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폐허 (3)
인사동 안국역.
한때 외국인 관광객으로 북적이던 거리는 역을 중심으로 반경 500미터가 완전히 통제된 상태였다. 혜성은 멀리 통제선이 보이는 곳에서 택시를 세우고 천천히 걸어갔다.
“죄송합니다. 민간인 출입 금지입니다!”
군경들이 듬성듬성 서서 주요 길목을 차단하고 있었다.
BJ와 외신 기자 두어 명이 역 근처를 서성이며 촬영했지만, 그들도 군경의 통제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대로변에서 핸드폰으로 근처를 촬영하는 외국인 관광객도 몇 명 보였다.
“수고 많으십니다.”
혜성은 뒷주머니에서 NSA 신분증을 슬쩍 꺼내 보여줬다. 물론 손가락으로 이름과 사진은 교묘하게 가린 채였다.
“충성!”
상병 하나가 거수경례하며 신분증을 쳐다봤다.
병사가 신분을 정확히 확인하기 전, 혜성은 번개같이 신분증을 거둬들였다. 결국 병사가 본 건 NSA의 마크와 소속뿐. 병사는 멀리 서 있던 부사관을 힐끔 쳐다본 뒤 옆으로 비켰다.
‘게이트 현장에서 NSA는 어떤 기관보다 우선한다.’
혜성은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통제선 안으로 들어갔다.
병사에게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병사는 신분증을 다시 보자고 말할 수 없었다. 군대로 치면 상병이 소령한테 신분을 재확인하자고 덤비는 꼴일 테니까. 병사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혜성은 안국역을 통해 지하 마켓으로 들어갔다. 간밤에 내린 비 때문에 특유의 습하고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적막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어딘가에 숨어 있는 몬스터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본래 지하 마켓은 안국역에서도 더 깊숙한 곳에 결계로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그의 폭주 탓에 지금은 철로 안쪽에 휑하게 그 모습이 드러나 있었다. 하늘에서 보면 운석이 떨어진 듯 안국역 안쪽이 움푹 파이고, 그 안에 폐허가 된 지하 마켓이 자리 잡은 형상이었다.
“내가 정말 이렇게 했다고?”
혜성은 잠시 철로 근처에 서서 옛 지하 마켓을 둘러봤다.
당시 그는 폭주한 상태였다. 그가 기억하는 건 회색 마스터가 준 몬스터의 힘을 복용하는 것까지. 그다음은 전혀 기억이 없었다. 눈을 떠 보니 태호의 병원이었다.
사진으로 많이 봤지만, 직접 보니 느낌이 또 달랐다. 사전 정보가 없이 이곳을 봤다면, SS급 몬스터가 날뛴 줄 알았을 것이다.
“폭탄이라도 터진 거 아니야?”
그는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일본의 도시를 떠올렸다. 핵폭탄을 맞고 폐허가 된 시가지. 폭삭 주저앉은 건물들과 바람에 흩날리는 회색 재. 현재 지하 마켓의 모습과 똑같았다.
“지하 마켓의 소유주 놈들. 속이 쓰리겠군.”
그는 문득 복잡한 표정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NSA의 정보에 따르면 지하 마켓은 한 명이 아닌, 십여 명이 공동으로 소유하는 구조라고 했다. 추정되는 지하 마켓의 숫자는 전국에 약 다섯 군데. 그러나 혜성이 인사동의 마켓을 쑥대밭으로 만든 뒤, 현재는 활동이 크게 위축된 상태였다.
혜성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천천히 안으로 걸어갔다. 그가 일차로 일대를 초토화하고, 그 후 NSA와 군경 합동조사반이 며칠 동안 샅샅이 수색한 상태였다. 막연히 뭔가를 기대했지만, 눈에 띄는 단서는 없었다. 하긴, 단서가 남아 있었어도 합동조사반이 진즉 쓸어갔겠지만.
한참을 들어간 뒤, 그는 멀리 광장이 보이는 지점에서 걸음을 멈췄다. 폐허 속에 홀로 서 있는 건물. ‘불타는 금요일’ 앞이었다.
“폭주한 와중에도 애들은 지키려고 한 건가?”
