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 폐허 (4)
허름한 모텔.
‘미치겠네.’
닥터 J는 때 묻은 장판 위를 뒹굴 거리는 삼인방을 둘러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우락부락한 대머리 아저씨, 자칭 아기 드래곤은 오늘도 손가락을 빨며 낮잠을 자고 있었다. 소도둑처럼 생긴 놈은 구석에서 거울을 보며 꽃단장 중이었고, 마법사는 창가 쪽에 앉아 뭐라고 웅얼거리며 명상에 잠겨 있었다.
닥터는 침대 위로 고개를 돌렸다.
신과 왕은 팝콘을 먹으며 TV를 보고 있었다. 그것도 반쯤 색이 바랜 속옷 차림으로. TV의 뉴스에서는 광화문 광장에서 있었던 혜성의 원맨쇼를 재방송하고 있었다.
“에휴.”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들과 함께 한 지도 꽤 됐지만, 이들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은 아직도 적응되지 않았다.
- 영웅의 귀환. 국민 영웅이 화려하게 부활하며……
TV의 화면이 바뀌었다. 스튜디오의 아나운서는 상기된 얼굴로 호들갑을 떨었다.
‘저 아나운서가 흥분한 게 세 번째던가, 네 번째던가?’
닥터는 아나운서의 한결같은 반응을 떠올리며 피식 헛웃음을 터뜨렸다.
혜성의 활약, 긴급 뉴스, 흥분한 아나운서의 멘트. 뉴스마다 공식처럼 반복됐다.
“역시 이혜성이네요. 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은데요?”
“당연히 더 강해져야지. 앞으로 만날 적들도 지금까지와 비교가 안 되게 강해질 테니까. 겨우 이 정도로 만족하면 안 되지.”
왕과 신은 뉴스를 보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신은 혜성의 귀환이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앞으로 만날 적? 그럼 신님은 이혜성의 다음……”
그런데 닥터가 둘의 대화에 끼어들려는 찰나였다.
“이혜성이다!”
신은 입가로 가져가던 팝콘을 던지고 벌떡 일어났다.
“이혜성이요?”
“어디요?”
왕과 다른 녀석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뒷골목의 허름한 장급 모텔. 게으른 길고양이 한 마리가 창 밖에 앉아 길게 하품하는 것 외엔 다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잠깐 나가야겠다. 이혜성에게 할 말이 있어.”
신은 뭐에 홀린 것처럼 주섬주섬 트레이닝복을 걸쳤다.
‘뭔 소리야?’
닥터는 황당한 표정으로 신을 올려다봤다.
“어디 가시는데요?”
왕도 그를 따라 싸구려 트레이닝복을 입으며 물었다.
“어디긴? 이혜성을 만나러 가는 거지. 이혜성이 싸울 진짜 적에 대해 할 말이 있거든.”
“진짜 적이요? 블랙 말씀이십니까?”
“아니. 블랙은 진짜 적이 아니야. 어떻게 보면 그들도 가련한 피해자들이지.”
신은 혀를 차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적?”
“블랙 말고 적이 또 있어?”
왕을 포함한 신하들은 눈을 끔뻑거리며 시선을 교환했다.
신은 평소에도 뜬금없는 행동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을 저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지만, 이번엔 평소와 달리 조금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대체 이혜성이 지금 어디 있는데요? 그리고 이혜성은 요즘 경호원들이 늘 따라다니고, 바쁘답니다.”
“이혜성은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 귀찮은 파리들이 꼬이기 전에 후딱 만나고 와야 해.”
“왜 만나시려는데요?”
“보면 알아. 아무튼 이혜성은 지금 상태로 안 돼. 내가 도와줘야 해. 또 파리들이 끼어들어서 방해하기 전에 말이야.”
신은 순식간에 외출 채비를 마치고 방을 나섰다.
“아이고, 답답해. 대체 뭘 도와주시려는데요? 그냥 신님이 직접 나서는 건 어떠십니까?”
