스터가 그의 눈치를 보며 넌지시 물었다.

“도쿄에서 제일 눈에 띄는 곳. 뭐니 뭐니 해도 도쿄타워가 제일 아닌가?”

흰 마스터는 모처럼 눈을 빛내며 가볍게 웃었다.

***

K 호텔.

안민우는 자신의 일본 이름으로 VIP 룸 4개를 예약해뒀다. 체크인할 때 언뜻 들어보니, 비즈니스 어쩌고 하는 게 사업가들로 위장한 것 같았다.

혜성의 방은 그중 가운데. 안민우와 경호 팀장이 혜성의 보호라는 명목으로 같은 방에 투숙했다. 물론 실제 목적은 보호가 아니라 감시였지만.

짐을 풀고 잠시 숨을 돌린 뒤, 혜성과 중요 요원들은 옆방에 모였다.

“……이상이 현재 일본 쪽에서 파악한 블랙의 사업체입니다. 놈들은 점조직의 형태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현재 파악한 13군데 외에 더 많은 사업체나 아지트가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들에게 동조하는 능력자는 약……”

안민우는 특수 암호화된 태블릿을 이용해 블랙에 대해 브리핑했다.

지난번에 막내와 한수호를 스카우트하려던 일본의 길드도 자금줄 중 하나가 블랙의 위장 사업체와 연결돼 있었다.

‘우리가 아니라 일본이라고?’

혜성은 상대의 말을 되새기다가 피식 웃었다.

안민우가 재일교포라는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그는 시종일관 ‘우리나라’가 아니라 ‘일본’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생각보다 많군요.”

경호 팀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야쿠자가 암흑가를 휘어잡는다는 것도 다 옛날 말입니다. 블랙은 지금까지 조직 운영을 위해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 했으니까요. 이제 암흑가는 블랙이 접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안민우는 혜성을 슬쩍 곁눈질한 뒤 말을 이었다.

“이번 작전의 코드명은 화이트. 먼저 놈들의 사업체를 급습해 손발을 자르고, 상부로 올라가며 마스터의 목을 조이는 것입니다.”

첫 번째 목표는 편의상 A-1이라고 불리는 도쿄 쪽 사업체였다. 일본 쪽 정보에 따르면 아이템의 불법 유통에 주력하는 사업체였는데, 능력자는 물론이고 각종 결계와 변종 게이트 등으로 경계가 철통같다고 했다.

“……블랙은 이번 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일본 정보국에 심어둔 첩자들을 총동원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B-1 사업체를 급습한 것처럼 연기를 피운 뒤, 기습적으로 A-1을 공격할 것입니다.”

다만 타깃 A-1이 어딘지는 안민우도 정확히 모르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작전 당일에야 공개될 것 같았다.

“성동격서입니까?”

이번엔 혜성이 손을 들고 물었다.

“전체적으론 비슷합니다. 물밑에서 삼중 간첩과 수십 번의 탐색전이 있었지만 말입니다.”

안민우는 작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혜성은 일본 정보국과 블랙 사이에서 벌어졌을 첩보전을 상상했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처럼 서로 속고 속이는 암투가 치열했을 것 같았다.

작전은 이틀 후 자정.

그때까진 좀 여유가 있었다.

“오늘 오후에는 관계 기관들하고 화상회의가 계속 잡혀 있습니다. 내일은 일본 정보국에서 혜성 씨를 위해 준비한 새로운 아이템의 동기화를 비롯해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고 말입니다.”

안민우는 혜성의 스케줄도 간단히 설명했다. ‘아주 바쁠 거다.’ 이 짧은 말을 장황하게 늘인 것이었다.

다행히 오늘 저녁에는 회의가 끝나고 두어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잠깐 도쿄를 둘러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앞으론 계속 긴장의 연속일 테니 말입니다. 쉴 때는 확실히 쉬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프로의 일입니다.”

안민우가 웃으며 제안했다.

“어디가 좋습니까?”

“도쿄타워 어떠십니까? 도쿄의 랜드마크 중 하나이니까요. 근사한 일식집에서 저녁을 드시고, 도쿄타워에서 야경을 감상하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도쿄타워라.”

혜성은 언젠가 TV에서 본 도쿄타워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에펠탑보다 높은 철제 구조물. 거기라면 도쿄의 시가지가 한눈에 보일 것 같았다.

‘이번 작전의 주요 무대는 도쿄가 되겠지? 그렇다면 도쿄를 높은 곳에서 봐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알겠습니다.”

혜성은 담담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오후 5시 신주쿠 H 비즈니스호텔.

“아이고, 죽겠다.”

막내는 캐리어를 구석에 밀어 넣고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죽겠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이게 뭐예요? 정말 이인실 맞아요?”

한수호는 문가에 서서 황당한 표정으로 방 안을 둘러봤다.