그는 피식 웃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엉성하게 남은 천장의 골격 사이로 햇빛이 듬성듬성 내려앉았다. 파직, 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부스러기들이 그의 구둣발에 밟혀 바스러졌다.
혜성이 막 카운터 근처에 이르렀을 때였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뒤에서 여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
콘크리트 밀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장진우가 중앙의 테이블에 앉아 막내와 한수호를 돌아보며 물었다. 못 만난 지 일주일 정도밖에 안 됐지만, 서로 할 말이 많았다.
한쪽에서는 두꺼비 요원이 캐리어에서 뭔가 비싸 보이는 장비들을 꺼내 조립하고 있었다. 두꺼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손을 빠르게 움직였지만, 조립을 끝내고 세팅까지 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많은 일이 있었죠. 일단 서울은 위험하다고 판단해서 경기도로 이동했습니다. 각종 해킹 툴로 흔적을 지웠지만, 만에 하나라도 누군가에게 들킬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밤에는 장급 여관에서 쪽잠을 자며 버텼습니다.”
막내는 캔커피를 따며 이렇게 운을 뗐다.
“고생이 많았군. 그래서?”
“지방의 피씨방을 전전하며 자료를 검색했는데, 이상하게도 제로 프로젝트와 관련한 건 전부 금기어더군요. 관련 사이트도 다 막혔고요. 누군가가 조직적으로 은폐한 것 같았습니다.”
막내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정말 막막했다. 한 시간 단위로 피씨방을 옮기며 검색했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어. 은퇴한 선배들은 아예 나를 피하는 분위기였거든. 어쩌다 만나도 모른다고 딱 잡아떼고 도망가기 바쁘더군.”
장진우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막내와 한수호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이해됐다.
막내는 캔커피로 목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사흘 전이었나? 발신자가 불분명한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흔적을 지운다고 지웠는데, 누군가가 알아챈 모양이더군요. 아무튼 이메일에는 아무 설명도 없이 첨부 파일들만 잔뜩 있었습니다.”
막내는 잠깐 말을 멈췄다. 이제부터가 중요한 대목이었다. 한수호도 그때 옆에 있었지만, 눈을 빛내며 막내의 말을 경청했다.
“외계인, 정부의 바이러스 등 잡다한 걸 다루는 음모론 사이트 있잖습니까?”
막내가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음모론? UFO 목격담 같은 게 올라오는 사이트 말이야?”
두꺼비 연구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끼어들었다. 장비를 조립하면서도 귀는 막내 쪽으로 열어놓은 것 같았다.
“그거 다 헛소리 아냐?”
두꺼비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는 각종 음모론을 과대망상증이나 정신착란증 환자들의 헛소리로 여기고 있었다. 물론 막내는 그걸 어느 정도는 진짜라고 받아들이는 눈치였지만.
“뭐 99%가 헛소리지만, 1% 정도는 진실도 있을 거예요. 아무튼 첨부 파일은 현재 폐쇄된 그 음모론 사이트 중 하나를 캡처한 사진들이었는데, 요즘 잘 쓰이지 않는 방식으로 삼중 암호가 걸려 있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암호를 뚫어봤는데, 온종일 컴퓨터하고 씨름했죠.”
막내는 사진을 간단히 설명했다.
생체실험을 한 것으로 유명한 일본의 731부대를 연상시키는 사진들이었다. 다만 731부대와 달리 최근에 찍은 듯 고화질이라는 게 달랐다. 실험체들은 얼굴을 가린 각성자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사진들도 섞여 있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일본어로 어쩌고저쩌고 쓰인 게 캡처돼 있었는데, 일본어를 알 수가 있어야죠. 그렇다고 통째로 인터넷 번역기에 돌리자니 좀 찜찜하고. 글자를 하나하나 찍어서 해석하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막내는 두꺼비의 장비 중에서 특수 태블릿을 빌렸다. 그리곤 허리춤에 숨겨놓은 아이템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하늘의 눈과 컴퓨터에 연결하는 소형 소켓이었다.
