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 눈치싸움(1)
일주일 뒤, 경기도 외곽 회색 콘크리트 밀실.
막내와 한수호, 장진우 등은 테이블에 앉아 벽에 걸린 TV를 보고 있었다.
NSA의 긴급 기자회견이었다. 수많은 기자가 운집한 가운데 NSA 대변인의 공식 브리핑이 나오고 있었다.
- ……역사에 남을 한, 중, 일 동북아 삼국의 공조입니다. 목표는 블랙을 타도하는 것. 대한민국 정부는 이 시간부터 국제 사회, 특히 동북아시아에 테러집단이 발붙일 곳은 없음을 천명하며……
대변인은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준비된 자료를 읽어 내려갔다.
혜성의 일본 진출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자리였다. 중국도 팀의 구성이 완료되는 대로 합류하겠다는 내용도 곁들어졌다.
“다들 이번 작전에 기대가 큰 것 같군. 여론은 어때?”
장진우는 리모컨을 들어 볼륨을 줄였다. TV에서는 브리핑이 끝난 뒤,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안 그래도 블랙의 테러 때문에 뒤숭숭하지 않았습니까? 왜 하필이면 일본하고 손을 잡느냐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체로 이번 일을 환영하는 분위기입니다.”
“어쨌건 역사적인 순간 아닙니까? 인터넷 게시판을 보더라도 다들 난리가 났습니다.”
막내와 한수호는 여론 동향을 차례대로 전했다.
“우리 얘기는 없어?”
구석에서 장비를 정리하던 두꺼비 연구원이 섭섭한 듯 끼어들었다.
“당연히 있죠. 명색이 이혜성 군단인데. 좌 막내, 우 수호는 지금 어디에 있나? 그들도 이번 프로젝트에 합류하나?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엥? 둘만? 나는?”
“글쎄요. 연구원님은 별로……. 송도연구원 쪽 관계자들하고 일부 마니아들만 찾는 눈치던데요.”
“이 새끼들이. 혜성 씨의 시그니처 아이템들을 다 누가 만들었는데. 대수영, 암흑의 수호자, 카피캣. 그거 다 내가 키운 거 몰라? 나 없으면 오늘의 이혜성도 없었다고.”
“예, 어련하시겠습니까?”
막내와 두꺼비는 농담 같은 진담을 한참 동안 주고받았다. 결전을 앞둔 상태였지만, 의외로 편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자, 농담은 그만하고. 우리도 이제 슬슬 가야지?”
장진우는 가볍게 손뼉을 쳐서 분위기를 바꿨다.
준비 완료.
그들도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다. 일주일이란 시간은 연구소의 비공개 장비들을 활용해 레벨업하기 충분했다. 정확히 측정해 보진 않았지만, 온몸에서 전보다 힘이 넘쳤다. 은연중에 풍기는 각성자 특유의 기운도 짙고 강해져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제 흑염룡이 울고 있습니다.”
한수호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씨발. 이 와중에도 새 아이템의 이름을 흑염룡이라고 짓다니. 역시 이혜성 주니어답다.”
막내는 가볍게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물론 한수호는 그의 말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혜성 씨는 일본 쪽 관계자들과 함께할 거야. 듣자 하니 NSA의 요원 세 명도 동행한다더군. 우린 우리대로 따로 움직일 거야. 우리는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거니까.”
장진우는 막내와 한수호, 두꺼비 연구원을 차례대로 돌아보며 일정을 간단히 설명했다.
일단 부산항으로 향한다. 거기서 위조된 여권을 받은 뒤, 국제여객선을 타고 기타큐슈로 이동한다. 그다음 다시 일본의 대중교통을 이용해……. 말만 들어도 상당히 고된 일정이었다. 국적기를 타고 당당하게 떠나는 혜성과 조금 비교됐다.
“일본 놈들을 어떻게 100% 믿겠습니까? 음흉한 새끼들. 언제, 어디서 뒤통수를 쳐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놈들입니다.”