왕은 답답한 듯 가슴을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신은 방문을 열려다가 멈칫하고 왕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그건 안 돼. 여기 개념으론 신들의 협약이 있거든. 내가 어느 정도 도움은 줄 수 있지만, 직접 나서서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는 없어. 역사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만드는 것. 내가 나서면 나와 반대편에 선 신들도 움직일 테니까.”
“반대편의 신? 악마입니까?”
“악마라. 뭐, 여기 개념으론 악마가 제일 적당하겠군. 우리 세계에서야 신, 천사, 악마의 개념이 무의미하지만.”
신은 알 듯 말 듯한 말만 늘어놓고 방문을 열었다.
“아이고, 좀 기다려 주십시오. 같이 가요.”
왕이 재킷을 반쯤 걸치고 따라나섰다. 미녀와 마법사, 잠이 덜 깬 아기 드래곤도 어느새 외출 준비를 거의 끝낸 상태였다.
“아니야. 우르르 몰려다니면 너무 눈에 띄거든. 이번엔 나 혼자 조용히 다녀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신은 방을 한 번 둘러본 뒤 쾅하고 문을 닫았다.
“저 양반이 또 왜 저러는 거지? 우리가 매번 신이라고 띄워 줬더니, 지가 정말 신인 줄 아나?”
왕은 황당한 표정으로 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잠깐? 띄워 줬다고? 그럼 신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
듣고 있던 닥터가 문득 반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당연하지. 넌 우릴 바보나 미친놈으로 생각한 거야?”
왕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오! 그럼 저 사람은 뭔데?”
닥터는 눈을 반짝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혹시 이놈들은 일부러 미친 척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사실은 나 같은 정상인이 아닐까?’
그의 두 눈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것처럼 반짝거렸다.
“뭐긴, 갓(god)이지. 저 양반이 얼굴은 토종 한국인인데, 알고 보니 외국물 좀 먹었더라고. 지난번에 이상한 외국어로 쏼라쏼라 중얼거리는 걸 봤거든. 한국 스타일은 신. 외국 스타일은 갓. 이거 아니었어?”
왕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맞아, 맞아. 역시 우리 전하가 똑똑하시다니까.”
“우리 중 넘버 투잖아. 괜히 왕이시겠어?”
미녀와 마법사, 아기 드래곤도 자못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 씨발 놈들. 그러면 그렇지.”
닥터는 짜증을 내며 침대에 털썩 누웠다.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
사방이 콘크리트로 된 밀실.
“이게 정말이야? 혹시 번역이 잘못된 건 아니고?”
두꺼비 연구원은 눈을 비비며 노트북의 화면을 확인했다. 그의 안경에 세로로 길게 쓴 일본어가 비쳤다.
여간해선 놀라지 않는 장진우도 이번엔 말이 없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각성자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할 수도 있다고.”
“번역은 세부 내용은 틀릴 수도 있지만, 전체적인 맥락은 정확할 겁니다. 형하고 제가 몇 번이나 재검토했으니까요.”
막내와 한수호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믿기 어려운 내용이군. 지금까지는 각성자가 생긴 걸 어떻게 설명했지?”
장진우는 굳은 표정으로 두꺼비를 돌아봤다. 물론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니었다.
“다양한 이론이 있지만, 파장이론이 가장 대표적이죠. 게이트에서 특수 파장이 나오고, 이것이 소수의 인간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거 말입니다.”
두꺼비는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맞아. 그랬지. 각성자의 스킬이나 등급, 전투 흔적 등을 파악할 때도 고유한 파장을 이용했으니까. 그런데 이건……”
장진우는 허탈하게 웃으며 다시 노트북을 바라봤다.
캡처 사진은 군데군데 글자가 뭉개져 정확히 알아볼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지우개로 지우고 있는 걸 급히 캡처한 것처럼. 하지만 대략적인 내용은 알아볼 수 있었다.
