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폐허 (5)
지하 마켓 광장 터.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신을 자처하는 남자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그러니까 당신 말은 내 각성이 우연이 아니다. 난 일종의 선택받은 자다. 모든 건 정해진 인과율에 따른 결과다. 대충 이런 뜻입니까?”
혜성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살폈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진지한 것 같기도 하고. 표정이나 태도만으론 신의 속내를 종잡을 수 없었다.
“그렇죠. 이해가 빠르시군요. 뭐, 믿고 안 믿고는 당신의 자유지만 말입니다.”
신은 어깨를 으쓱하며 엷은 미소를 보였다.
‘미치겠군.’
혜성은 짧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지영은 눈을 감고 자는 듯 누워 있었다.
문득 장르가 변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막무가내로 순직하려는 싸구려 코미디. 그다음엔 블랙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액션 활극이었는데, 이젠 뜬금없이 미스터리가 튀어나왔다.
“이게 만약 소설이라면, 산으로 가는 막장이군.”
혜성은 다시 신을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이 얘기를 내게 해주는 이유가 뭐죠? 당신이 직접 해결하면 될 거 아닌가요?”
“분명 난 권능을 지닌 자. 당신들의 표현대로 신입니다. 하지만 내가 이 세계에 직접 개입하는 건 금지됐습니다. 우리끼리의 신사협정이라고 할까요? 우린 어디까지나 세상의 관찰자이자 보조자. 역사를 끌고 가는 건 어디까지나 당신들, 인간입니다. 그리고 저는 따로 할 일이 있고 말입니다.”
혜성은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했다.
당신이 정말 신이라면, 우리 인간은 왜 만들어졌나? 다른 신들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나? 정말 사후 세계라는 게 있는 건가? 신을 자처하는 남자에게 묻고 싶은 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정말 이 세상은 신이 만든 겁니까? 그렇다면……”
그가 한창 말하는 도중이었다.
왜엥!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성난 고함과 지축을 흔드는 구둣발 소리도 들렸다.
“벌써? 빠르군. 내 몸이나 핸드폰에 추적 장치라도 심어둔 건가?”
혜성은 잠깐 입구 쪽을 돌아봤다.
경호원들의 기척이 점점 커졌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아무튼 당신은……”
그는 다시 신을 돌아보며 뭐라고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아무도 없었다. 그저 한 줄기 바람만 그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벽에 기대 앉힌 강지영도 바람에 실려 사라진 듯 보이지 않았다. 그는 뭔가에 홀린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기 있다!”
“이혜성을 잡아!”
대신 경호원들의 성난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렸다. 경호 책임자의 성난 욕설도 섞여 있었다.
혜성은 순순히 양손을 깍지 껴서 정수리 위에 올렸다.
“모든 일의 연결고리는 블랙. 역시 일본에 가서 직접 확인해야겠군.”
그는 신이 남긴 말을 되뇌며 경호원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
NSA 본부 감사실.
“이혜성은 어때?”
수석 조사관은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인 보고서들을 훑어보며 물었다.
- 이혜성의 동향.
- 이혜성의 위법 행위에 관한 법률팀의 자문 결과.
- 이혜성의 귀환에 대한 여론.
……
이혜성, 이혜성, 이혜성.
보고서는 온통 혜성에 관한 것들이었다. 벌써 몇 주째 혜성의 보고서만 보고 있었다. 이젠 혜성의 이름만 떠올려도 대번 짜증이 났다.
“별일 없습니다. 어제 답답해서 경호원들 몰래 잠깐 외출했는데, 곧 돌아왔다고 합니다.”
혜성의 경호 팀장은 열중쉬어 자세로 보고했다.
혜성이 경호팀을 따돌리고 멋대로 외출해 누군가를 만났다. 이걸 사실대로 말하면 혜성도 문제였지만, 경호원들은 더 큰 문제였다. 특히 경호 팀장은 최소 견책.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놈답지 않게 조용하군. 또 여기저기 나서면서 사건을 끌어들일 줄 알았는데 말이야.”
조사관은 혜성의 보고서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뜨끔.
경호 팀장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빨개졌다.
“잘 감시해. 또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혹시나 해서 경호 인력을 서른 명으로 증원했습니다. 발목에 GPS도 부착해 뒀으니 큰 사고는 없을 겁니다.”
팀장은 표정을 지우고 담담히 대꾸했다.
“이혜성을 따라다니는 것도 이제 일주일 남았군. 그때까지만 고생해. 뭐, 일본까지 경호원으로 동행할 수도 있다는 말이 있지만.”
조사관은 책상에 놓인 다른 보고서를 훑어보고 팀장에게 내밀었다.
“이혜성의 다음 스케줄입니까?”
경호 팀장은 보고서를 받아들고 표지를 열었다.
코드명 터미네이션.
국장 직속의 기획실에서 작성한 한, 일 양국의 공조에 대한 1급 서류였다. 작전의 핵심은 이혜성. 그가 NSA의 정예들과 일본으로 건너가 블랙을 제거한다는 내용이었다.
“섭섭하십니까?”
팀장은 조사관의 눈치를 보며 슬며시 웃었다.
“이상하단 말이야. 여기 있을 땐 눈엣가시였는데, 막상 외국으로 간다니까 미우나 고우나 우리 식구라는 생각이 들어.”
“일본에는 가위바위보도 질 수 없다. 뭐, 이런 겁니까?”
“비슷해. 집에서 구박받는 못난이 동생이라도 밖에서 남한테 맞고 들어오는 건 못 참잖아? 때려도 내가 때리고, 잡아도 내가 잡는다. 이런 심리지.”
조사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혜성의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혜성 씨가 홀가분하게 갈 수 있도록 마무리 잘해. 어찌 됐든 한국과 NSA의 대표로 나가는 거잖아. 적어도 국제 망신은 당하지 않게 서포트하자고.”