“게다가 밤안개가 속한 비밀 조직도 있고 말입니다. 놈들도 혜성 선배님을 일종의 장기말처럼 부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막내와 한수호는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각오는 됐다. 준비도 됐다. 이제 남은 건 혜성을 따라 일본으로 가는 것뿐이었다.
“역시 결정적인 순간에 혜성이 형을 지키는 건 우리지.”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선배님. 원조 이혜성 군단이 갑니다.”
막내와 한수호는 결연한 표정으로 한마디씩 했다.
‘아, 오글거려. 저 새끼들은 또 뭘 본 거야? 그냥 연구소에서 편하게 연구나 할 걸 그랬나?’
두꺼비 요원은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정오 무렵, 도쿄 나리타 국제공항.
도착장은 대형 카메라를 든 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한, 중, 일의 기자들은 물론, 푸른 눈의 기자들도 여럿이 눈에 띄었다. 지나던 사람들도 괜히 발걸음을 멈추고 기자들을 힐끔거렸다.
“언제 오는 거야?”
“올 때가 지났는데.”
“이상한데? 오늘은 연착할 날씨도 아닌 거 같은데.”
기자들은 전광판을 초조하게 바라봤다.
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KE701편. 인천에서 출발한 비행기였다. 안내에 따르면 비행기가 도착한 지 30분이 지났지만, 그들이 기다리는 사람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출입국관리소에서 무슨 문제라도……”
누군가가 불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찰나였다.
“이혜성이 떴다!”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기자들은 소리가 난 곳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젠장. 그들이 기다리던 도착장이 아니었다.
혜성은 일본 쪽 관계자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후문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검은 정장, 짙은 선글라스.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한국에서부터 그를 따라다녔던 경호 팀장과 경호원 두 명도 보였다.
“이혜성 씨! 한마디만……”
기자들이 앞다투어 마이크를 내밀었지만, 혜성은 이미 준비된 검은색 승용차에 반쯤 올라탄 상태였다. 혜성이 번쩍이는 플래시를 향해 잠깐 손을 흔든 뒤, 혜성이 탄 승용차는 다른 승용차 네 대에 앞뒤로 호위를 받으며 공항을 빠져나갔다.
승용차 안.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비밀을 지킨다고 했는데, 출입국관리소 쪽에서 정보가 샌 거 같습니다. 일본 기자들도 한국 못지않게 극성이죠?”
조수석에 앉은 일본 쪽 관계자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금테 안경을 쓴 탓인지 능력자보다 관료의 이미지가 강한 남자였다. 한국 이름은 안민우. 내각정보조사실에서 일하고 있는 재일교포였다. 직급은 모르겠지만, 공항 관계자들이 쩔쩔매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고위층인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닙니다.”
혜성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본은 처음이십니까?”
“몇 년 전에 친구하고 오사카에 여행을 간 적이 있습니다. 도쿄는 처음입니다만.”
“오사카 좋죠. 재일교포들도 많고요. 아무튼 앞으론 우리가 모시겠습니다. 드시고 싶은 음식이나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작전이라고 해서 쉴 새 없이 싸우기만 하는 건 아니니까요.”
안민우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턴 이걸 쓰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안민우는 금속으로 된 아이템 케이스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혜성이 열어보니 정교하게 만든 가면 세 장이 들어 있었다. 슬쩍 들어보니 손이 비칠 정도로 얇고 정교했다.
“너구리의 가면입니다. 한국에서는 천면 여우의 가면을 쓰죠?”
“네. 하지만 천면 여우의 가면은 마스크를 쓴 것처럼 호흡이 좀 불편합니다.”
혜성은 좀 탐탁잖은 표정을 지었다. 그가 천면 여우의 가면 대신 얇은 마스크를 애용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너구리 가면은 천면 여우의 가면을 베이스로 해서 호흡구를 개량했거든요. 사용기간도 길게 늘리면서 불편함은 최소한으로 줄였습니다. 여분도 있으니까 상황에 따라 돌려쓰시면 됩니다.”
안민우는 조수석 수납공간에서 다른 것을 꺼내 건넸다.
이번엔 두툼한 서류봉투였다. 혜성이 열어보니 일본에서 쓸 신용카드와 가짜 신분증 등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이 들어 있었다.