“솔직히 저도 아직 반신반의하고 있습니다. 미친놈의 헛소리 같기도 하고. 그런데 만에 하나라도 이게 사실이라면…… 우린 각성자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막내는 장진우와 두꺼비를 번갈아 바라본 뒤, 하늘의 눈을 소켓에 끼워 태블릿에 연결했다.
***
지하 마켓, 불타는 금요일.
야구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여자가 부스러기들을 밟으며 다가왔다.
“멀리서 계속 지켜보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 대화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녀는 반갑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강지영이었다.
“그렇군요. 일을 해결한 다음엔 바람처럼 사라졌으니까요.”
혜성은 답답한 마스크를 벗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그를 보고 웃으며 마스크를 벗었다. 급하게 나왔지만, 그녀는 여전히 눈부시게 빛났다. 마치 혼자만 다른 세상에 사는 것 같았다. 그녀의 미소를 보자니, 혜성은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 요즘 일은 어떠냐? 그동안에도 계속 뒤에서 날 지원해준 것이냐? 등등. 혜성은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경호원들을 따돌리고 잠깐 외출한 상태. 한가하게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경호원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랐다.
급하긴 강지영도 마찬가지였다.
“어때요? 뭐 기억나는 거 없어요?”
“전혀요. 이걸 정말 제가 다 한 겁니까?”
“그럼요. 드래곤과 회색 마스터를 한 방에 잿더미로 만들었죠.”
강지영은 가볍게 웃은 뒤,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런 곳까지 불러내 죄송해요. 혜성 씨 주위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거든요.”
“괜찮습니다. 저도 여기에 한번 와 보고 싶었으니까요. 그나저나 회색 마스터의 시체는 찾았습니까?”
혜성은 중앙 광장 쪽을 바라봤다.
그곳은 폭주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은 곳이었다. 모든 것이 엿가락처럼 녹아내려 눌어붙어 있었다.
둘은 광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대화를 이어갔다.
“회색 마스터의 시체는 못 찾았어요. 모든 걸 잿더미로 만드는 고온, 고압의 폭발이 있었으니까요.”
강지영은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은 줄 알았던 유수혁도 살아 있었습니다. 회색 마스터라고 살아 있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글쎄요. 당시 회색 마스터는 혜성 씨의 근처에 있어 폭주의 충격파에 직접적으로 휘말렸어요. 반면 유수혁은 조금 떨어진 곳에 숨어 있었고요. 우리 쪽에서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해 본 결과, 그가 살아있을 확률은 0.01%밖에 안 돼요.”
“그걸 거꾸로 말하면 만에 하나라도 그가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군요.”
혜성은 마스터의 주름진 얼굴을 떠올렸다.
폭주에 휘말려 흔적도 없이 죽었다? 놈의 명성이나 능력에 비하면 너무 허무한 결말이었다. 지금도 놈이 어딘가에 숨어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것 같았다.
“회색 마스터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얘기해 보죠. 지금은 회색 마스터보다 더 중요한 적들이 남아 있으니까요.”
“일본입니까?”
“그래요. 일본에 있는 진짜 블랙의 타도. 사실 일본 쪽 정보국을 끌어들이는 건 저희도 망설였어요. 하지만 그땐 혜성 씨를 부활시키는 데 일본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강지영은 재차 쓴웃음을 머금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이 절대불변의 진리는 능력자 세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의 정보국은 천공의 검과 리제너레이션의 본전을 뽑기 위해서라도 악착같이 달려들 게 뻔했다.
“일본 진출은 오히려 이쪽에서 바라는 바입니다. 어차피 블랙이 있는 한 저나 내 가족은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을 테니까요. 이건 전쟁. 블랙과 저, 둘 중 하나는 완전히 소멸해야 이 전쟁도 끝날 겁니다.”
혜성은 굳은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수십 번도 더 본 유수혁과의 전투 영상이 떠올랐다. 리제너레이션 덕분에 2차 각성의 단점을 완벽히 보완한 상태였다. 누구와 붙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구체적인 일정은 어떻게 됩니까?”
이윽고 그가 강지영을 돌아보며 물었다.
“우선……”
강지영도 웃음을 거두고 말을 이었다.