“알겠습니다.”
경호 팀장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병원 진료실.
“정말 가는 거냐?”
태호는 안경을 고쳐 쓰며 되물었다.
같은 질문만 벌써 세 번째였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혜성이 간다는 게 못내 아쉬운 눈치였다.
“그래.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냐? 리제너레이션은 특히 비싼 거라며. 안 간다고 하면 일본 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들걸?”
혜성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우리 막내는요? 막내 자식이 며칠째 연락도 없고. 막내도 같이 가나요?”
김연우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는 며칠 사이에 두 뺨이 움푹 파여 있었다. 만나면 늘 티격태격 싸우는 현실 남매였지만 걱정이 큰 모양이었다. 옆에 앉은 태호가 슬그머니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네. 막내는 지금 수호하고 먼저 비밀 임무를 수행 중입니다. 별동대처럼 따로 행동하는 거죠. 장진우 팀장님 아시죠? 그분이랑 다른 요원들도 함께 갔으니 걱정 안 해도 될 겁니다.”
혜성은 핸드폰을 꺼내 막내의 문자를 보여줬다.
물론 반은 거짓말이었다. 막내가 한수호, 장진우 등과 함께 있는 것은 맞았지만, 그들이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는 혜성도 몰랐다. 그저 국장의 비밀 임무가 있었을 거라고 막연히 추측할 뿐이었다.
“그러면 다행인데.”
김연우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무슨 비밀 임무이길래 행선지도 비밀이냐? 그리고 일본이라니. 또 블랙하고 관계된 거냐?”
태호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물었다.
“미안하다. 자세한 건 비밀이야.”
“나도 따라갈 수 없을까? 네 주치의로서. 내가 아니면 누가 널 치료하냐?”
“걱정하지 마. 너만큼은 아니지만, 솜씨 좋은 힐러도 같이 간다고 했으니까. 아마 버퍼도 동행할 테고.”
혜성은 강지영과 한수은을 떠올렸다.
한 명은 은밀한 잠입과 버프를 할 수 있는 능력자. 다른 한 명은 태엽을 감듯 신체의 시간을 뒤로 돌리는 능력자. 본연의 전투력도 강했지만, 현장에선 가장 믿음직한 조력자들이었다.
“뭐,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태호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가 자신의 자리를 대신한다고 생각한 탓일까? 녀석은 꽤 섭섭한 눈치였다.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분위기 왜 이래? 해외 진출이니까 오히려 축하해야 하는 거 아니야?”
혜성은 짐짓 쾌활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신촌에서 삼겹살이나 먹을까? 유진 씨도 부르고. 지난번 사건으로 여기저기서 받은 후원금이 제법 많거든. 내가 한턱 쏠게.”
“또 사건에 휘말리는 건 아니겠지? 요즘 인터넷에 떠도는 네 별명 몰라? 마그네틱 리. 네가 일본 만화의 주인공처럼 사건을 끌어들인다는 말이 있다고.”
태호도 김연우의 눈치를 보며 과장되게 웃었다.
“좋아요. 유진이한테는 제가 연락할게요.”
김연우도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환하게 웃었다.
혜성의 다음 행선지는 이미 결정된 상황이었다. 무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주변인들의 역할은 혜성이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무거운 한숨과 울음보다는 과장된 웃음과 축하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
SJ 기획, 소회의실.
“말씀하신 대로 강지영이 혜성 씨를 만나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일단 일본까진 NSA 쪽 요원들과 동행하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행정상의 편의를 돕는 보조 요원들입니다. 막상 작전이 시작되면 우리와 함께할 겁니다.”
한수은은 어제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CF 촬영. 탈출. 비밀 접선. 사실 CF를 촬영한 스태프들은 SJ 기획의 자회사 직원들로 위장한 그들의 요원이었다. 딱히 어려울 건 없었다.
“수고했군.”
“그런데 강지영이 좀 이상한 일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상한 일?”
박무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한수은을 올려다봤다.
‘이걸 보고해도 될까?’
한수은은 이렇게 생각하며 망설이는 눈치였다.
“뭔데 그래?”
“실은…… 어제 강지영이 혜성 씨에게 메시지를 전달한 뒤,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던 중에 기억의 일부가 지워졌다고 합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커피숍 구석. 시간상 약 10분의 공백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강지영의 일을 간단히 설명했다.
“뭐야? 누군가가 강지영을 제압하고 혜성과 몰래 대화를 나눴다. 그다음에 다시 강지영을 커피숍에 데려다 놓았다? 뭐, 이런 건가?”
박무영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강지영의 실력은 그녀를 가르친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절대 어디 가서 실수할 사람이 아니었다.
“현재로서는 그것밖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CCTV는?”
“CCTV에도 찍히지 않았습니다. 강지영이 나온 부분만 고장 난 것처럼 훼손됐습니다.”
“혜성 씨는 뭐라고 해? 혜성 씨는 뭔가 봤을 거 아닌가?”
“혜성 씨도 말이 없습니다. 자신도 비슷하게 당했다고만 했습니다.”
“대체 누가?”
박무영은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블랙과 NSA만 해도 골치가 아팠다.
“혹시 새로운 적이 나타난 건가?”
“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한수은도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무튼 혜성 씨는 지금 뭐 해?”
“지인들 만나서 신변 정리 중입니다. 마음이 복잡한 것 같습니다.”
“알았어. 강지영의 일은 따로 팀을 꾸려 알아보도록 하지. 자넨 혜성 씨와 일본의 일에만 집중해.”
“알겠습니다.”
한수은은 꾸벅 묵례하고 물러났다.
박무영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제 거의 다 왔다. 남은 건 블랙과의 전면전. 흔들리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