“이걸 뭐라고 읽어야 합니까? 제 이름인가요?”
혜성은 가짜 신분증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사진에는 너구리 가면을 쓴 사내가 있었다. 이름은 金村어쩌고.
“김촌? 김 씨들이 사는 마을이란 뜻인가?”
“‘가네무라’입니다. 일본에선 흔한 이름 중 하나죠. 어차피 항상 우리가 따라다녀서 딱히 쓸 일은 없겠지만요.”
안민우는 입가를 씰룩거리며 소리 죽여 웃었다. 운전석의 사내도 빙그레 미소 짓는 걸 보니 한국어를 알아듣는 것 같았다.
“호텔에 짐을 풀고 잠깐 쉬시죠. 한국에서 오신 귀한 손님 아닙니까? 불편한 것 없이 각별히 모시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안민우가 그 외에도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설명해주는 가운데, 이윽고 그들이 탄 승용차는 도쿄 도심에 접어들었다.
***
내각정보조사실 본청 제1 회의실.
“지금 막 이혜성이 도착했습니다. 예정대로 호텔에서……”
나이 지긋한 관료가 정면의 대형 스크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스크린에는 혜성이 에스코트를 받으며 공항을 빠져나오는 사진들이 차례로 나왔다.
“여론은 어때?”
조사실장은 깍지를 낀 손으로 턱을 받치며 물었다.
“일부 보수 언론에서 불만이 나오고 있습니다. 일본에도 훌륭한 능력자가 있다. 왜 굳이 한국 쪽 능력자에게 일을 맡기느냐. 이런 내용입니다. 특히……”
국내 1부 부장이 송구한 듯 대답했다.
“멍청한 새끼들. 누군 한국하고 손을 잡고 싶어서 잡은 줄 아나?”
조사실장은 가볍게 욕설을 내뱉은 뒤 말을 이었다.
“블랙의 마수는 생각보다 오래되고 깊어. 솔직히 우리 중에도 블랙과 연계된 자가 있을지 모르니까. 이런 상황에서 우리끼리 블랙 소탕 작전을 개시한다고? 작전이 새 나가서 역으로 우리가 구석에 몰리는 꼴을 보고 싶은 건가?”
부장들은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들 내부에도 블랙에게 돈을 받은 자가 있을 것이다. 누구나 속으로 알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금기어였다. 그런데도 실장이 이 말을 꺼낸 건 블랙 쪽으로 움직이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조사실장은 국내 1부 부장을 홱 돌아봤다.
“여론은 자네가 알아서 돌려. 이건 일, 한 양국의 공식적인 동맹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다. 대충 이런 식으로 말이야. 각 언론사에 연락해서 이혜성 영웅 만들기도 하고. 동시에 연예인 스캔들이나 좋은 떡밥 몇 개 던지면, 대중은 그쪽으로 관심을 돌릴 거야.”
언론 통제를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여론조작이야말로 그의 특기. 그는 일사천리로 명령했다.
“이혜성 전담팀은 어떻게 됐어?”
조사실장은 국제부장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돌렸다.
“말씀하신 대로 신원확인을 완료한 최정예로 구성했습니다. 코드명 만월, 청풍, 유성 등이 이혜성과 동행할 겁니다.”
국제부장은 일어나서 두 손으로 공손히 두툼한 서류철을 건넸다.
“모처럼 맘에 들게 처리했군.”
조사실장은 요원들의 신상명세를 훑어봤다.
일본 정보국에서 차세대 에이스로 주목받는 능력자들이었다. 혜성에 비해 꿀릴 게 없었다.
“이혜성은 용병이야. 우리 입장에서는 비싼 값을 치르고 데려온 셈이지. 놈을 잘 지원하되, 빼먹을 수 있는 건 최대한 빼먹어야 한다. 블랙과 목숨 걸고 싸우는 건 어디까지나 이혜성. 우린 보조 역할로 머물다가 마지막 순간에 치고 빠진다.”
“알겠습니다.”
부장들은 고개를 숙이며 힘차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