- …… 게이트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세상에 존재…… 최근에야 그 활동이 활발해졌을 뿐. 그리고 각성자는 후천적으로 깨어나는 게 아니…… 각성자는 운명처럼 선천적으로 정해져 있다. 게이트의 파장은 능력을 끌어내는 원인이 아니라, 유전자에 잠재된 능력을 여는 열쇠에 불과하다. …… 따라서 유전자 조작을 통해……
장진우는 화면의 번역을 소리 내어 읽어봤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해괴한 소리. 이미 몇 번을 읽어 봤지만, 여전히 믿기 어려웠다.
정체불명의 발신자가 보낸 첨부 파일은 여기까지였다.
“이게 정말일까?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최초 작성자는 누구이며 또 누가 이걸 지운 걸까?”
장진우는 막내와 한수호, 두꺼비 연구원을 차례로 돌아보며 혼잣말처럼 물었다.
막내도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했던 질문이었다. 아무도 대답할 수 없었다.
“그건 모르겠어요. 다만 제로 프로젝트에 살짝 언급됐다는 생체실험, 그리고 여기에 언급된 생체실험이 다른 것 같진 않아요.”
막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끝을 흐렸다.
두 생체실험의 연결고리이자 현재 유일한 단서는 블랙. 블랙의 마스터라면 이것에 대한 단서를 쥐고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일본에 가야 할 이유가 추가된 것 같군.”
장진우는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나직이 중얼거렸다.
***
지하 마켓 중앙 광장.
“……이상이 우리의 계획이에요. 예정대로라면 앞으로 약 3개월. 그 안에 끝장을 봐야 해요.”
강지영은 굳은 표정으로 3개월을 강조했다.
혜성은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 태호의 진단대로라면 그에게 남은 시간도 약 3개월이었다. 블랙을 소탕하고 화려하게 대미를 장식한다. 물론 조국을 위한 죽음이기 때문에 그 결과는 순직. 그가 애초에 꿈꿨던 장렬한 최후에 딱 맞았다.
“혜성 씨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요.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은 잠시 접어두세요. 지금은 해피엔딩만 생각하자고요.”
강지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시간이 촉박하네요. 일정대로 준비하기엔 너무 빠듯하지 않을까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조직 내부적으로 고민이 많았다는 말을 들었어요. 하지만 우리가 시간을 들여 만반의 준비를 하는 만큼 블랙도 조직을 재정비할 시간을 얻게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준비가 부족하더라도 블랙이 대비할 시간을 주지 말자는 게 상부의 생각인 것 같아요. 마침 일본 쪽에서도 그걸 원하고요.”
“하긴. 일본은 놈들의 홈그라운드인 셈이니까요. 그리고 전쟁에서 시간을 끌면, 그만큼 민간의 피해도 커질 테고요.”
혜성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속전속결.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때였다.
“그건 그렇고 우린……”
강지영이 머뭇거리다가 뭔가를 말하려는 찰나였다.
그녀는 돌연 말끝을 흐리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온통 하얀색뿐인 눈동자, 힘없이 풀린 다리, 축 늘어진 양팔, 그리고 살짝 벌어진 입까지. 약물에 취해 의식을 잃은 사람의 반응이었다.
“괜찮아요?”
혜성은 급히 그녀를 부축해 바닥에 눕혔다.
‘뭐지?’
그는 그녀의 코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그녀의 호흡은 고르고 멀쩡했다. 마약이나 독극물에 당한 것 같진 않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잠깐 의식을 뺏은 거니까. 금방 회복될 겁니다.”
그의 뒤쪽에서 웃음기를 머금은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혜성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가 그대로 굳어졌다.
“오랜만이군요. 그때는 제가 인간들의 약물에 취해 있었죠. 제대로 인사할 겨를도 없었고요. 저 기억하십니까?”
한 사내가 불타는 금요일 방향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마침 한낮의 햇빛이 그의 등 뒤에 후광처럼 비쳤다.
“신?”
혜성은 눈을 크게 뜨고 상대의 이름을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