막내와 전전했던 경기도 외곽의 싸구려 여관들은 여기에 비하면 왕궁이었다. 가구는 둘째치고, 캐리어 두 개를 놓기에도 좁은 넓이가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

“이것도 감지덕지해. 요즘 블랙과의 전쟁 때문에 도쿄 전역이 비상이잖아. 장 팀장님이 방 두 개 예약하느라 무척 힘드셨다고 하더라고.”

막내는 고개만 살짝 돌려 한수호를 바라보며 핀잔을 줬다.

그제야 한수호는 작게 투덜거리며 방에 들어와 캐리어를 정리했다. 옷가지를 걷어내자 특수 케이스에 담긴 장비들이 나타났다. 전부 이상 무. 녀석은 장비를 일일이 확인한 다음에야 침대 옆의 나무 의자에 앉았다.

막내가 침대맡에 있는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혜성이 공항에 도착했다는 뉴스가 아직도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었는데, 일본 뉴스 특유의 과장된 자막이 인상적이었다. 스튜디오에서는 전직 능력자로 보이는 패널들이 알아듣지 못할 일본어로 뭐라고 길게 논평하고 있었다.

“형은 귀빈 대접받으며 화려하게 왔는데. 나중에 비싼 초밥이라도 사라고 해야겠는걸?”

막내는 오늘 그들의 일정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부산까지 이동해서 국제여객선을 타고, 다시 대중교통을 통해 도쿄까지 들어왔다. 시간이 빠듯해서 식사도 편의점 샌드위치와 캔 커피로 대충 때운 상태. 피로와 허기가 겹치니 죽을 맛이었다.

둘은 옷을 갈아입고 장비를 챙긴 뒤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로비의 소파에서는 장진우와 두꺼비 연구원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다가 보니 회전초밥집이 있더라고. 거기서 먼저 배 좀 채우고 움직입시다.”

두꺼비 연구원이 피로 때문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견은 없었다.

“그다음은요?”

막내가 자판기에서 녹차를 꺼내 따서 마시며 물었다.

“그들을 만나러 도쿄타워로 가야지.”

장진우는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본 뒤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로비에는 호텔 종업원 둘만 있었고, 얼굴을 보니 전형적인 일본인이었다. 장진우와 일행들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었다. 여기서 장진우가 말한 그들은 블러디 클로버. 다만 그들은 장소만 예고했을 뿐, 구체적인 시간의 언급은 없었다.

“근데 왜 도쿄타워에서 만나자고 했을까요? 다른 은밀한 장소도 많을 텐데 말입니다.”

한수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글쎄. 아무래도 역으로 생각한 것 같아. 거긴 평소에도 사람이 많으니까. 몸을 숨기기 상대적으로 쉽고, 여차하면 도주하기도 용이하다고 판단한 거겠지.”

장진우는 다시 나머지 셋을 돌아본 뒤 말을 맺었다.

“일단 도쿄 타워로 가자. 그들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겠지만, 약속 장소를 미리 봐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

그날 저녁, 커피숍 구석.

2남 1녀가 커피숍 구석에 앉아 뭔가 속삭이고 있었다. 도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20대 중반의 젊은이들이었다.

“아주 요란하게 오셨군.”

벽 쪽에 혼자 앉은 여자가 백팩에서 태블릿을 꺼내 인터넷 창을 열었다. 이혜성의 사진이 메인 화면에 걸려 있었다.

“이자가 이혜성인가? 강해 보이진 않는데?”

“아직 2차 각성 전이니까. 잊었어? 놈은 각성하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는 걸. 심지어 인격도 달라진다더군. 게다가 지금은 리제너레이션을 통해 훨씬 강해졌고 말이야.”

“그래 봤자야. 유수혁이 한국에서는 차세대 에이스로 통했다며? 그런 놈이 랭킹에 들 정도면, 한국의 수준도 뻔하지.”

“아무튼 회색 마스터도 제압한 놈이다. 방심은 금물이야.”

그들은 혜성의 사진을 돌려보며 한마디씩 했다. 여자가 방심할 수 없다는 쪽, 남자들은 혜성을 조금 우습게 보는 쪽이었다.

“그래서? 실장님 말대로 조용히 그를 따르자고?”

눈이 가늘게 찢어진 남자가 코웃음 치며 여자에게 물었다.

“그건 아니지. 그의 실력이 진짜인지, 한국 언론의 허풍인지,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어?”

여자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은 뒤,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혜성의 별명이 사건을 부른다고 해서 ‘마그네틱 리’라고 했지? 도쿄 어디에서든 쉽게 볼 수 있는 곳에서 사건이 터진다면 어떻게 될까? 도쿄의 랜드마크 같은 곳 말이야. 그럼 그의 성격상 만사를 팽개치고 달려오지 않겠어?”

“도쿄의 랜드마크?”

이번엔 왁스로 머리에 잔뜩 힘을 준 남자가 되물었다. 흥미가 잔뜩 동한 눈치였다.

“그래. 도쿄타워. 거기에서 작은 이벤트를 하나 열자.”

여자는 다른 둘을 돌아보며 소리 죽여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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